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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다른 표기 언어 Franz Joseph 동의어 프란티셰크 요세프 1세, František Josef I., 페렌츠 요제프 1세, I. Ferenc József, 프라뇨 요시프 1세, Franjo Josip I., 프랜시스 조셉 I, Francis Joseph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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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0. 8. 18, 빈 근처 쇤브룬 성
사망 1916. 11. 21, 쇤브룬 성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하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하는 이중 왕국을 만들었다. 1879년에 프로이센이 이끄는 독일과 동맹을 맺었고, 1914년에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군인으로 성장했고 평생 동안 군복을 입었다. 통치 초기에는 정확하고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 태도 때문에 존경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많은 결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민족 국가의 무너져가는 체계를 통합한 인물로서 널리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848~49년에 존립의 위협을 극복한 뒤, 프란츠 요제프가 제위에 앉아 있었던 68년 동안 수많은 부침을 거듭하면서 큰 변화를 이루었다.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 Koller Tanár Utódai/wikipedia | Public Domain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하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하는 이중 왕국을 만들었다.

1879년에 프로이센이 이끄는 독일과 동맹을 맺었고, 1914년에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군인으로 성장했고 평생 동안 군복을 입었지만, 결코 정치가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략가도 아니었다. 그는 서류를 주의깊게 검토하고, 비상한 기억력과 인품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이 결점을 벌충했다. 또한 항상 특사들에게 보고를 잘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무원들에게는 매사에 꼼꼼하고 자신의 의무에 헌신적이며 공정한 사람으로서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모범이 되었다.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유럽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효율적인 민간행정체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 및 군사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직접 통제했기 때문에, 이 대외정책은 그 자신이 세운 정책이며 거기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고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는 각료들에게 성실했지만, 그들 각자에게 직무의 한계를 명시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영향력은 주지 않았다.

일단 해임된 각료에게는 더 이상 공무에 대한 자문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불쾌하고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이것은 그의 성격이 워낙 꼼꼼한 탓이었다. 그는 너무 꼼꼼하고 치밀해서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 때문에 진정한 우정을 맺지도 못했다. 통치 초기에는 정확하고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 태도 때문에 존경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많은 결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민족 국가의 무너져가는 체계를 통합한 인물로서 널리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더없이 매력적인 신사였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우두머리로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는 주로 왕조의 이익을 고려하여 가족에 대한 태도를 결정했다. 그의 결혼은 사랑의 결합이었고, 아내의 괴팍함 때문에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은 뒤에도 아내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바쳤다. 1898년 9월 10일에 아내가 제네바에서 암살되자, 그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의 추정 상속자인 외아들 루돌프 대공이 1889년 1월 30일 마이얼링에서 17세의 남작부인과 함께 권총동반자살한 비극은 루돌프의 불안정한 성격 탓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루돌프의 성격을 불안정하게 만든 사람은 황제 자신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부적절한 교육을 시켰고, 벨기에의 슈테파니 공주와 강제로 결혼시켰으며, 냉정하고 몰이해한 태도로 아들을 대했다. 그리고 며느리가 신분이 낮은 남자와 재혼하자 이를 용서하지 않고 가혹하게 대했다. 황제의 가족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범죄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루돌프에 이어 추정 상속인이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낮은 신분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결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에 대공 부처가 사라예보에서 피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가 한 말은 그들의 죽음을 신의 천벌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널리 알려진 이런 비극들을 더욱 뒷받침한 것은 이따금 격렬하게 타오르면서 끝없이 계속된 일련의 집안 싸움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로렌 왕가 사람들에게 대공의 품위와 자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순순히 따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점점 고독해진 프란츠 요제프는 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상냥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으며, 그의 소망에 충실한 왕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직계 가족은 막내 동생인 루트비히 빅토르뿐이었다.

재능 있고 야심만만한 동생 막시밀리안 대공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온당할 따름이었으며, 막시밀리안이 잠깐 멕시코 황제 자리에 앉았다가 혁명군에게 총살당한 비극은 결코 그의 책임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1848~49년에 존립의 위협을 극복한 뒤, 프란츠 요제프가 제위에 앉아 있었던 68년 동안 수많은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랜 변태기를 거쳤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은 그의 훌륭한 업적과 균형을 이루었다. 총리인 타페 백작 에두아르트가 1880년대의 사회 입법, 1852년에 제정한 새 형법, 1859년의 통상 규제, 1862년의 상법 등은 모두 유럽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민간행정의 본보기다.

이런 업적은 말 없이 자신의 임무에 헌신한 황제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초기생애

프란츠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과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인 조피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백부인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프란츠 요제프는 그의 추정 상속자로서 교육을 받았다. 1848년 봄에 이탈리아에서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지원을 받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했다.

혁명이 오스트리아의 대도시로 퍼지고 페르디난트 황제가 퇴위한 뒤 1848년 12월 2일에 올뮈츠(올로모우츠)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의 제위계승권은 무시되었다. 눈부실 만큼 밝고 젊은 그의 외모는 군주제 지지 감정이 되살아나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측근들 가운데 그에게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아마 늙은 재상 메테르니히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그는 1854년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과 결혼한 뒤, 파란만장한 결혼생활 동안 내내 아내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다.

중기생애

신절대주의 시절(1841~59)

즉위한 뒤 10년 동안 이른바 신절대주의 시대에 황제는 슈바르첸베르크 후작 펠릭스(~1852), 툰 백작 레오, 바흐 남작 알렉산더 같은 뛰어난 조언자들의 도움을 얻어 외교정책을 체계화하고 당시의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과업을 관장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친정 체제를 발족시켰다.

그는 1848년에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된 슈바르첸베르크와 함께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대외관계에서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를 강력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특히 1850년 11월의 올뮈츠 협약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 가장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국내 문제에서는 슈바르첸베르크의 가혹한 억압 통치와 너그럽지 못한 경찰 기구의 편성이 봉기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부가 1849년에 혁명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약속했던 헌법 제정을 1851년에 철회하자 봉기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 약속 철회는 오랜 후유증을 남겼고, 자유주의자들은 프란츠 요제프의 통치를 영원히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1853년 빈에서는 황제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밀라노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슈바르첸베르크가 죽은 뒤(1852) 프란츠 요제프는 후임 총리를 임명하지 않고 친히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크림 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취한 잘못된 정책은 주로 황제 탓이었다. 그는 1849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도와준 러시아에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 아니면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어 이익을 얻을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갈리시아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일부를 러시아 국경에 배치한 것은 중대한 잘못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런 조치로도 서구 열강의 호의를 전혀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일찍이 개인적으로 품고 있던 상당한 호의마저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내에서는 신절대주의 덕분에 황제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유능한 전문가들이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1859~60년에 황제의 복잡한 재정문제를 처리하는 동안 이들의 한계는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났다.

1859년에는 군사비 지출을 줄여야 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일련의 불운한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명성을 크게 손상시켰다. 더욱이 경찰력을 이용한 강권 통치를 오래 끌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재정문제와 국내문제를 고려하여 중요한 군사적 결정을 내렸다. 이런 결정, 특히 1859년에 사르데냐 왕국 및 프랑스 제국과 벌인 전쟁의 불운한 결과는 대부분 황제의 책임이었다(오스트리아-프랑스 피에몬테전). 사르데냐 총리인 카보우르 백작은 오스트리아를 자극해 전쟁으로 끌어들인 뒤, 프랑스군을 이용해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총사령관이 무능함을 드러내자 그가 직접 최고사령관이 되었지만, 솔페리노의 패배(1859. 6)를 막을 수는 없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편으로 전쟁에 개입하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군 지휘권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 경악한 그는 1859년 7월에 서둘러 빌라프란카 강화조약을 맺고, 이 조약에 따라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에 양도해야 했다(빌라프란카 회담). 그러나 이 결정에 불복하고 결국 이탈리아 및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이어진 대외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이런 대외정책을 통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이전의 지위, 즉 메테르니히가 1814~15년에 확립한 것과 같은 지위를 되찾기를 기대했다.

결단의 시절(1859~70)

1859년 패배 이후의 긴박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프란츠 요제프는 다시 헌법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실험기, 즉 연방제와 중앙집권제 사이를 오락가락한 시기가 끝난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는 항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1863년에 프로이센 왕을 제외한 독일 연방의 모든 군주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가 프란츠 요제프의 생애 최고의 시기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의 불참은 프로이센이 더이상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최고 강대국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1864년 프로이센과 덴마크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편들어 개입함으로써 독일에서 누가 우위에 서느냐는 결정을 미루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하찮은 말싸움이 일어나 이번에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이탈리아와 프로이센이 동맹국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양쪽의 외교문제를 동시에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가능성을 안게 되어 적어도 이탈리아와는 무력 충돌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1866년 6월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협정을 맺었는데, 이런 협정은 아마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임박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는 베네치아를 사르데냐 왕국에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싸우지도 않고 영토를 양보하는 것은 군대의 명예와 관련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말년에 프란츠 요제프는 한편으로는 영토를 양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토를 얻으려고 싸운 자신의 정책을 정직하지만 어리석었다고 평가한 반면, 총리인 보이스트 백작은 이 협정만큼 충격적인 문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프로이센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전쟁에 끌어들여 승리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 지고도 북부에서는 한 뼘의 영토도 잃지 않았지만, 이 패배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 결정적으로 배제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남부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협정에 따라 베네치아를 내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1867년에 작센 총리인 보이스트 백작을 오스트리아 총리로 임명한 것도 처음에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이스트가 추진한 계획, 즉 프로이센에 대항해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는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1870년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재빠른 군사적 승리와 헝가리 총리인 기울로 온두라시 백작의 태도 때문에 프랑스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하지 못했다.

1871년에 보이스트가 해임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무장관에 임명된 온두라시는 독일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는 외교정책을 채택했고, 이 정책은 나중에 프란츠 요제프의 외교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대타협과 이중왕국

제국 안의 모든 민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방제 해결책을 찾는 데 실패하자, 민족들 사이의 관계가 나빠졌다.

1867년에는 다루기 힘든 헝가리인들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신임인 보이스트 총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각지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나온 타협안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하는 '황제와 왕의 이원 군주국'(kaiserliche und königliche Doppelmonarchie)이었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헝가리인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손해를 본 것은 슬라브인들이었다.

보헤미아인(체크인)과 폴란드인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서부 제국에서 게르만계 오스트리아인이 누리는 특권적 지위를 나누어 갖지 못했고,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바키아인 및 남슬라브족은 헝가리가 지배하는 동부 제국에서 헝가리인이 누리는 특권을 전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제프도 이것이 편파적인 대우임을 인정했다. 이로써 다민족 국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모든 민족 집단이 기본적 평등을 누린다는 내적 원칙을 위반했다. 제국을 이루고 있는 각 주는 제각기 오랜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 황제와 관계를 맺었고, 각각의 관계는 평등했지만, 이제는 제국의 게르만계 오스트리아인이나 헝가리인 대군주에게 복종하는 종속 관계로 바뀌었다.

따라서 내부의 불안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슬라브어에 대해 헝가리어나 독일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려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오스트리아 민족주의자들의 압력 때문에 이 개혁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정당 정치인을 대체로 싫어하고 그들이 공공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했던 황제는 이제 빈의 사회학자 알베르트 셰플레의 영향을 받아, 제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민주화 과정에 어느 정도 공감을 갖고 따랐던 것 같다.

체크인들의 옛 권리를 인정·회복하는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정책 추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고, 국내정치에도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보다 더 큰 장애물은 남슬라브족의 문제였다. 1867년부터 헝가리의 지배를 받은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의 주요민족인 마자르족이 추진하는 마자르화 과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헝가리의 지배는 결국 슬라브족이 살고 있는 세르비아를 이중 군주국의 철천지 원수로 바꾸어 놓았다.

'대타협'(Ausgleich)을 이중왕국의 헌법으로 전폭 지지한 프란츠 요제프는 이 복잡한 문서의 부정적인 측면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주로 대외정책과 군사지휘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국내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국내문제와 그 문제가 러시아의 관계 및 발칸 반도의 정치적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지 못했다.

슈바르첸베르크(Felix, Fürst zu Schwarzenberg)

ⓒ Chrihalb/wikipedia | Public Domain

후기 평화정책

프란츠 요제프는 항상 외교정책을 자신의 장기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외무장관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기울로 온두라시 백작, 구스타프 칼노키 폰 쾨뢰슈포토크 백작,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 백작의 조언을 받았다. 온두라시는 1879년에 독일 제국과 동맹을 맺었을 뿐 아니라, 프란츠 요제프가 주창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에 관해 베를린 회의(1878)의 승인을 얻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대외정책이 발칸 반도에서 처음으로 거둔 대성공이었다. 황제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과 동맹을 맺는 것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이탈리아는 1882년에 삼국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 및 독일과 손을 잡았고, 루마니아는 1883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실제로 그의 신중한 태도가 요인이 되어 결국 동맹국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프란츠 요제프의 대외정책은 다른 나라의 군주와 직접 접촉하여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1873년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와 나란히 베를린에 나타남으로써 삼제동맹 결성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듯이, 나중에도 그는 양국간 적대관계의 근본적 성격을 인식하지 못하고 러시아 황제와 직접 접촉함으로써 양국의 잠재적 충돌을 막으려고 애썼다.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 때와 1903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방문을 받은 뒤에도 그는 발칸 반도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갖고 있는 이해관계의 한계를 정하려고 애썼다.

황제의 이런 정책은 외무장관 에롄탈이 1908년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함에 따라 크게 위협받았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군주들 사이의 친분관계로 외교문제를 결정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나 있었다. 이해관계의 충돌 또는 범슬라브주의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군주 차원에서 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대부분 친척이며 자기보다 젊은 동료 군주들과 사이좋게 지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활기차고 낙천적이며 의연한 태도를 높이 평가한 것 같다.

1908~14년에 프란츠 요제프는 총참모장인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프란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평화정책을 고수했다. 회첸도르프 백작은 세르비아나 이탈리아에 대해 예방전쟁을 감행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는 그 결과를 충분히 생각지도 않고 외무장관인 레오폴트 베르히톨트의 설득에 넘어가, 1914년 7월에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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