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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87. 9. 16(?), 잉글랜드 웨일스 몬머스셔 몬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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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22. 8. 31, 프랑스 부아드뱅센 |
국적 | 잉글랜드, 영국 |
요약 헨리는 매정하고 오만했으며, 반대를 참지 못했다. 정책을 추진할 때는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헌신을 끌어내는 재능이 있었으며, 지도자의 자질도 갖고 있었다. 헨리 4세의 맏아들이다. 1413년 3월 2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1415년 프랑스와 싸운 백년전쟁의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 잉글랜드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헨리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1419년 1월 프랑스 북부의 주요 도시인 루앙이 그에게 항복했고, 1419년 9월 부르고뉴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인들은 1420년 5월 21일 트루아 조약에 동의, 헨리는 프랑스 왕위계승자 겸 프랑스 섭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믈룅과 모를 포위 공격할 때 건강을 해친 탓에 1422년 뱅센 성에서 발진티푸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초기생애
헨리는 더비 백작 헨리(뒤의 헨리 4세)와 메리 드 보헌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398년 아버지가 망명하자, 리처드 2세는 어린 헨리를 맡아서 잘 보살펴주었고, 1399년에는 그에게 기사작위를 주었다. 헨리의 삼촌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그의 훈육을 책임진 듯한데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훌륭히 교육받았다. 자라면서 음악과 독서를 좋아하게 되었고, 영어로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뒤, 1399년 10월 15일에 헨리는 체스터 백작, 콘월 공작 겸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직후에 아키텐과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 1400년 10월부터 웨일스의 행정은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1403년에는 웨일스 반란자들을 진압하는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1408년까지 정력의 대부분을 이 싸움에 쏟아넣었다. 그후 병든 아버지와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머스 애런들에 반대하여 정부에서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추밀원에서도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왕자의 무모하고 방종한 젊은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왕이 된 뒤에는 갑자기 돌변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죽은 지 20년도 채 지나기 전에 씌어졌기 때문에,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거나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의 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가 전쟁과 추밀원에서 보인 태도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들이 묘사한 것과 대체로 모순된다.
그들은 아마 정력을 발산할 수 있는 건설적인 배출구를 충분히 찾지 못한 젊은이의 자연스러운 혈기를 묘사한 데 불과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그가 재판장인 윌리엄 개스코인 경과 다툰 이야기지만, 1531년에 처음 나타난 이 사건은 튜더 시대에 꾸며낸 이야기이다.
헨리는 1413년 3월 21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통치 초기의 그의 지위는 실패로 끝난 롤라드파의 봉기(1414. 1)에 이어, 케임브리지 백작인 요크의 리처드와 매셤의 스크로프 경 헨리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꾸민 음모(1415. 7)로 위협을 받았다. 그때마다 헨리는 미리 경고를 받았고 반대자들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건도 그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지 못했다. 주요관심사는 프랑스에 대한 야심적인 정책이었다.
그는 칼레 조약(1360)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할양한 아키텐과 그밖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찍이 앙주 왕가의 재산이었던 노르망디와 투렌 및 멘의 소유권을 요구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번도 잉글랜드가 가져보지 않은 프랑스 지역까지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가 발광한 샤를 6세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해도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헨리는 자신의 요구가 정당하며, 공격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냉소적인 구실만은 아니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러나 '정의의 수단'이 실패하면, 그는 '폭력적인 수단'에 호소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리처드 2세 시대에 시작된 샤를과 잉글랜드의 협상은 1415년 6월에 마침내 결렬되었지만, 전쟁 준비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헨리 5세의 진정한 천재성은 프랑스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 계획과 그 실행에 드러나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부르고뉴 공작 장의 지지나, 그의 중립을 확보하기 위해 노련한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 프랑스에 해상 지원이 제공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의 노력은 그가 중세의 왕으로는 이례적으로 해군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센 전투(1416. 8)가 끝난 뒤 영국 해협을 장악한 잉글랜드 해군은 심각한 저항을 받은 적이 없었다.
국내에서 헨리는 대규모 기채(起債)와 의회가 의결한 과세를 통해 그가 계획한 프랑스 침략자금을 체계적으로 조달했다. 의회가 과세를 너그럽게 인정해 준 것은 그가 전쟁에 대한 국민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헨리는 유력 인사들의 진심어린 지지와 통일 국가의 지원을 얻어 싸움을 시작했다. 그의 군사적 전략도 그에 못지않게 노련했다. 이 전략은 14세기에 잉글랜드가 프랑스에서 펼친 치밀하지 못하고 즉흥적인 전략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그의 주요목적은 프랑스 북부의 대도시와 요새들을 조직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서, 전투에서 이기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이런 대도시와 요새들을 정복하면 잉글랜드 상설 수비대의 본부로 유지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점차 주변의 시골 지방을 정복할 계획이었다. 행정관과 세금 징수관이 병사들을 뒤따라 점령지에 들어가 전쟁 비용을 자체 조달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장래에 대비한 깊은 통찰력과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었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헨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계획은 7년 동안 그의 정력을 고갈시켜, 그를 일찍 무덤으로 데려갔다.
그는 첫번째 원정에서 하르프뢰르를 점령하고(1415. 9), 아쟁쿠르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415. 10. 25). 이 쟁쟁한 승리로 헨리는 유럽의 외교적 중재자가 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의 예방을 받고 캔터베리에서 동맹조약을 맺었으며(1416), 지기스문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프랑스와 해군동맹을 맺은 제노바를 그 동맹에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두 통치자는 서로 협력하여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1417) 교황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직접 이바지했다.
이것은 헨리가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목표였다(서방교회 분열). 그후 그는 길고 무자비한 포위전으로 돌아가, 노르망디를 조금씩 정복했다. 프랑스 북부의 주요 도시인 루앙은 1419년 1월에 항복했고, 1419년 9월에 부르고뉴 공작 장이 살해되자 부르고뉴는 헨리와 동맹을 맺었다.
이처럼 헨리가 성공을 거두자, 프랑스인들은 1420년 5월 21일 결국 트루아 조약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프랑스 왕위계승자 겸 프랑스 섭정으로 인정받았고, 샤를의 딸 카트린(캐서린)과 6월 2일에 결혼했다. 그는 이제 권력의 절정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믈룅과 모를 포위공격할 때 건강을 해친 그는 1422년 뱅센 성에서 발진티푸스로 죽었다.
성품과 능력
헨리의 성품은 결코 전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매정하고 오만한 그는 반대를 참지 못했고, 정책을 추진할 때는 무자비하고 잔인할 수 있었다. 그는 기사도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중세의 영웅'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은 정의에 대한 그의 애착을 칭송했고, 당시의 프랑스 작가들조차 그를 용감하고 신실하며 꼿꼿한 인간, 훌륭한 투사, 비열함과 천박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비록 인간적인 따뜻함은 부족했지만 남의 헌신을 끌어내는 재능이 있었으며, 지도자의 자질도 갖고 있었다.
경건한 신앙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임종할 때 그가 밝힌 마지막 소원은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다음 십자군 원정에 참가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능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잉글랜드의 왕들 가운데 높은 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했다.
"그는 방향 없이 표류하던 허약한 나라를 맡아서, 9년 뒤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놓고 떠났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의 치세의 비극은 그 뛰어난 재능을 국내의 건설적인 개혁에 발휘하지 않고, 전망이 불확실한 해외 전쟁에 쏟았다는 점이다.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잉글랜드가 해외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잉글랜드는 그후 오랫동안 그의 후계자인 헨리 6세의 견디기 어려운 통치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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