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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선사시대
인도아대륙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멀리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이 시기의 수렵인들은 오랫동안 인도대륙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정착농경사회와도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은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에서 동부의 벵골에 이르는 지역 및 북부의 서북 국경지대에서 남부의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인도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차원의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공동체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양·물소 등의 가축을 길렀던 흔적도 보인다. 당시의 수렵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는 활과 화살이 대부분인데,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한 작살이나 도끼 등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냥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단계의 어로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인도아대륙에서는 정착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들로서는 케랄라 동쪽 산기슭의 마라이유르, 구자라트의 랑나지, 라자스탄의 바고르, 마디아프라데시 인근의 모샹가바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인더스 문명
수렵과 채집생활의 신석기 단계를 거친 인도아대륙은 점차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도시문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도시문화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인더스 문명은 BC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지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농경문화가 BC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범람지로 확대·발전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문화이다. 인더스 강 문화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 경과 그의 동료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시행된 유적발굴조사 결과 이 문명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발굴자들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어떤 문명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런 가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두 문명은 서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받은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문명 자체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고유한 것이었음이 고고학적 조사결과 입증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색인:인도건축). 건물들 사이는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의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벽돌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판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방향으로는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는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칼리방가 지역을 예로 들면 거리의 너비와 모양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주요도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작은 골목길들은 서로 분기점을 이루면서 각각 크고 작은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삼 이들의 도시계획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일반적인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구운 벽돌과 진흙 벽돌을 건축물의 사용목적에 따라 각각 구별해서 썼다. 예를 들어 제방이나 대중집회소에는 진흙벽돌을 사용했고, 목욕탕·성벽·수로 등에는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이때 벽돌을 쌓는 방법은 벽돌의 가로면과 세로면을 1번씩 겹치게 하는 이른바 영국식 쌓기를 주로 이용했다. 이 벽돌 외에도 필요에 따라 목재를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이다.
특히 모헨조다로에서는 대중목욕탕이 발견되어 이 문명의 질적 수준과 함께 당시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 목욕탕은 성채의 북쪽 중간지점에서 잘 보존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약 83㎡ 크기의 벽돌 구조물이었다. 그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2단의 바닥으로 설계되어 있어, 1단 높은 곳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장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욕탕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일단의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벽돌로 만든 약 1.5m 높이의 연단들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지배자였던 정치권력자나 제사자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이곳은 경건한 종교의식을 행하기 직전에 공동으로 몸을 닦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색인:정화의식).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에 위치한 하라파 지역 역시 모헨조다로와 거의 대동소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라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신상(母神像)·동물상·장의(葬儀)의 풍습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특히 하라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정한 구역에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여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 다음, 유골만을 다시 추려 항아리 같은 용기에 담아 땅속에 매장했다(→ 색인:묘지). 이른바 조장(鳥葬)의 풍습이다.
여기서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환생에 대한 하라파인들의 기대심리를 엿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시신을 다른 짐승들의 먹이로 베푸는 보시를 통해 영계(靈界)로의 여행을 돕는 음조(陰助)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인들의 종교 성향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꼽고 있는 윤회설의 원시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로는 칼리방가·로탈 등이 있다.
인더스 문명은 대개 BC 1750년 무렵을 전후하여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된 것은 최근 과학의 발달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은 BC 2300경~1750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갑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설, 인구폭발에 따른 식량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가정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멸망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 인더스 문명이 그후의 인도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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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선사시대의 인도 문명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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