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BC 6세기말경 로마 공화국이 설립된 후에 로마인들은 정치적 목적을 지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에트루리아 양식을 부활시키고 에트루리아 화가들을 고용했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당시 로마의 화가들로서 전쟁의 장면을 묘사했다는 메트로도루스와, 풍경화와 로마의 저택장식을 즐겨 그렸다는 데미트리우스 이외에도 파비우스 픽토르·파쿠비우스·리콘 등의 이름이 전해지나, 이들의 작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BC 2세기경 폼페이에서는 개인 저택의 실내 벽화장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른바 외피 양식 또는 제1양식으로 알려진 대리석의 채색 치장벽토 모방방식이 사용되었다. BC 1세기 중반에는 갑자기 로마와 그 주변도시들에서 소위 제2양식이라 불리는 화려한 벽화들이 나타났는데, BC 1세기경에 제작된 〈오디세우스의 일행〉처럼 벽면 전체를 깊이·분위기·빛이 묘사된 정교한 회화적 방식으로 그린 풍경화들로 채우는 것과 BC 50년경 폼페이의 일명 '신비의 별장'에 그려진 '디오니소스 입문의식과 신부의 혼전의식'처럼 벽을 마치 그 안에서 의식이 거행되고 있는 좁은 무대처럼 다룬 것들이 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퍼진 제3양식에서는 벽 위에 걸리는 중앙 패널화가 창문을 통해 보는 듯한 풍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칸막이 및 태피스트리에 삽입되거나 그대로 벽에 장식용으로 걸리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끝나면서부터 폼페이의 멸망까지 성행했던 제4양식은 이전의 양식들과는 달리 좀더 차분하고 사실적인 건축 구도와 무대배경을 모방한 듯한 건축의 윤곽선, 그리고 벽면 전체가 평평하고 중립적인 흰색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로마의 초상화들은 사실성과 기교면에서 초상조각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흥미로운 것은 금과 유리의 메달에 그려넣은 초상화들로서, '부네리우스 케라무스 가족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세련되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 16세기 유럽의 세밀화 양식에 견줄 만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