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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4세(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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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4. 8. 22(구력 8. 10), 몰다비아 마라셰슈티
사망 1901. 2. 11(구력 1. 29), 빈
국적 세르비아

요약 세르비아의 대공(1868~82)·왕(1882~89).
정식 이름은 Milan Obrenović.

1868년 7월 2일 사촌 미하일 3세 대공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으나 통치 초기에는 섭정단의 통제를 받았다. 1869년 섭정단은 겉으로는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채택하고 오스트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밀란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1872년 8월 밀란은 직접 정부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나 무절제한 방종으로 더욱 평판이 나빠졌다. 더욱이 그는 1875년에 결혼한 러시아 태생의 첫번째 부인 나탈리예 페트로브나 케슈코에게 성실하지 못했고, 1875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반란 지원을 거부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의 범슬라브주의적 감정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완전히 신망을 잃었다. 그는 혁명의 위협을 느끼고서야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다(1876. 6. 30). 세르비아인들은 곧 패했지만 이어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78)에서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자 구제받을 수 있었다. 결국 세르비아는 베를린 조약으로 영토확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1878)(→ 오스트리아-헝가리, 세르비아-투르크 전쟁, 베를린 회의).

밀란이 평화협정에 파견한 대표들은 그와 같은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오스트리아에게 의존해야 했고, 그 대가로 세르비아의 철도와 경제를 오스트리아와 연결하자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세르비아 정치인들은 오스트리아보다는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길 바라고 있었으나 친오스트리아 정책을 추진한 밀란은 친오스트리아 장관을 기용했고, 세르비아 경제를 오스트리아 경제에 종속시키는 무역 및 관세 협정을 체결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승인 없이는 다른 나라들과 어떤 조약도 체결하지 않겠다는 비밀협정을 맺었다. 이어 오스트리아는 1882년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하고 세르비아 공국을 왕국으로 선언한 밀란을 지지했다.

1883년 밀란은 동부 세르비아에서 급진파들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885년에 불가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밀란이 크게 패하자 오스트리아는 외교적인 지원을 해 전전 상태에 근거한 평화협정을 맺도록 주선했다. 계속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의존하게 되자 국내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고, 1889년 1월 그는 좀더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허락함으로써 이러한 불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3월 아들 알렉산다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만 했다.

1888년 10월 나탈리예와 이혼했고 1892년 세르비아 국적을 버리고 타코보 백작으로 파리에 정착했다. 1897년 세르비아로 돌아온 그는 아들 밑에서 최고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대 개혁을 단행했으나 여전히 평판은 좋지 않았다. 알렉산다르가 자신과 중요 장관들의 충고를 저버린 결혼을 하자 밀란은 영원한 유랑길에 올랐다(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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