백과사전 상세 본문
왕조의 얼굴 광화문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면 사는 꼴이 비슷비슷해진다. 그 엇비슷한 삶이 쌓여 문화를 이루고, 문화의 흔적으로 문화재가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재를 통해서 그것을 남긴 시대의 문화를 보고 역사를 읽는다. 왕이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던 시대에 왕이 살고 활동하던 궁궐은 정치와 행정의 핵심처요, 왕조 문화의 정수로서 대표적인 문화재의 하나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궁궐에는 조선왕조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가 고여 있다. 특히 경복궁은 조선왕조 제일의 궁궐로서 수난을 가장 많이 겪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궁궐을 밖에서 볼 때 가장 먼저, 가장 인상 깊게 만나게 되는 정문인 광화문은 우리 근대사의 격동과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광화문은 세종이 경복궁에 살기 시작하면서 건물들을 고치고 그때까지 아직 이름이 없던 궁성 문들에 이름을 붙일 때 비로소 제 이름을 얻었다. 광화문이 세워지기는 그보다 약 30년 전인 태조 4년(1395년)이었다. 태조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를 추진하고 그 첫 사업으로 궁궐(경복궁)을 지었다. 옛 터전, 고려의 수도를 벗어난 것은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요, 경복궁의 완공은 조선왕조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광화문은 그 경복궁의 정문으로 지어졌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길을 지금은 세종로라 부르지만 원래는 ‘육조(六曹)거리’라 하였다. 광화문에서 내다보아 왼편, 그러니까 동편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 오른편에는 예조, 병조, 사헌부, 형조, 공조, 장예원 등 국가의 최고 관서들이 어깨를 겯고 늘어서 있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 거리는 높고 낮은 관원들이 광화문으로 들어가는 통행로였다.
사헌부 정문 앞과 그 맞은편에는 돌로 만든 해태 한 쌍이 높은 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해태는 잘잘못을 가리는 성질을 가진 상상 속의 짐승이다. 사헌부는 관원들의 잘못을 조사하여 처벌하는 일을 하는 관서이다. 곧 법을 다루는 관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기에 그 앞에 해태를 세워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해태 앞에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릴 때 딛는 디딤돌인 노둣돌이 놓여 있었다. 존엄한 궁궐을 들어가는데 어디 말이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가 있는가. 모두 내려서 걸어 들어가라는 표지였다. 해태가 지니는 상징성과 기능을 아는 옛 관원들이 그 앞을 지나면서 어찌 옷깃을 여미지 않고 마음가짐을 바로 잡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육조거리는 통행로인 동시에 일종의 광장이었다. 그곳에서는 가끔 왕이 친히 나와서 전쟁이나 훈련장으로 나가는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거나, 일반 백성들을 불러모아 말씀을 내리기도 하고, 역으로 백성들이 엎드려 왕에게 집단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호소하는 이른바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광화문 앞은 그렇게 왕과 백성들이 만나고, 관료들이 공무를 보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광화문은 문은 문이나 예삿문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이었다. 경복궁이 왕조국가 최고의 관부로서 왕조의 심장이라고 한다면 광화문은 궁궐의 얼굴이요, 더 나아가 왕조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광화문은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던 존재였다.
사라진 광화문
하지만 그 광화문이 임진왜란 때 사라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일 만인 5월 3일, 왜군의 제일진 고니시(小西行長) 부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4일에는 가토(加藤淸正) 부대, 그리고 7일에는 본진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 와중에 서울은 초토가 되었고 궁궐도 광화문도 사라져버렸다. 누가 궁궐을 불태웠는가? 이에 대해서는 일제시기 이후 지금껏 조선의 ‘간민(姦民)과 난민(亂民)’이라는 설이 정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당시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 장교나 승려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니시 부대가 들어왔을 때는 궁궐들이 남아 있었으나, 본진이 들어왔을 때 궁궐은 전부 초토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광화문이 사라진 것은 그렇다면 그 3일에서 7일 사이의 일이요, 왜군, 그 가운데서도 초토 작전을 일삼은 가토 부대의 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인이 광화문에 저지른 첫번째 만행이었다.
임진왜란 뒤 광해군대에 가서야 궁궐을 중건하는데, 그때 중건의 대상은 법궁인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과 창경궁이었다.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덕궁 등 당장 절실하지 않은 궁궐들은 한사코 더 영건하면서도 정작 경복궁은 계속 버려두었다. 경복궁은 조선후기 내내 빈 궁궐터로 남아 있다가 고종 5년(1868년)에 가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목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아무튼 경복궁은 27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았고, 자연히 광화문도 법궁 정문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경복궁과 광화문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1890년대 이후 우리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모든 민족적인 것이 수난을 당하는 시대에 광화문만 태평할 수는 없었다. 1895년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직접 나서서 일본인들과 그 영향 아래 있는 조선군을 이끌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이른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20일 새벽 비밀리에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후 다시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빈 궁궐들은 속절없이 황폐해져갔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지 1년 만에 환궁하였다. 한데 그때 환궁한 궁궐은 경운궁(慶運宮, 지금은 덕수궁이라 불리는 궁궐)이었다. 경운궁은 광해군 이후 빈 궁궐터로 남아 있었다. 그 터에 1880년대에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공사관과 이화학교, 배재학교, 정동교회 등이 들어서 그 일대는 마치 서양 세력의 근거지처럼 변해버렸다. 고종은 그렇게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고 남은 옛 궁궐터에 다시 건물들을 짓고 그리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옮겨와서 연호를 새로 광무로 제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름대로 국권을 지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밀리고 밀리다 결국은 1907년 강제로 퇴위당하였다. 일제는 쫓겨난 황제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붙여 그대로 경운궁에 머물게 하고, 순종을 황제로 앉혀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순종이 황제로 있던 3년(융희 연간은 국권이 급속도로 기울어간 시기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저희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을 착착 진행시켰고, 결국 3년 만에 성사시켰다. 그렇게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과정에서, 또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궁궐들은 처참하게 수난을 당하였다. 일본인들은 경희궁에 저희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중학교를 세우면서 그 전각들을 헐어 없애고 이리저리 팔아치웠다. 순종이 있던 창덕궁은 효율적인 관리라는 명분 아래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하게 왜곡, 변형, 파괴하였고, 창경궁은 일본식 박물관, 식물원, 동물원이 들어선 놀이터, 창경원(昌慶苑)이 되어버렸다.
경복궁이라고 그러한 수난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일제는 1911년에 경복궁 부지를 조선총독부로 인도하여 이후 경복궁을 임의대로 처리할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15년 가을에는 경복궁에서 이른바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열었다. 시정, 곧 새로운 정치를 시작한 지 5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개선되고 진보한 상업 기타 문물을 한곳에 모아’ 보여줌으로써 ‘일본인 당국자들을 고무 진작시키는 한편 조선 민중에게 신정(新政)의 혜택을 자각시키기 위한’ 자리였다. 이제 식민지 조선을 저희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속내는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 없애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는 데 있었다.
일제는 공진회가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0년 통감부를 총독부로 개편하면서 이미 남산에 있던 통감부 청사가 비좁아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바로 착수하지는 못하다가 1915년에 와서야 사업을 확정지었다. 그 부지로서 ‘시가 중요 위치에 있는 광대한 면적’을 찾다가 경복궁 근정전 앞 약 3만 평에 눈독을 들였으며 공진회가 끝나자 바로 공사에 착수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렇게 해서 공사에 착수한 지 10년 만에 건평 2천115평, 연건평 9천604평 5층짜리 화려한 르네상스식 석조 건물로 완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되면서 그 앞에 있는 광화문은 당연히 헐려 없어질 판이었다. 일제로서는 기껏 경복궁을 시야에서 가리려고 총독부 청사를 그곳에 짓는 마당에 경복궁의 얼굴이라 할 광화문을 그 앞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라는 일본인 민예 운동가가 1922년에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 정치는 예술에 대해서까지 무례해서는 안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따위의 힘을 삼가라. 자진해서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 행할 바 아닌가. 우방을 위해서, 예술을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도시를 위해서, 특히 그 민족을 위해서 저 경복궁을 건져 일으켜라. 그것이 우리들의 우의가 해야 할 정당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 용서해다오. 나는 죄짓는 자 모두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다. 나는 그 증표로 삼고자 지금 붓을 든 것이다.
야나기의 글은 커다란 반향을 얻었고 그 덕분에 헐려 없어질 뻔한 광화문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로서는 아무래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로서는 차선책으로 헐어 옮기기로 하였다.
헐린다 헐린다 하는 광화문이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에 헐리고 총독부 청사 덕택으로 다시 지어지리라 한다. ······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놓는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튼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며 다시 짓는 그 솜씨는 피묻은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다시 옮기는 그 자리는 북악을 등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구중궁궐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이는 망치소리는 조선민족의 가슴에 부딪쳐 구슬피 울리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설의식의 「헐려 다시 짓는 광화문」이라는 글은 그때의 정황을 절절하게 전해주고 있다. 결국 광화문은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경복궁의 동북쪽 궁장으로 옮겨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건된 지 60년 만에 경복궁의 정문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렇다고 동문이 된 것도 아니요, 그저 유배당한 문, 죽은 바나 다름없는 문이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330여 년이 지나 일본인이 광화문에 가한 두번째 만행이었다.
돌아온 광화문
자리를 옮겨 형체는 유지하였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광화문은 6·25 당시 그나마 형체마저 잃어버렸다. 폭격을 당해 문루는 불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문 아닌 돌무더기로 15년 동안 버려져 있던 광화문이 1968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통령의 특명에 의한 부활이었다.
돌아온 광화문은 지금도 저렇게 앉아 있다. 홍예문이 셋 뚫려 있는 높은 석축 위에 2층 우진각 지붕을 한 문루가 자못 위풍당당하다. 하지만 돌아온 광화문을 광화문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우선 편액부터가 엉뚱하다. 제대로라면 ‘門化光’으로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한문의 글자는 위에서 아래로, 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편액은 어쩐 일인지 한글로 ‘광화문’으로 되어 있다. 1968년 당시 대통령의 친필이라 한다.
광화문의 괴이한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목조 건물 형태를 띠고 있느니만큼 문루의 기둥과 들보, 서까래와 같은 골조는 나무로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대개 그러려니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 광화문의 골조를 보면 너무나 일사불란하여 잘 훈련된 군대의 열병 분열을 보는 듯하다. 온기 대신에 차가움, 생명이 아닌 죽음의 냄새만 난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한옥 건물이 뿜어내는 분위기이다.
광화문의 파격은 또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광화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면 경복궁이 훤히 보인다. 특히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그 앞의 근정문이 바로 정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확히 정면은 아니다. 광화문의 세 문 중에서 가운데 문에 서서 보면 근정문과 근정전의 지붕이 어긋나 보인다. 가운데 문보다는 오히려 서쪽 문에서 들여다보아야 반듯하게 줄이 맞아 보인다. 근정전과 근정문이 나란히 줄을 맞추어 앉아 있는 바로 앞에서 광화문이 심통이라도 부리는 양 동쪽으로 3.5도 정도 삐딱하게 어깃장을 놓는 꼴이다. 하지만 제대로라면 광화문은 저 뒤에 보이는 근정전, 근정문과 일직선상에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어야 옳다. 그러면 이 파격은 어인 일인가. 그 비밀은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다.
원래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 곧 광화문-근정전-사정전-강령전-교태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총독부 청사를 그 선상에 놓기는 하되 방향은 일치시키지 않고 오늘날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태평로에 축을 맞추었다. 총독부 청사 앞의 광화문도 없애버리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길도 개수하여 태평로에서부터 총독부 청사가 정면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이는 곧 경복궁을 정면에서 보이지 않도록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그 축선을 비틀어버리려는 의도였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군정 청사로, 그 뒤에는 중앙청으로, 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줄곧 제자리를 지켰다. 그럴 때 광화문을 복원하였고, 복원이라고 하면서 원래 경복궁의 축이 아닌 조선총독부 청사 축에 맞추어 지었다. 그 시절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 아니라 그 건물의 정문으로 인식되었고, 그 건물과 축이 맞아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6년 11월 뜨거운 논란 끝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던 그 건물이 사라지자 광화문만 홀로 남아 근정전, 근정문과 어깃장을 놓고 있게 된 것이다.
광화문은 문이다. 네거리가 아니라 분명히 문이다. 조선왕조의 으뜸가는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이었다. 문이라면 안과 밖을 연결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광화문은 세종로의 끝 경복궁 앞에 그럴듯하게 앉아 있기는 하나, 안과 밖을 연결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광화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서 접근할 수 없다.
오늘날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참 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다는 세종로와 또 율곡로, 사직로가 이리저리 가로막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인도를 따라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한참을 빙 에돌아 지하도나 건널목을 건널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개는 지하철 경복궁 역에서 내려 접근하거나, 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가 주차장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광화문에 이르게 되면 결국은 이미 안으로 들어온 뒤에 뒤쪽 옆에서 다가가는 것 아니면 옆에서 몰래 다가가 불쑥 옆구리를 찌르는 꼴이다. 사람이나 건물이나 정면으로부터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첫인상을 올바로 가질 수 없다. 첫인상이 틀려버리고서야 대상을 바로 볼 수 있겠는가.
광화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구별하는 기능도 상실하였다. 그리로 들어가 본들 그저 텅 빈 공간일 뿐 안팎의 구별이 의미 없다. 광화문을 들어서도 경복궁이 아니다.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면 동문인 건춘문을 찾거나, 아니면 광화문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서 근정전 회랑 동편에 있는 매표소를 찾아야 한다. 광화문을 거쳐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광화문의 이런 형편은 그 본채 경복궁, 더 나아가 우리 궁궐의 형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지금 서울에는 경복궁 외에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해서 ‘고궁’ 다섯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궁이라고 하여 옛 궁궐, 망가진 궁궐이라면 말이 되지만, 온전한 ‘궁궐’은 하나도 없다. 궁궐이 온전하다는 것은 우선 그 전각들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며, 옛날처럼 왕이 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전각들이 쓰이고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 서울의 다섯 궁궐들은 하나같이 제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요, 단지 구경거리 이외에 별다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경복궁에는 줄잡아 10분의 1 정도의 전각만이 남아 있다. 가장 낫다는 창덕궁이 후원 지역의 정자들을 포함해서 후하게 계산하여도 4분의 1 정도가 남아 있다. 그나마 그 가운데 창덕궁의 중심을 이루는 내전 일대의 희정당, 대조전 등은 1917년 화재로 경복궁의 강령전, 교태전 등의 전각을 옮겨다 지은 것이요, 그나마 크게 왜곡된 것이다. 창경궁이나 덕수궁에는 대여섯 채씩이 남아 있으니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따지는 것조차 부질없는 짓이다. 그 중에 경희궁은 전멸이다. 본래 전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 터에 서울시립박물관을 지었으니 이제는 전각만이 아니라 터까지 사라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궁궐에는 여기저기 잔디밭이 넓게 깔려 있다. 우리 전통 조경에서는 양택, 그러니까 사람이 살며 활동하는 집의 담장 안에는 잔디를 심지 않는 것이 법도이다. 그런데 궁궐에 웬 잔디인가? 그 잔디밭은 속절없이 사라진 전각들의 무덤인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궁궐은 공원이나 놀이터가 되었고, 그 궁궐의 잔디밭에서 사람들은 그저 별 생각 없이 구경하고, 쉬고, 놀고, 사진 찍는다.
그 잔디밭에는 또 탑이나 부도, 불상들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유교 국가 조선의 궁궐에 불교 사찰에나 있어야 할 탑, 부도, 불상이 있는 것도 부조화의 극치이다. 사찰도 망가뜨리고 궁궐도 능욕하려는 일본인들의 소행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일본인들의 의도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셈이다.
해방 이후에 세운 서양식, 한국식 각양각색의 신식 건물들도 궁궐을 망가뜨리는 데 크게 한몫하고 있다. 그 중에 압권은 지금 민속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 1970년대 초에 국립박물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자세히 보면 기단은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그 위의 한옥 모양의 오층 지붕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 그 동쪽의 삼층 지붕은 금산사 미륵전, 그 서쪽의 이층 지붕은 화엄사 각황전으로 해서 우리 전통 건물 가운데 높고 크다는 것들을 모아다 억지로 짜 맞추어놓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도 궁궐 전각들과 어울리지 않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지 경이롭기 그지없다.
근년에 경복궁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내전 일대의 강령전, 교태전 등은 이미 공사를 완료했고, 그밖의 동궁 등으로 범위를 계속 넓혀 나가고 있다. 그러나 복원해 놓은 건물들을 보면 옛 재료를 써서 옛 공법으로 옛 모습을 온전히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를 섞어 쓰면서 전동 공구를 사용하여, 그것도 옛 모습을 불완전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되살려 놓았다. 복원 공사를 담당한 분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 건물들을 보면 새것이라서만이 아니라,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문화재가 될까 의심스럽다. 장인의 땀, 작가의 정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후대에 오래 남을 어느 작가의 작품, 우리 시대의 문화적 산물이 아닌 단지 어느 회사의 제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궁궐은 지금껏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파괴, 왜곡되었다. 일제와 해방 후 혼란기라는 늪은 참 깊고 넓다. 근년에 복원을 한다 해도 원래 모습과 그 분위기를 되찾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궁궐이 그런 것처럼, 그 얼굴 저 ‘광화문’이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 조선왕조는 참 멀게만 느껴진다. 궁궐에서 살며 활동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치와 행정, 삶과 문화는 우리와는 무관한 먼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무관심한 한 이런 상태는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재에 관심과 애정, 그리고 이해를 갖게 되면 거기 스며 있는 문화와 역사는 우리가 예전에 미처 몰랐던 새삼스런 의미를 담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망가진 문화재, 돌아온 ‘광화문’이라도 그럴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광화문 수난사 –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