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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티아데스

다른 표기 언어 Miltiades the Younger
요약 테이블
출생 BC 554경, 아테네
사망 BC 489(?), 아테네
국적 아테네, 그리스

요약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아테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리스 자유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어 역량을 인정받은 장군이었다.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 당시 지원군을 보냈다는 이유로 페르시아가 계속 아테네를 위협하자, 페르시아인들과 직접 접촉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밀티아데스는 BC 493년 이래로 아테네 지상군 10명의 장군 중 한명으로 승진했다. 평지에서 대치한 가운데, 페르시아군이 작전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을 때 평야를 가로질러 약 1.6㎞를 진격, 기습한 밀티아데스의 군대는 약 6,400명의 페르시아군을 죽이고 7척의 배를 포획하는 전과를 올린 반면, 아테네군의 희생은 192명에 불과했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을 패배시킨 후에 떠난 원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명성이 가려지긴 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와 그의 지도력은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았다.

개요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아테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초기시대

밀티아데스의 가족은 매우 유복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의 아버지인 키몬은 올림픽 대회의 전차경기에서 3번 우승했으며 그의 삼촌 대(大)밀티아데스는 트라키아 반도(지금의 갈리폴리 반도)에 반(半)독립적인 아테네 공국(公國)을 건설했다. 밀티아데스는 이 삼촌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것이다. 대밀티아데스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통치하던 지역을 자신의 이복동생의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BC 516년경 밀티아데스는 트라키아를 향해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500명의 중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리면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켜나갔다.

또한 그는 트라키아 왕자의 딸인 헤게시필레와 결혼했다. 그러나 곧이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권력을 유럽으로 확장시키며 밀티아데스를 페르시아 가신으로 삼자 그의 권위는 심각하게 제약당했다.

BC 513년경 다리우스가 스키타이의 원정 때 밀티아데스는 분견대를 이끌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는 다리우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다뉴브 다리를 파괴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밀티아데스가 즉시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추방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희박한 것이다.

반면에 BC 499년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나자 밀티아데스가 반란군에 가담했으며 새롭게 수립된 아테네 민주주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반란기간 동안 그는 렘노스 섬과 임브로스 섬을 정복하여 그것을 궁극적으로 아테네에 양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494년 반란이 실패하고 그 이듬해 다리우스의 함대가 트라키아 근해로 접근해오자 밀티아데스는 4척의 배에 보물들을 싣고 아테네로 도망쳤다(케르소네소스트라키아). 그 와중에서 밀티아데스의 큰아들인 메티오코스가 지휘하던 배가 포획되었고 메티오코스는 페르시아에 종신죄수로 끌려갔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그를 친절하게 대했으며 페르시아 공주와 결혼시키고 그들의 자식들을 페르시아 귀족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밀티아데스는 자신의 엄청난 재산과 외국인 아내 헤게시필레(그녀는 아들 키몬 2세를 낳았음), 그리고 독재자로서의 그의 경력 때문에 아테네에서 반발을 샀다. 그는 트라키아에서 독재정책을 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당시 경쟁자였던 친(親)페르시아 성향을 가진 알크마이오니즈가 선동한 때문일 것이다(알크마이온가). 그러나 그는 그리스 자유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공로로 당당하게 석방되었다.

마라톤 전투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 당시 지원군을 보냈다는 이유로 페르시아가 계속 아테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인들과 직접 접촉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밀티아데스는 BC 493년 이래로 아테네 지상군(地上軍) 10명의 장군 중 한명으로 승진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달리 그는 여전히 지상전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아테네 지주와 농부들, 그리고 시골의 중간계층들에게 우호적으로 인식되어졌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을 작정이었다. 마침내 BC 490년 여름 페르시아가 아테네로 진격했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도 진격하여 페르시아군과 맞붙어 싸울 것인지 아니면 아테네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 결정은 의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 기병대가 광활한 평지에서는 거의 맥을 못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정히 신속히 내려지길 바랐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 중에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승리를 바라는 분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이 의회를 설득하여 의회는 진격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스파르타 군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전령을 스파르타에 보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축제가 끝나는 6일 후에야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고 통보해왔다.

10명의 아테네 장군들 사이에서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바로 페르시아군을 공격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최종결정은 최고 군사령관인 칼리마코스에게 위임되었는데 밀티아데스는 그를 설득하여 즉각 아테네군이 공격하도록 결정을 내리게 할 수 있었다. 10명의 장군들이 하루씩 번갈아 군대의 작전명령을 지휘하도록 정했다. 그러나 밀티아데스를 지지하는 4명의 장군들은 자신의 명령권한을 밀티아데스에게 위임했다.

평지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산기슭에 군대를 진주시킨 밀티아데스는 공격할 적당한 시기를 기다렸다.

아테네에 대한 공격을 위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혹은 어떠한 다른 이유에서 페르시아군이 작전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았을 때 밀티아데스는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평야를 가로질러 약 1.6㎞를 진격한 밀티아데스의 군대는 약 6,400명의 페르시아군을 죽이고 7척의 배를 포획하는 전과를 올린 반면, 아테네군의 희생은 19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페르시아군대는 신속히 배에 올라타고 바다로 도주했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을 패배시킨 후에 밀티아데스는 BC 489년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전쟁중에 페르시아를 지지했던 섬들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분개의 함성이 높았다. 이것도 그의 경쟁자 알크마이오니즈가 교묘히 조장한 것이었다. 결국 사형에 처하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사고로 다친 다리가 썩어가면서 죽음에 임박해진 그에게 50탈렌트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는 아마도 석방된 직후 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비극적인 결말이 그의 역사적 공적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동료 시민들은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계획과 지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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