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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트

다른 표기 언어 Friedrich Ferdinand, Graf von Be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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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09. 1. 13, 독일 작센 드레스덴
사망 1886. 10. 24, 빈 근처 알텐베르크 성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작센(1858~66)과 오스트리아 제국(1867~71)의 총리·외무장관.
Freiherr von Beust라고도 함(~1868).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성립시키는 '타협안'을 협상했고 합스부르크가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유서 깊은 귀족가문의 작센계 후손인 그는 법률행정의 고위관리인 카를 레오폴트 폰 보이스트의 막내아들로서 드레스덴의 크로이츠슐레에서 수학한 후 괴팅겐과 라이프치히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을 지녔던 그는 자유주의적 입헌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철학·역사·정치학 공부에도 열의를 쏟았다. 1830년 학업을 마치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베를린과 파리 주재 작센 공관에서 일했다. 그후 뮌헨과 런던 주재 공관장이 되었으며 1848년에는 베를린 주재 공관장에 임명되었다. 이당시 헌정문제에 관해 상당한 실무지식을 익혔으며 당대 중요한 정객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있었다.

작센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는 1848년의 혁명에서 발전한 독일 통일운동을 지지했으나 이 운동의 민주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1849년 아우구스투스 2세는 보이스트가 상황을 안정시킬 만한 유력자라고 생각해 그를 새로운 외무장관으로 기용했다. 보이스트는 프로이센 군대를 불러들여 5월에 드레스덴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를 진압한 후 작센과 프로이센 및 하노버 사이의 보수동맹체결을 교섭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장관으로서의 첫출발부터 내각에서 탁월한 역량의 소유자임을 입증했다.

1853년부터 내무장관직에 있으면서 온건한 내정개혁정책을 통해 작센의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대외정책에서는 독일의 작은 나라들을 결집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제3세력으로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작센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심은 당연히 프로이센 쪽으로 기울어졌으나, 보이스트의 외교정책은 점차로 오스트리아에 더 가까워졌고 이에 따라 그는 비스마르크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1866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세력인 작센에 승리를 거두자 보이스트는 비스마르크의 압력에 직면해 사임해야 했다.

작센에서 '유모차를 끄는 말[馬]'과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던 보이스트는 뜻밖에도 보다 넓은 활동무대를 찾아냈다. 1866년 10월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에 임명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오스트리아 총리에 임명했다(1867년 6월에는 각료의장이 되었음).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여느 때처럼 낙천적으로 이 어려운 직책을 선뜻 받아들였다.

외교경험과 정치적 상상력, 어느 정도 냉소적인 사고방식은 새로운 업무를 빨리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입헌정부를 회복하고 제국 동부지역에 대한 헝가리인들의 주도권을 인정하여 헝가리와 타협함으로써 가장 어려웠던 국내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했다(대타협).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범적인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일 대중의 동조를 다시 획득하려는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제국의 서부지역에서 지배집단인 독일인들의 지위와 합스부르크 통치하의 체크인들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의 요구사항을 조화시키지 못했다(7주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크 왕가).

그의 대외정책은 그가 과소평가한 민족적 열망에 의해 마침내 좌절되고 말았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나 보이스트가 1866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무찌른 데 따른 결과, 즉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독일 연방에서 분리시키는 조치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보이스트는 복수심과 비스마르크와의 적대적인 관계, 그리고 프로이센이 독일 연방 내의 합스부르크 영토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우선 독일 연방의 남부 국가들이 프로이센과 통합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가 과거의 패권을 좀더 개선된 형태로나마 재확립하는 데 필요한 상황을 조성하고자 했다.

프로이센을 동쪽 구석으로 몰아넣기 위해 프랑스·이탈리아와 동맹을 추진하면서 그는 비스마르크의 맞수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량과 명민함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보다 월등한 인물임을 입증했다. 그의 정책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새로운 전쟁의 위기로 몰고 갔지만 그는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거리를 두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들을 궁극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1871년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Reich)이 이미 역사적인 실체가 된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1868년 그를 백작으로 격상시켰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871년 10월 그를 총리직에서 해임했다. 그는 런던 주재 대사로 계속 오스트리아를 위해 일했고 1878년 이후로는 파리 주재 대사로 있다가 1882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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