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개요
1920, 1930년대에는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환멸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새롭고 더욱 사실적인 양식의 사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독일에서 신객관주의로 알려진 전후(戰後)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은 전문 사진가 알베르트 렝거 파치이다. 그는 아르누보 시대(1890~1914) 사진의 모호함과 왜곡을 몹시 싫어했고 일상의 사물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그의 사진들은 강한 디자인, 사실적인 기록, 물질을 강조하는 순수 사실주의로 특징지어진다. 신객관주의는 카를 블로스펠트가 식물들을 본보기로 하여 1900년경에 찍은 경이롭고도 훌륭한 식물의 확대사진이 발표되었을 때 큰 영향력을 얻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약 30년간 생계의 수단으로 찍어온 상냥하게 꾸민 표정과 겉치레의 스튜디오 인물사진에 싫증을 느낀 아우구스트 잔더는 쾰른의 그의 스튜디오에서 소매상인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30년 앤셀 애덤스가 폴 스트랜드의 작품을 보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으며 자신이 이름붙인 '자연풍경에 대한 해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추상주의의 영향
몇몇 예술가들은 사진인화지 위에 물체를 직접 올려놓고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빛에 노출시키면 인화지는 물체의 불투명성 및 투명성에 따라 어두워지는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 또 하나의 실험형태는 합성사진이었다. 사진을 수채화와 결합시키는 방법은 이미 1870년대에 인기를 모았던 예술방식이었다. 20세기 첫 10년 동안 입체파 화가들이 그들의 추상적 캔버스 위에 신문의 기사조각을 오려붙이거나 병의 상표 또는 심지어 실제 물건들까지 덧붙이기 시작하면서 매체들을 자유롭게 결합시킨다는 사고가 되살아났다. 이 콜라주(프랑스어로 '붙인다'는 뜻의 'coller'에서 유래)기법이 확대된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탁월한 포토 몽타주들이 1920년대 독일의 예술가인 존 하트필드, 한나 회히, 헤르베르트 바이어, 오토 움베르, 그리고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에 의해 만들어졌다(포토몽타주). 같은 시기에 프랑스인 외젠아제의 기록사진이 처음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898년경부터 파리와 그 주변풍경들을 직접적이고 진솔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적(詩的) 표현으로 1만여 점의 사진에 그려냈다. 그의 음화와 전 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설득력을 지닌 매체로서의 사진이 지닌 위력에 대한 인식은 좀더 나중에 일어났다. 굴뚝청소부, 꽃장수, 뱃사람, 그리고 잡상인들에 대한 감동적이며 진솔한 사진들에 의해 설명된 사회학연구가 단순한 서술방식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1880년대 뉴욕 시에서 경찰기자로 활동했던 제이콥 A. 리스는 맨해튼 남동부지역 빈민촌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던 가난한 이주민들의 삶을 개선해보고자 개인적인 운동을 벌였다. 그 자신도 1870년 덴마크에서 뉴욕으로 이민온 이주민으로서, 자신이 근절하려하는 상황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사진들은 미 입법부가 관계 법규를 개정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그밖의 주목할 만한 기록사진가들로는 리처드 비어드, 존 톰슨, 루이스 W. 하인, 벤저민 스톤 경이 있다.
포토저널리즘
1890년대 망판과정 기술이 완벽해져 정확한 복사재현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사진이 정규적으로 잡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또한 1915년에 이르러 신문도 화제가 되는 사건을 보도하는 데 사진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신문 삽화가라는 직업은 점차 쇠퇴되어갔다. 기술의 발달이 재현 작업의 질을 향상시켰지만 초기 보도사진의 주제와 양식은 전반적으로 무디고 상상력이 부족했다. 1924년 에르마녹스와 1925년 라이카가 등장함에 따라 비로소 삽화가 실린 신문잡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넓은 구경의 렌즈가 부착된 이 2가지의 독일제 소형 카메라는 옥외촬영을 위해 극히 짧은 노출시간만을 필요로 했으며 심지어 있는 그대로의 조명으로 실내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능 때문에 형식적인 자세를 탈피할 수 있게 되었고 놀랄 만큼 현실감 있는 사진들이 나오게 되었다. 1928~29년에 유럽 최대의 사진잡지인 〈뮌헨 화보 Munchner Illustrierte Presse〉와 〈베를린 화보 Berliner Illustrierte zeityng〉가 새로운 양식의 사진을 싣기 시작했다.
아마도 소형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초기사진가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에리히 잘로몬과 펠릭스 H. 만일 것이다.
유럽의 다른 지역과 미국에서도 독일의 사진잡지를 본떴다. 그중 한 잡지가 1928년 파리에서 발간된 〈뷔 Vu〉로 비록 단명했지만, 그중 한 호는 로버트 카파가 스페인 내란에 대해 찍은 기념할 만한 사진들을 전면에 게재했다.
1936년 〈라이프 Life〉지와 〈룩 Look〉지가 미국에서 창간되었는데, 사진편집자와 사진가, 조사담당, 작가가 한 팀을 이룬다는 하나의 공식이 성립되었다. 그결과 뚜렷한 사진 양식이 창조되었다.
보도사진가들이 아주 짧은 순간 속에서 사건의 중요성을 인지하도록 자신을 훈련하고 순간적인 인식이 영원히 보존되는 속도와 정확성으로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위대한 창조의 재능이다.
헝가리인 앙드레 케르테스가 1915년 초반과, 1920년대 파리에서 찍은 후기 작품 속에서 이러한 재능은 뚜렷이 드러난다. 프랑스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후에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 그의 양식을 1930년경부터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카메라는 "눈의 연장"이었다. 그는 비상한 정확성으로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을 완벽하게 구성된 사진으로 감지했다.
컬러 사진
자연의 색채를 흑과 백의 다양한 음영으로밖에 변형시키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사진의 약점으로 간주되었다.
오토크롬 방식은 최초의 실질적인 컬러 사진방식으로서 프랑스에서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개발되어 1907년 소개되었다. 이것은 전정색성(全整色性:모든 색채에 민감한 특성) 유제의 얇은 필름이 입혀진 색채막(기본색을 여과시키는 역할을 하는 염색된 녹말가루와 여과되지 않은 모든 빛을 차단하는 흑색가루가 덮인 유리판)을 사용했으며 컬러의 투명 양화(陽畵)를 만들어냈다.
뤼미에르 형제의 성공은 부분적으로 사진판을 제조하는 런던의 한 업체가 바로 1906년에 소개한 전정색성 유제의 개발 덕택이었다(전색성 필름). 컬러 사진 방식의 개선과 대안을 찾으려는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1935년 미국의 음악가들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 2세와 레오폴드 매너스가 공동으로 코닥 연구실험실에서 코닥크롬필름을 발명해 현대적인 컬러 사진 시대가 열렸다.
이 반전(反轉) 필름으로 영사막에 투사할 수 있고 인쇄용으로 재현할 수 있는 컬러의 투명 양화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독일의 아그파회사가 아그파컬러 음-양화 방식을 개발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그 필름은 1949년까지 실용화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사진의 약 80%가 컬러로 찍혀지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취미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진의 역사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