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908. 8. 22, 프랑스샹트루 |
---|---|
사망 | 2004. 8. 3,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보도사진가. 외젠 아제와 맨 레이의 작품을 본 후 사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33년 라이카 사진기를 구입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후 40년간 보도사진작가로 활동했으며, 다수의 작품집과 작품전을 발표했다. 1950년대에 발표한 사진집 <결정적 순간>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의 의미와 기술, 효용에 대한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개요
프랑스의 보도사진가. 프랑스의 보도사진가. 그의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사진들은 보도사진이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숨어 있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라는 그의 이론은 저서인 〈결정적 순간 Images à la sauvette〉(1952)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유년 시절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그곳 학교에 다녔으며, 1927~28년 파리에서 입체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로트와 공부했다. 로트는 카르티에가 회화에 대해 평생의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인물이었는데 사물을 보는 훈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29년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문학과 회화를 공부했다.
소년시절 간단한 브라우니, 스냅샷 카메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그 매체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1930년경 20세기의 두 중요한 사진작가인 외젠 아제와 맨 레이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얼마간의 비용을 마련해 1931년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면서 소형(35㎜)사진기로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기록했으며, 흑수열병에 걸려 불가피하게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진작가 활동
소형사진기의 휴대성과 즉각적인 인상을 쉽게 기록할 수 있는 편리성에 공감하게 된 그는 1933년 35㎜ '라이카' 사진기를 샀다. 이런 종류의 사진기는 그에게 특히 잘 맞았는데 자연스러움뿐만 아니라 익명의 상태로 촬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소리내지 않고 심지어는 보이지도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몹시 꺼려했기 때문에 사진기 렌즈의 밝은 크롬 부분을 검정 테이프로 가렸으며 사진기를 손수건 밑으로 숨기기도 했다.
그는 실생활과 작품이 비슷한 과묵한 사람이었다. 사진작가로 40여 년간 지내오면서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나 여행을 하는 데 강압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으므로 천천히 움직이며, 각 나라에서 '적절한 기간 동안 살고', 여유있게 시간을 사용하는 덕택에 그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1937년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했고, 자신이 만든 최초의 영화인 스페인 내란의 의료원조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그해는 그가 처음으로 신문과 잡지사를 위해 현장 보도사진들을 찍은 해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1936~39년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수로 〈야유회 Une Partie de campagne〉·〈게임의 법칙 La Règle du jeu〉을 만들면서 더 충족시킬 수 있었다. 사진가로서 그는 소년시절에 본 위대한 영화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가 말하기를 그것들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순간, 즉 인상적인 시점을 정확하게 선택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정지된 낱장의 사진에 연속되는 영상의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그의 영화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가 1943년 탈출하여, 이듬해 독일의 점령과 퇴각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지하운동조직의 사진단에 참여했다. 1945년에는 미국 육군정보국을 위해 석방된 전쟁포로와 추방자들의 프랑스 귀환을 다룬 영화 〈귀향 Le Retour〉을 제작했다.
주요 사진전
1933년 그의 사진들이 뉴욕 시의 권위 있는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전시되었으며,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한 비중있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미국의 사진가 로버트 카파등과 공동으로 매그넘포토스라고 알려진 협동 사진대행사를 창설했는데, 그 회사는 정기간행물업체에 당시 유능한 보도사진작가들이 찍은 전세계의 사진들을 제공했다. 매그넘포토스의 후원 아래 그는 어느 때보다도 보도사진에 열중했으며 이후 3년 동안 인도·중국·인도네시아·이집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곳과 1950년대 유럽에서 모은 자료들이 1952~56년에 발간된 몇 권의 사진집의 주제를 이루었는데, 그 간행물들은 그가 자신의 특수기술에 정통한 대가라는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그중 하나인 〈결정적 순간〉은 가장 잘 알려진 간행물로,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의 의미와 기술 및 효용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그의 중심적 사상인 포착하기 힘든 '결정적 순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눈부시게 명확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에 피사체의 외양이 그 피사체가 포함되는 장면을 가장 효과적인 구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을 말한다. 그밖에 〈카르티에 브레송의 프랑스 Cartier-Bresson's France〉(1971)·〈아시아의 얼굴 The Face of Asia〉(1972)·〈러시아에 대하여 About Russia〉(1974)가 있다.
말년
1955년 그는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박물관에서 400점의 사진으로 생애를 회고하는 개인전시회를 개최하는 큰 영예를 얻었고, 그 전시회는 유럽·미국·일본을 순회하며 열렸으며, 마지막에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그의 사진작품들이 보관되었다. 1963년에는 쿠바, 1963~64년에는 멕시코, 1965년에는 인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영화제작자인 루이 말이 회상하기를, 1968년 5월 파리 학생폭동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35㎜ 사진기를 가지고 현장에서 그 격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1시간당 4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관심을 영화제작으로 돌린 말년의 그는 〈캘리포니아 인상 Impressions of California〉(1969)·〈남부 촬영 Southern Exposures〉(1971)을 만들었다. 그는 스틸 사진과 화보잡지에서의 스틸 사진의 이용은 상당한 부분이 텔레비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믿었다.
항상 자신의 사진을 자신이 직접 인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사진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것은 정신이 산만해져 해롭다고 믿어 영화 촬영을 감독할 때도 카메라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라이카(그는 이것을 자신의 공책이라고 불렀음) 카메라를 가는 곳마다 휴대하고 다녔으며, 화가로서의 훈련을 위해 항상 작은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기에는 사회가 함축되어 존재했고 그의 마음속에서 사진은 점점 더 인조화되어가는 시대 속에 진실된 세계와 인간적인 세계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취미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