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66. 2. 25, 이탈리아 페스카세롤리 |
---|---|
사망 | 1952. 11. 20, 나폴리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도덕과 용기로 독재정권에 도전하고, 패전으로 타락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현대 이탈리아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이탈리아 중심부의 아브루치 지역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크로체 생애의 첫 시기(~1900경)는 고통의 시기였다. 그를 구제해준 것은 일이었다. 그는 엄격한 자기훈련을 거쳐 역사학의 위대한 독학생이 되었다. 불안상태에서 벗어나 문화 비평지 〈크리티카〉를 창간하고 그의 모든 저술을 발표했다. 크로체에 따르면 "〈크리티카〉의 창간은 내 인생에서 나 자신과 현실 사이의 조화 또는 성숙의 시기로서 새로운 시기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서를 쓰면서 파시즘에 대항했다.
개요
도덕과 용기로 독재정권에 도전하고, 패전으로 타락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현대 이탈리아의 정신적 지주였다.
초기생애
이탈리아 중심부의 아브루치 지역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나폴리에 거주했고 그는 종교적·군주제적·보수적 배경에서 성장했다. 거의 전생애를 나폴리에서 보냈으며 점차 나폴리에 깊이 동화하여 그곳 삶의 예리한 관찰자이자 그곳 영웅들의 전기작가가 되었다. 아주 겸손하게 기록된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인생은 대략 4시기로 구분된다. 각각의 시기는 그 자신의 지적·도덕적 성장과 이탈리아 민족의 도덕적 특성과 운명에 대한 점진적이고 깊이 있는 동화라는 2가지 주제로 전개된다.
크로체 생애의 첫 시기(~1900경)는 고통의 시기였다.
1883년 카사미촐라의 지진으로 동생 알폰소와 함께 고아가 된 후 그의 삶은 그의 말대로 '악몽'이었다. 유년기와 소년기의 안정된 세계는 산산조각났으며 이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후 그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는 늘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구제해준 것은 일이었다.
대학에 환멸을 느낀 그는 엄격한 자기훈련을 거쳐 역사학의 위대한 독학생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가 써낸 글들은 기민하고 재치 있으며 매력적이었다. 비록 시야가 제한되어 있지만 매우 진지한 문체로 씌어 있으며, 비록 자신이 선호한 서정성은 보이지 않지만 재치, 아이러니, 격렬한 논쟁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겉보기에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실제로는 기본적인 정치관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리소르지멘토(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를 추종하는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껴 윤리적·민주주의적·자유주의적 정부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손을 댔으나' 철저한 검토와 모진 비판을 한 후 이 사상을 모두 버렸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기를 바랐으나 그럴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이 무의미한 지식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크리티카 La Critica〉 창간
불안상태에서 벗어나 문화 비평지 〈크리티카〉를 창간하면서 그의 2번째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41년 동안 그는 〈크리티카〉에 자신의 거의 모든 저술을 발표했고 당시 유럽에서 출간된 중요한 역사·철학·문학 작품 대부분에 대한 비평을 썼다. 동시에 자신의 주요한 지적 성과물인 '정신철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서로 다르지만 연관되어 있는 그의 2가지 사상적 측면을 나타낸다. 첫째, 고전 낭만주의 철학의 합리론과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철학체계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원리는 철학체계의 구조와 역사 시간 안에서 정신이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 체계 안에서 정신의 단계 또는 계기는 이론적이면서 실제적인 것으로, 각각 미학적·논리적·경제적·윤리적 계기로 구분된다. 순환하는 힘은 더 작은 계기와 더 큰 계기 사이에서 운동한다. 이러한 순환법칙은 절대적 내재의 법칙이다. 이 체계에 관해 서술한 저서로는 〈표현학과 일반언어학으로서 미학 Estetica come scienza dell'espressione e linguistica generale〉(1902)·〈개념학으로서 논리학 Logica come scienza del concetto puro〉(1909)·〈실제적 철학 : 경제학과 윤리학 Filosofia della practica. Economia ed etica〉(1909)·〈역사학의 이론과 역사 Teoria e storia della storiografia〉(1917) 등이 있다.
둘째, 크로체는 주로 역사학의 방법론 문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도식론(정신의 순환)을 분명히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점차 단념했다. 정신의 계기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행위와 사고의 흐름 속에서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역사는 정신의 모든 계기에 대한 유일한 조정원리가 되는 반면 정신, 즉 인간의 의식은 미리 결정된 구조 없이 완전히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는 〈자유에 관한 이야기로서 역사 La storia come pensiero e come azione〉(1938)의 출판이었다. 이 시기에 대해 몇몇 학자는 역사적 실증주의라는 용어를 갖다 붙였지만 크로체 자신은 이를 절대적 역사주의로 불렀고 그의 사상의 결정적인 형태로 규정했다. 비체계적 형태의 정신철학은 시선집 〈철학·시·역사 Filosofia, poesia, storia〉(1951)에서처럼 크로체 후기작품의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크로체에 따르면 "〈크리티카〉의 창간은 내 인생에서 나 자신과 현실 사이의 조화 또는 성숙의 시기로서 새로운 시기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이 찾고 있던 더 큰 활동무대를 발견했다. 그는 또한 "〈크리티카〉는 내가 이탈리아 문화에 기여한 최고의 직접적 봉사였다. 나는 학생의 역할과 시민의 역할을 결합하여 넓은 의미의 정치에 참여했다"라고 말했다. 〈크리티카〉를 통해 크로체는 현대 이탈리아의 스승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통일 이탈리아의 조직편성을 주관한 총리 카밀로 벤소 디 카부르 백작은 "이탈리아를 만들었으니 이제 우리는 이탈리아인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크리티카〉가 이 과제를 떠맡았다.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이미지는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창조적인 노력, 심원한 시민의 의무와 결합된 자유에 대한 열정, 모든 수사적이고 감상적인 낭만주의를 배제하는 삶의 양식, 공적·사적 진리의 명료한 기준, 미래에 대한 책임과 결합된 역사의식, 끊임없는 건설적인 자기비판 등이 새 이탈리아인이 갖추어야 할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는 크로체가 혼자서 점차적으로 만들어간 개인적 이상을 강하게 반영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 이상을 시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시즘에 대한 투쟁
그 시험은 민족 또는 인종을 삶과 역사의 중심 사항으로 파악하고 개인과 그 권리를 무시하는 정치관인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너무나 점진적으로 준비되었기 때문에 크로체 자신도 그것을 눈치챌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파시즘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고삐가 풀린 좌익 경향에 대한 우익세력의 권리운동으로 보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파시즘 체제의 성격이 드러났을 때 그의 반대는 굳어졌고 타협을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저항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안팎에서 반(反)파시즘의 상징이자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크로체는 파시즘을 또다른 형태의 정치 폭압일 뿐만 아니라, 이기주의가 공공도덕을 대신하고 수사술이 시와 진리를 쫓아버리며 거짓된 동작이 참된 행위를 대신하는 변질된 이탈리아의 출현으로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결과 19세기 유럽의 역사, 1871~1915년의 이탈리아 역사, 나폴리 왕국 역사의 3가지 역사서를 편찬했다. 이 역사서들의 성격은 틀림없이 교훈적이었다. 말하자면 이들 속에서 크로체는 이탈리아의 역사경로가 어떻게 '잃어버린 길'(la via smarrita)이 되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이 교훈은 유럽과 전체 서구세계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패전에 뒤따른 충돌과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이탈리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지닌 목소리가 절대로 필요했다. 크로체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만장일치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이탈리아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는 내적 정신자산을 상기하라고 권위있게 호소했다. 이탈리아의 재건을 위한 크로체의 계획(왕조의 교체를 수반하는 군주제의 유지, 부활된 자유당의 통치원리로의 복귀)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민주적인 형태의 새로운 이탈리아 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공적 책무를 완수한 후 크로체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연구로 돌아갔다.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서고 중 하나인 자신의 도서관에 '이탈리아 역사연구소'라는 연구 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삶은 과거처럼 평화롭고 부지런히 일하는 리듬을 되찾았다. 건강상태를 질문받고 그는 참으로 담담하고 침착하게 "나는 연구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연구하면서 죽어간 것이 그의 마지막 나날이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음악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