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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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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의학을 역사적인 사건이나 시대별로 분류하는 학문.

의학은 1800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학문으로 성장하였다. 그 이전의 역사는 미미했으나서양에서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히포크라테스의 의료행위 정신이 선서 형태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해부학과 생리학 분야가 발전을 이루었고, 18세기에는 근대적 병리학이 출현했다.

18세기말의 의학적 진보로는 제너의 종두법을 들 수 있다. 1800년 이전의 동양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중국의 대표적인 의학문헌으로는 〈황제내경 黃帝內經〉이 있고, 의료행위로는 침술이 발달했다. 한국에서는 전통의학을 바탕으로 중국 의학과 불교에 의해 전래된 일부 인도 의학이 밑바탕이 되었다. 조선 후기 명의로는 허준, 의학문헌으로는 그의 저서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들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인체구조가 거의 알려졌고, 감염성 질환 분야에서 세균학이라는 분야가 큰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건강의 유지가 질병 치료 이상으로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예방의학 분야에 발전을 가져왔다.

원시 의료와 민속

인류가 처음부터 죽음과 질병을 자연적 현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감기처럼 흔한 병은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약초요법 등으로 치료했지만 심한 질병들은 전혀 다른 범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치료도 떠도는 영혼을 몸속의 원래 제자리에 다시 불러들이거나 사악한 침범물을 주문·마법·미약·흡인 등의 방법으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고대 중동과 이집트의 의학

역사 시대 초기의 의학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부족한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의사들의 설형문자 점토판이 주된 자료이다. 그들은 질병의 예후를 예측하기 위해 희생동물의 간을 보고 점을 쳤다. 고대 이집트 의학의 모습은 바빌로니아 의학보다 명료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의사는 BC 2000년대의 임호텝이다. 예상과는 달리, 사체를 미라로 만드는 당시 관습은 인체 해부학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동양의 전통 내과와 외과

인도

인도 의학은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초기 의학사상은 베다라는 경전, 특히 BC 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타르바베다〉에 잘 나타나 있다. 베다 의학은 마술적인 치료로 가득 차 있다. 대략 BC 800~AD 1000년은 인도의학의 황금기이다. 힌두교도들은 인체에는 3가지 신성한 보편적 힘의 소우주적 표현인 3가지 원소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각각 정령(공기)·점액·담즙이라고 불렀으며, 건강은 이들 3원소의 균형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힌두교도들의 철저한 신앙 덕택에 치료에 있어서 위생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고대 힌두 의학은 외과분야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매우 광범위한 종류의 외과도구들이 쓰였다. 수술 도중에 마취제로 알코올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뜨거운 기름과 타르로 지혈했다.

중국

중국의 의학체계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외래 영향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중국 의학문헌의 대다수는 〈황제내경 黃帝內經〉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황제내경〉의 권위는 오늘날까지도 대단하다. 유럽 의학은 19세기초에야 비로소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아직도 전통적 의학체계가 널리 활용되고 있다. 중국의 전통 병리학은 음양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인들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많은 질병을 분류했는데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진단을 함에 있어서 증세의 경과, 환자의 입맛, 냄새, 꿈 등에 관해 상세히 물었으며 그들이 진단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진맥이었다.

침술은 BC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의학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때부터 침술에 대한 유명한 책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그동안 요법이 크게 개선된 점은 거의 없다. 침술의 이론은 몸의 경락에 있는 음과 양에 영향을 주어 치료하며, 치료하려는 증세나 장기에 따라 침을 놓는 자리가 선택된다.

한국

한국의 의학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의학을 바탕으로 중국 의학과 불교에 의해 전래된 일부 인도 의학에 의해 발전했다.

특히 낙랑·대방 시대에 인접한 한나라에서 의학이 전래되었다고 본다. 삼국시대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는 인삼 등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백제에서는 질병을 치료하고 약제를 공급하는 약부(藥部)가 있었으며, 의박사·채약사·약사주 등의 관리가 있었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의학교육기관과 불교가 융성하여 승의(僧醫)가 있었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신라문화를 이어 교육기관과 약전(藥典)과 같은 의료기관이 있었으며, 후기에는 의사관제도(醫事官制度)가 실시되어 교수관(敎授官)에 의한 교습이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전기(1392~1567)에는 중앙의약제도가 설정되었으며, 지방의약기관과 의원이 설치되었다. 후기(1568~1800)에는 병란에 의해 국력이 쇠퇴된 시기였으나, 허준 같은 명의가 배출되었으며 그의 저서 〈동의보감 東醫寶鑑〉은 중국·일본에서도 널리 인정하는 명저이다.

동의보감

〈동의보감〉, 목활자본(1613 간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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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이론적 배경은 중국의 〈황제내경〉 등을 참조로 해서 도교적인 철학과 실생활에 맞는 생활의학의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정(精)·기(氣)·신(神)을 중히 여겨 조섭수양(調攝修養)을 우선으로 하고, 치료법으로 약석(藥石)을 사용하는 것을 다음으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17세기부터 서양의학서가 천주교리서와 함께 들어오기 시작하여 실학자들이 어느 정도 연구하기 시작했으나 의학적인 성과는 별로 없었다(→ 한국의학사).

일본

일본의 의학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까지는 중국·한국의 전래되어 내려오던 한의학이 주를 이루었으며, 약간의 서양의학이 서양의 선교사나 선원들을 통해 전해졌다.

서양 의학의 뿌리

그리스 초기 의학

마법에서 과학으로의 변화는 여러 세기에 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해 원인과 이유를 찾도록 한 것은 아스클레피우스 사원의 사제들이 아니라 초기 철학자들이었다.

엠페도클레스의 우주관에 따라 인체는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으로 구성되었다는 4체액설이 대두했다. 이 설에 따르면 건강의 유지는 4가지 체액의 조화에 의존한다.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그의 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히포크라테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을 이루는 여러 권의 책 중에서 몇 권의 저자일 수도 있고 그것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이 붙은 저작들은 서양의학의 한 이정표, 즉 질병을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며 의사들은 질병의 그러한 자연적인 원인을 찾기 시작하게 된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히포크라테스는 자연치유력을 강조했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를 환경과 관련지어 병이 아닌 인간으로 다루었다.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이른바 '히포크라테스 선서'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의료행위에 대한 장전일 것이다.

헬레니즘 의학과 로마 의학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가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면서 헬레니즘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사상 최초로 해부학에 관한 저작을 남긴 것으로 여겨지는 헤로필로스와 생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에라시스트라토스라는 위대한 의학자가 있었다.

기원 후 몇 세기 동안 그리스 의사들은 로마로 이주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갈레노스였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의술을 배워 그 방법을 따랐으며 체액설을 지지했다. 그는 해부학의 의의를 강조했으며, 사실상 맨처음으로 실험생리학을 학문으로 확립했다.

당시에는 인체해부를 법으로 금했으므로, 갈레노스는 동물의 관찰에 자기 지식의 토대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의학이론과 시술법에 대한 로마의 공헌은 그리스에 비해 무시할 정도로 작지만, 공중보건에 관한 로마인들의 태도나 처리는 매우 뛰어났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세계의 의학

번역가와 성자들

초기 기독교는 의학 발전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 종종 거론된다. 이는 병에 걸리는 것이 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 여겨졌고, 그러한 신의 징벌은 기도와 회개에 의해서만 나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후원 아래 병자들에게 베풀어진 간호와 가료는 중세 초기 동안 의학에 대해 가해진 불관용적인 태도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교회가 의학에 대해 한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적인 그리스 의학문헌을 보존하고 번역한 일이다. 이 무렵 기적적인 치료와 관련된 많은 성자들이 등장했다.

아랍 의학

중세시대를 통해 의학을 보존했던 또다른 곳은 이슬람 제국이었다. 초기의 유명한 의사로는 라체스가 있었다. 그보다 조금 후의 인물인 아비케나(980~1037)는 '의사 중의 왕자'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저서 〈의학 정전 al-Qānūn fῑ aṭ-ṭibb〉은 고전이 되었다. 아랍 의학의 가장 큰 기여는 화학과 약물에 대한 지식과 그 제조에 있다.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의학

살레르노와 의학교

아랍 의학이 번창하던 무렵 유럽 최초의 조직적인 의학교가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에 세워졌다(→ 살레르노대학교). 살레르노 의학교는 그당시 가장 훌륭한 의학기관이었으며 중세 의학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중세의 의사들은 증상을 분석하고 분비물을 검사하여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나서 식사·휴식·수면·운동·목욕 등의 처방을 내리거나 구토제 또는 설사약을 주거나 방혈을 했다.

새로운 학문의 전파

14~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의 단순한 부활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의 변화, 전통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의학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우선 인체의 구조에 관련된 해부학과 그 기능에 관한 생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1543년 〈인체의 구조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출판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이 혁명적인 저서에서 그는 갈레노스의 오류를 많이 바로 잡았다. 베살리우스의 작업은 팔로피우스와 파브리키우스 아브 아콰펜덴테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외과는 해부학의 개혁과 발전에 힘입어 많은 발전이 있었다.

앙브루아즈 파레는 16세기의 외과학을 지배했는데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계몽시대 유럽 의학

하비와 실험적 방법

1628년에 하비는 고전적인 저서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을 출판했다. 하비의 저서는 여러 번에 걸친 조심스러운 실험의 결과였다. 하비가 혈액순환을 발견한 것은 의학 발전의 한 이정표였다. 결과를 도출한 새로운 실험방법은 그 결과 자체 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단순한 체계를 찾기 위한 쓸모없는 탐구

17세기에는 환자 진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쉽고 단순한 체계를 발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인체는 기계라는 데카르트의 생각은 의학사상에 커다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물리학자라고 했으며, 생명현상을 화학과정으로 생각한 학파는 의화학자로 자처했다.

18세기의 의학

18세기에도 환자를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존 브라운은 항진성 질환과 무력성 질환인 2가지 병만이 존재한다고 했으며, 치료도 진정요법과 자극요법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 18세기에는 근대적 병리학이 출현했다. G. B. 모르가니는 1761년에 〈해부학 연구에 바탕을 둔 질병의 원인과 발병장소에 관하여 De sedibus et causis morborum〉를 출판했다.

700여 회에 이르는 부검의 예를 토대로 기술한 이 책에서 모르가니는 사후 소견과 생존시의 임상적 특성을 관련지으려고 노력했다. 라엔네크는 간단한 청진기를 고안했으며, 아우엔브루거는 타진법이라는 또다른 흉곽질환 진단법을 개발했다. 18세기말에 이루어진 의학상의 진보 가운데 의미가 큰 것으로는 제너의 종두법이 있다. 이 시대에는 유사과학의 풍미와 더불어 건전한 과학적 사고도 착실한 진전을 보였다. 물리학·화학·생물학의 진보는 임상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토대가 되었다.

19세기 과학적 의학의 발달

생리학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현미경학과 주입술의 새로운 방법으로 인체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알려졌다. 신체의 미세구조까지도 이해되었다. 생리적 과정의 이해는 해부학 지식만큼이나 중요했는데 19세기에 들어 특히 독일에서 빠른 속도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세균설의 확립

19세기 의학의 발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감염성 질환이 매우 작은 생물체들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일이다.

세균학이라는 분야를 확립한 공로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게 가장 먼저 돌려야 할 것이다. 영국의 리스터는 파스퇴르의 발견에서 방부원리를 도출해 외과에 적용했다. 세균학의 또다른 선구자로는 독일의 코흐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세균을 배양·분리하고 검사 방법을 발견했다.

임상의학과 마취에서의 발견

그레이브스와 스토크스가 임상진단과 교육에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미국이 이 시기의 의학에 공헌한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전신마취의 도입이었다. 전신마취는 수술에 따르는 통증으로부터 환자를 해방시켰고, 외과의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수술할 수 있도록 했다.

19세기말의 발전

방부법과 마취술이 외과의 모습을 일신하는 동안 질병 전파에 관한 연구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건강의 유지가 질병의 치료만큼이나 중요한 관심사가 되면서 예방의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과학지식이 엄청나게 증가함에 따라 의술의 모습은 급격히 바뀌었고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의학교육과 의료의 수준을 관장하는 공공기구와 전문직 단체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19세기 한국의 의학

종두법

1796년 영국의 제너가 발견한 종두법은 청나라를 통해 많은 서양학 서적과 함께 유입되었고, 이를 정약용의 저서 〈마과회통 麻科會通〉에서 다루고 있으며, 1835년경에 시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그뒤 1876년 병자수호조약 때 박영선이 일본에서 우두종법을 배워서 제자인 지석영에게 전했고, 지석영이 제생의원과 일본에서 여러 기술을 배워 종두를 실시했다.

한의학

19세기에 들어서 한의학에는 〈동의보감〉을 계승한 여러 서적들이 제작되었는데 사상의설(四象醫說)이 있는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과 이석곡의 〈의감중마 醫鑑重磨〉 등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저서이다.

특히 이제마의 사상의설은 종래 한의학의 음양오행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체질에 중점을 두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서양의학의 전래

서양의학의 직접적인 전래는 1876년 조일수호조약이 성립되면서 일본거류민을 위해 여러 항구도시에 병원을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885년 미국 선교의인 알렌이 건의하여 광혜원(廣惠院:제중원)을 설립했고 여러 선교차원의 병원이 설립되면서 서양의학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내과학

개요

20세기에 들어 수많은 발견과 발전이 있어서 의학의 면모는 이전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다.

의학의 강조점도 인간의 생존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학자들 사이의 대화와 연락이 손쉽게 된 것도 의학이 이 시기에 급격히 발전하게 된 요인이다. 전문화 경향이 강화되었지만 그들 전문가 사이의 협동작업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이 시대의 발전과 성취를 어느 개인이나 소집단의 공으로 돌리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감염성 질환과 화학요법

세균·리케차·원충류·바이러스 등 수많은 병원성 미생물이 발견·분류되었으며 예방접종제와 화학약물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에를리히와 비소제제:에를리히는 여러 병원체에 대해 각종 화학물질의 효과를 실험했다. 그는 살바르산이라는 비소제제의 효과를 시험하여 성공했는데 이것은 감염성 질환의 치료와 관리에 화학요법의 시대를 열었다. ② 술파제제:1932년 게르하르트 도막은 프론토질이라는 붉은색 염료가 연쇄상구균감염증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 설파닐아미드는 곧 더 안전하고 강력한 새로운 술파제제로 대치되었다. ③ 항생제: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라는 곰팡이가 포도당구균에 억제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10년 뒤 하워드 등이 순수한 형태로 페니실린을 분리했다.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

ⓒ Crulina 98/wikipedia | CC BY-SA 3.0

그뒤 대량 생산되고 여러 가지 형질과 균주가 개발되어 다양한 질병에 항생제로 쓰이고 있다.

1944년 왁스먼이 결핵균에 효과가 있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했으며, 파라아미노살리신산(PAS)과 이소니아지드 등을 혼합하여 사용함으로써 결핵치료에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다.

면역학

화학요법의 발달이 극적인 효과를 가져 왔지만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해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바이러스성 질환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면역학의 발달이 큰 역할을 했다(→ 백신). ① 항균면역요법:장티푸스는 1897년 영국의 라이트가 죽은 장티푸스균으로 예방백신을 개발했다. 파상풍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파상풍 항독소가 예방을 목적으로 쓰이면서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1930년대에 효과적인 백신과 톡소이드가 개발되었다. 디프테리아 항독소는 파상풍 항독소와 마찬가지로 1890년 베링과 기타사토가 개발했다.

그뒤 더욱 효과적인 면역제가 개발됨에 따라 디프테리아 면역제는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 되었다.

결핵은 1908년 알베르 칼메트와 카미유 게랭이 독성이 약해진 결핵균을 만들었고, 이 독성이 약해진 결핵균으로부터 BCG 백신이 제조되었다. ②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한 면역요법:천연두를 제외하고는 20세기초까지도 효과적인 바이러스성 질환 백신이 개발되지 못했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바이러스 백신은 1930년대말 맥스 테일러가 개발한 황열병 백신이다. 1945년 인플루엔자에 대한 비교적 효과적인 백신이 만들어졌다. 1954년 솔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으며, 1960년부터는 세이빈이 개발한 경구용 소아마비 백신이 쓰이게 되었다. ③ 면역반응:20세기 후반 전자현미경학의 발달로 세포구조를 더 깊이 파악하게 되었으며, 화학적 방법의 진보로 복잡한 대사기능을 더 면밀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단백질과 효소를 생성하는 과정을 조절하는 유전물질인 DNA의 중요성은 더욱 명백해졌고 생체가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병원체와 손상물질에 대해 항체를 만들어내는 면역능력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내분비학

인슐린:20세기초 여러 내분비샘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분리·동정하고 특성을 밝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은 1921년 밴팅 등이 인슐린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으로 당뇨병 환자들의 운명은 거의 확실한 죽음에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으로 순식간에 변하게 되었다. ② 코르티손:1949년 헨치 등은 강력한 소염작용을 갖는 물질인 코르티손을 부신피질에서 분리했다. ③ 성호르몬:성호르몬에 대한 연구와 지식도 풍부해져서 산아 조절에 관한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응용되었다.

비타민

영양학 분야에서의 가장 괄목할 발전은 '보조 식품인자'인 비타민을 발견한 것과 그것이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비타민에 관한 개념이 확립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비타민이 밝혀졌다. 당시에는 화학적 구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A, B, C 등으로 표기되었다.

악성종양

20세기에 들어 발전이 의학의 표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분야가 악성종양(암)이다.

20세기 후반 대부분의 산업국에서 암은 심장병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사망원인이다. 악성종양의 원인은 아직 잘 모르지만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치료법으로는 아직도 수술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지만 방사선요법과 화학요법의 사용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암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예방의 중요성을 더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열대의학

20세기 전반에 말라리아·황열병·나병이라는 중요한 열대병들을 거의 정복하게 되었다.

말라리아가 실제로 거의 근절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DDT라는 살충제가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역시 모기가 전염시키는 황열병에 대해서도 살충제가 대단한 효과를 나타냈다. 1930년대에 개발된 설파 계통의 약물은 어떤 약물보다 나병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20세기의 외과학

20세기 초엽

오랫동안 감염·통증·쇼크라는 3가지 장애물이 외과의사들을 괴롭혔다.

① 당시의 객관적 상황:감염에 대항하는 방법으로서 무균법은 빠른 속도로 지지를 확보해나갔다. 무균법은 베르크만이 1886년 증기소독법을 개발함으로써 임상에 활용되기 시작했고, 마취법은 세기가 바뀔 무렵부터 서서히 진보했다.

1910년 클로로포름 대신 아산화질소를 에테르와 섞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쇼크가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였다. 20세기초 쇼크의 주된 원인라고 알려졌던 것은 심한 출혈이었으며, 당시 출혈이 생기게 되면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쇼크의 원인, 생리적 영향, 예방과 치료법에 대한 연구의 진척 정도가 외과 발전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했다.

②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발전:20세기의 첫 10년은 이행의 시기였다.

외과의사들은 조직과 출혈을 신중히 다루게 되었다. 외과의 각 분야가 확장됨에 따라 점차 전문화되었다.

③ 복부외과:복부외과는 주로 빌로스 덕분에 초기상태를 넘어서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새로운 복부수술의 많은 부분이 암치료를 위한 것이었지만 충수절제술(맹장수술)은 이미 19세기말에 충수염(맹장염) 치료를 위한 수술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④ 신경외과:영국의 윌리엄 메이스윈과 빅터 A.H. 호슬리는 외과의사도 뇌와 척수의 질병치료에 기여할 바가 많음을 증명했다.

⑤ 방사선과:1895년 콘라트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고, 이어 X선을 통과시키지 않는 물질을 체내에 투입하여 여러 장기와 구조물을 관찰하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전쟁을 통해 외과가 발전했고 외과의사들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민간인의 진료에도 활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은 재활에 관한 것이다. 외과의사들은 그들의 임무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이 기간은 흔히 외과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 시기로 여겨지고 있다.

① 쇼크 문제:쇼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혈액량을 회복시켜야 하는데 우선 혈액 자체가 문제가 되었으므로 혈액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리고 혈액 수혈의 빈도와 양이 늘어남에 따라 혈액은행이 필요하게 되었다. ② 마취와 흉부외과:마취 영역에서의 진보는 외과의사들을 훨씬 더 자유롭게 해주었다. 1933년 랠프 워터스가 전신마취제인 사이클로프로판을 도입했으며, 곧이어 정맥마취법도 개발되었다. 1942년 그리피스와 존슨이 순수하게 정제된 큐라레를 혈관에 주입함으로써 근육을 이완시켰고 이로써 마취사들은 환자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마취 분야의 진보로 덕을 가장 많이 본 분야는 흉부외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군대외과의 원리가 현대전에 재도입됨에 따라 신체 변형, 사지 손실이 훨씬 감소했다.

이것은 주로 군대 내 외과기구를 재조직하여 전상자가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데에 기인했다. 손상의 종류나 부위에 따른 전문화 경향이 심화되었으나 가장 큰 변화는 상처 부위의 감염을 술파제와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① 기술공학 분야에서의 도움:외과의사들은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한 결과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힘을 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생겨났다.

이는 특히 의공학 분야와 신소재 개발 영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외과의 영역은 수술용 현미경이 도입됨에 따라 더욱 더 넓어졌으며, 특히 신경외과수술 등에 여러 가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② 심장외과:심장수술에 대한 의사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의심과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몇몇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실험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심장병은 외과적 문제라기보다는 여전히 내과적인 문제였다. 이 분야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급격히 발전했는데, 처음에는 선천성 장애를 교정하거나 개선하는 데에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뒤 체외순환법이 개발됨에 따라 심장과 혈관에 대한 과감한 수술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③ 장기이식술:외과의 성과는 1967년 C. 버나드가 사람의 심장을 이식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면역억제술의 발전으로 이식분야는 엄청나게 발달하여 이제 신장이식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심장이식에서 발생하는 거부반응도 사이클로스포린이라는 면역억제제가 개발됨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이식).

20세기 한국의 의학

일제강점기 이전

갑오개혁(1894)의 영향으로 의료업무에 대한 직제가 바뀌었는데, 1907년 광제원과 관립의학교를 통합하여 대한의원이 설립되었고 치료부·의육부·위생시험부의 3부로 나뉘었다. 그밖에 교육시설로는 대한의원교육부가 있었으며, 대구와 평양에서는 동인의원에서 의학강습소를 열기도 했다. 사립학교로는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 제중원의학교를 세브란스 의학교로 개칭하고 1909년 정식으로 사립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정부인가를 받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8·15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의료행정이 보건과 방역으로 나뉘었다.

보건사업에는 서양의학에 의한 의사와 한의학을 다루는 의생(醫生)으로 이원적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자라는 의료인력을 위해 한정된 권한의 의료인들을 국가에서 허가했다. 의학교육제도에 의해 의학강습소들이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6년제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되었다. 국치적인 수난기 동안에도 일본·독일·미국 등지로 유학하고 돌아와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실험논문들을 발표했으며, 국제의학의 수준을 능가할 만한 업적은 아니지만 분야별로 세분된 문제에서 독창적 역량을 나타냈다.

8·15해방을 맞이하면서 남한지역은 미군정시기를 거쳐, 1948년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의료행정이 현실에 맞게 독자적으로 정비되어갔다. 미국의 의료행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국가행정기관이 여러 단계를 거쳐 보건사회부로 정착되었다. 국립으로 보건의료원·의료원·정신병원·결핵병원·나병원·해상검역소·공항검역소 등을 설치했고 지방에 시립병원과 보건소를 설치·운영했으며, 세계보건기구(WHO)와 연계하여 의료사업과 가족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 수립 후 서울과 지방에 많은 의과대학과 병원이 신설되기 시작하여 1990년 현재 의과대학 23개교와 한의학 5개교, 400여 개의 병원이 설립되어 있다.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20세기 기초의학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연구성과가 각 분과별로 계속 발표되고 있다. 임상의학이나 고도로 발달한 외과학·정신의학·방사선의학 등에서 많은 성과가 있어서 전반적으로 국제의학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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