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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 4. 14, 영국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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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5. 10. 22,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요크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역사가.
역사철학을 확립한 저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는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조카로서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공부했다(1911). 아테네에 있는 영국학교에서도 잠시 공부했는데 이 경험은 그가 문명쇠퇴에 관한 철학을 전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12년 베일리얼 칼리지의 고대사 특별연구원이 되었고, 1915년부터 영국 외무부 정보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의 영국대표를 지낸 뒤 런던대학 비잔틴과 근대 그리스 교수로 임명되었다. 1921~22년 그리스-투르크 전쟁 동안 〈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 신문의 통신원으로 일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그리스와 투르크의 서부 문제 The Western Question in Greece and Turkey〉(1922)를 썼다.
1925년 런던 경제학교의 국제사 연구교수 및 런던에 있는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연구책임자가 되었다.
1922년 그는 불가리아 농민이 여우가죽 모자를 쓴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역사의 연구〉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머리쓰개로 묘사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저서는 그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질, 즉 그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 그 형태에 대한 시각, 엄청난 학식, 예리한 관찰 등을 특색 있게 보여주었다.
〈역사의 연구〉에서 토인비는 인간역사 과정에서 26개 문명의 등장과 쇠퇴를 검토하고 문명은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결론지었다. 문명은 그 지도자들이 창조적으로 대응하기를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군국주의, 전제적(專制的) 소수의 독재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에서 분석했던 것과는 달리 토인비는 문명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문명은 연속되는 도전에 계속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와도 달리 역사가 경제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힘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역사의 연구〉를 쓰는 동안에도 토인비는 수많은 저서를 썼고 왕립국제관계연구소의 해외연구 책임자(1939~43)로, 외무부 연구담당 부서의 책임자(1943~46)로 일했으며 은퇴할 때까지 영국경제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많은 책을 저술했던 그는 1950, 1960년대에 세계종교·서구문명·고전역사·세계여행 등에 관한 책들도 계속 출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토인비는 그가 중점을 두는 역사의 주인공을 문명에서 고등종교의 탁월성으로 바꾸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시련의 문명 Civilization on Trial〉(1948)·〈동방에서 서방으로 : 세계여행 East to West : A Journey Round the World〉(1958)·〈헬레니즘 : 문명의 역사 Hellenism : The History of a Civilization〉(1959) 등이 있다.
토인비는 다른 역사가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비판은 그가 실제자료와 필적하는 가치로 신화와 은유를 사용한 것과 문명의 등장과 몰락에서 그 재생력으로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에 집중되었다(헬레니즘). 많은 비평가들은 토인비가 도달한 결론이 역사가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도덕가의 것이라고 불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는 현대 역사연구의 전문화 경향에 대한 고무적인 해답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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