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부르크하르트

다른 표기 언어 Jacob (Christopher) Burckhardt 동의어 야코프 크리스토프 부르크하르트, Jacob Christoph Burckhardt
요약 테이블
출생 1818. 5. 25, 스위스 바젤
사망 1897. 8. 8, 바젤
국적 스위스

요약 부르크하르트는 예술사와 문화사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 중의 하나로, 그의 저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은 문화사 연구방법의 귀감이 되었다. 스위스 바젤과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며 문학과 미술도 함께 공부했다. 베를린 대학교 재학 시에 독일의 저명한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를 비롯한 프란츠 쿠글러, 아우구스트 뵈크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시절부터 예술과 건축에 매력을 느꼈던 그는 화가와 조각가의 업적에 자극받아 이탈리아와 르네상스로 관심을 돌렸을 뿐 아니라 법률·정치·외교 분야를 다소 하위에 두었다. 이런 그의 문화사 및 예술사가로서의 관점은 정통의 독일 역사학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주목을 받은 최초의 저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고대문명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입증했다. 그리스 문명 연구서 <그리스 문화사>는 그의 마지막 대표 저작이다.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er Burckhardt)

스위스의 미술사와 문화사를 연구한 역사가로, 각 분야의 역사학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 Chef~commonswiki/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예술사와 문화사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가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0)은 문화사 연구방법의 귀감이 되었다(역사철학).

생애

부르크하르트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부르크하르트 집안은 바젤에서 가장 존경받는 가문 중 하나였다. 3세기 동안 이 가문 사람의 일부는 국제무역과 견직물 제조로 재산을 모아 그 재산으로 정치적 권력을 얻었으며, 일부는 교수나 목사로 공동체에 봉사했다. 부르크하르트는 바젤에서 가장 훌륭한 중등학교에서 인문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바젤대학교와 뇌샤텔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초기에는 주로 그리스어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곧 문헌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역사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다.

이런 관심이 무르익기 전에 부르크하르트는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성직자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전통을 받아들여 신학을 공부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지만, 강한 소명의식이 없이 그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신학을 포기했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후 그는 항상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를 꺼렸지만 일종의 범신론적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부르크하르트의 종교사상은 처음에는 두드러지게 낭만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정통주의로 기울었다. 한편 인간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져 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1839~43년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저명한 고대사 교수인 아우구스트 뵈크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고대사와 근대사에 대한 그의 이해가 과거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노력과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은 프란츠 쿠글러, 레오폴트 폰 랑케 교수의 영향 때문이었다. 쿠글러는 예술사라는 새로운 학문을 정식으로 소개하여 독일 낭만파 작가들로 하여금 강한 흥미를 끌게 만든 사람이었다.

어린시절부터 부르크하르트는 예술과 건축에 매력을 느꼈다. 부르크하르트는 화가와 조각가의 업적에 자극받아 이탈리아와 르네상스로 관심을 돌렸을 뿐 아니라 법률·정치·외교 분야를 다소 하위에 두었다. 이러한 관심분야가 바뀌자 그의 스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레오폴트 폰 랑케와의 관계가 미묘해지게 되었다. 외교사의 대가인 랑케는 국가와 민족에게 자율적이고 고귀한 기능을 부여했으며, 그결과 프로이센 및 독일의 민족주의와 운명을 같이했는데, 이같은 입장은 나중에 부르크하르트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랑케와 부르크하르트는 역사학에 대한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실례로 자주 인용되지만, 동시에 부르크하르트가 위대한 스승의 학문적 업적에 경의를 표했고 랑케는 제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칭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나중에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베를린에서 2번의 겨울을 지낸 뒤, 부르크하르트는 신설된 본대학교에서 여름학기를 보냈다.

본에서 그는 예술사를 연구하는 동료 고트프리트 킹켈과 친해졌고, 그의 집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펴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킹켈은 친구인 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기한 과거를 갖고 있었지만, 부르크하르트와는 달리 1848~49년 독일에서 실패로 끝난 자유주의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무렵 그들의 우정은 이미 완전히 식어 있었다.

부르크하르트의 정치적 신조는 그의 종교적 신념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의 고향과 가정의 기풍은 민주적이었지만, 귀족의 오만함이 있었다. 그는 자유를 극히 사랑했지만, 곧 스위스와 독일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열망하는 것을 경멸하게 되었다. 부르크하르트에게 1848~49년은 전환기였다. 낭만주의에 대한 탐닉과 정치적 기대는 이제 죽어버렸다.

그는 독일의 친구들을 거의 잊어버렸으며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는 이제 보수주의자였지만, 이러한 보수주의는 정치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는 구제할 수 없을 만큼 피상적이라고 생각하여 그 시대에 대해 점점 더 위화감을 느꼈고,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오하고 풍부해보이는 과거를 되살리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 1849년에는 그가 사랑하던 마르가레테 슈텔린이 바젤의 한 은행가와 결혼했다.

마르가레테는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깊은 애정을 느낀 여성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게 감정을 억눌렀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정교사에게 배우게 될지도 모를' 자식을 낳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면서 다시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바젤대학교는 부르크하르트가 스위스에 없을 때 그에게 박사학위를 주었고, 그는 1843년 베를린에서 돌아오자마자 사(私)강사 자격을 인정받았다. 비록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2년 동안 보수주의적 일간지 〈바슬러 차이퉁 Basler Zeitung〉의 편집자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1846~47년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친구이자 스승인 쿠글러와 함께 예술사 교과서 2권을 증보하여 새로 펴내는 작업을 추진했다. 1847~48년 겨울은 로마에서 보냈다. 그후 다시 바젤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바젤대학교는 작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보통 수준이었다. 강의는 이제 그의 생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고 가장 능숙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은 대개 얼마 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이 50명을 넘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저녁에는 자주 바젤의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했는데, 오히려 이때 많은 청중이 모였다.

1855년 부르크하르트는 바젤을 떠나 취리히에 새로 생긴 연방 공과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쳤지만, 1858년 다시 모교로 돌아왔고 그후로는 줄곧 바젤의 유일한 역사학교수로 일했다. 그러나 이후 20년 동안 그는 모교인 중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그가 대학의 역사학 강의와 예술사 강의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은 1874년부터였다. 1886년부터 1993년 은퇴할 때까지는 예술사만 가르쳤다. 강의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유럽 문명의 모든 영역을 다루었다.

이탈리아어를 배운 부르크하르트는 1837년 처음으로 스위스 남쪽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에 다녀왔는데, 바젤에서 이탈리아까지 왕복하는 동안 내내 도보 여행을 했다.

이듬해 여름에 그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1개월 동안 여행했다. 그후 1883년까지 이탈리아와 그밖의 곳을 여행하는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독신 생활을 특징짓는 정기행사가 되었다.

저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부르크하르트의 책들은 그가 유럽의 사적과 귀중한 예술품에 정통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중요한 저서는 마지막 저서와 마찬가지로 고대문명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입증해주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Die Zeit Konstantins des Grossen〉(1853)에서 건전하지 못하고 부도덕하지만 종교활동과 문화활동으로 가득 찬 과도기의 로마 모습을 제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융성이 필연적이었고 중세의 독창적인 문화가 발전하는 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는 분명 고대세계의 쇠퇴하는 세력에 초점을 두었다.

〈명승지 안내 Der Cicerone〉(1855)는 이탈리아 예술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서로, 지리적으로 배열되어 여행 안내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뒤이어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주요원천이 되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주제를 나타내는 적절한 소제목(세계와 인간의 발견, 개성의 발달, 예술 작품으로서의 국가, 근대적 유머 감각)을 이용하여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일상생활과 그 정치적 풍토 및 뛰어난 인물들의 사상을 분석했다.

그가 이용한 자료는 대개 연대기와 소설로 이미 출판되어 누구나 쉽게 입수할 수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그것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항상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그 자료에 접근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많은 차이점을 강조했지만, 중세의 업적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뿐 아니라 다른 어떤 시대도 그 이전 시대보다 전체적으로 진보했다고 기술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었다. 르네상스 성기에는 대체로 라파엘의 예술이 부각되지만, 부르크하르트는 '시계장치'와 같이 빈틈없이 움직이는 교묘하고도 무자비한 르네상스의 정치적 구조를 간과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는 개인과 소수의 창조적 자유를 고려하지 않는 정교한 대중통제 기구인 근대 국가의 시작을 감지했다.

부르크하르트에게 예술은 르네상스의 최대 성과였지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에서는 이 중요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주제를 별개의 논문에서 다루고 싶어했지만, 이 소망은 건축만 다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7)에서 일부만 이루어졌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연구가 결국 문화사를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면, 예술사가 지닌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뵐플린이었다. 역사시대와 마찬가지로 예술양식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탄생되었다. 예술양식은 한 시대의 전반적인 성격에서 나온 공통된 특징으로 결정되었고, 다시 그 시대의 문화를 규정하는 데 이바지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시모음집 〈춤추는 인형의 노래 E Hämpfeli Lieder〉(1853)를 출간하기도 했다. 독일어 방언으로 씌어진 이 시집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귀중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 문명 연구서이며 그의 마지막 대작인 〈그리스 문화사 Griechische Kulturgeschichte〉(4권, 1898~1902)를 비롯해 예술사 평론 〈루벤스에 대한 제안 Erinnerungen aus Rubens〉(1898)과 〈이탈리아 예술사에 대하여 Beiträge zur Kunstgeschichte von Italien〉(1898)가 그의 사후 친구들에 의해 편집·출판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나온 2권의 저서 〈역사에 관한 고찰 Weltgeschichtliche Betrachtungen〉(1905)과 〈역사 연구 시론 Historische Fragmente〉(1929)은 특히 중요하다. 첫번째 책은 그의 역사철학을 요약한 것이며, 강의 원고를 간추린 2번째 책은 역사를 전체적 시각으로 바라본 부르크하르트의 타고난 재능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이 2권의 책에는 20세기의 폭력적인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에 대한 예견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락이 들어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예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그의 통찰이다. 그는 과거는 "우리를 (다음 번에는) 더 약삭빠르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더 현명하게 만들어주는 경험"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학자

학자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부르크하르트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