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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7. 2. 12, 프랑스 보르도 근처 리부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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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7. 8. 4,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사진사.
파리와 파리 사람들에 대한 사진들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아주 어려서 고아가 된 뒤 선실 급사로 배를 탈 수 있을 만큼 자랄 때까지 친척집에서 살았다. 몇 차례의 항해 뒤, 연극무대에 서기 위해 항해를 포기했고 곧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한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두 사람이 함께 유랑극단에 들어가 프랑스의 시골마을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볼품 없는 외모로 인해 항상 단역에 머물렀으며 급료도 낮았다. 40세쯤 되자 그들 부부는 더이상 배우로서는 생계를 꾸릴 수가 없어 새로운 직업을 찾아나서야 했다. 얼마 동안 그림을 그려 보려고 하다가 1898년경 사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의 삶은 파리와 그 근교에서 아름답다거나 예술적이라고 느낀 모든 것을 기록하는 데 바쳐졌다. 격자무늬 쇠창살, 분수, 동상, 나무들에 대한 연작사진들을 만들었으며 상점의 전경을 찍은 〈바구니와 빗자루 가게 Basket and Broom Shop, Paris〉(1910), 유리진열장을 소재로 한 〈유니폼 Uniforms, Les Halles, Paris〉(1910경), 가난한 소매상들을 소재로 한 〈전등갓 행상인 Lampshade Peddler〉(1910경) 같은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에는 보행인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거의 없고 단순하지도 않은데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의 '라 로통드'카페 Café 'La Rotonde', Boulevard Montparnasse, Paris〉(1920경)에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서정적·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거인, 파리 트론의 축제 The Giant, Fête du Trône, Paris〉(1910경)에서는 기묘하고 불안하게 하는 형상에 대한 그의 시각이 나타나 있다. 그의 단골고객은 역사적 건물과 기념물들의 사진을 구입했던 박물관과 역사단체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매우 가난했으나 1921년 파리의 사창가를 기록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가 주문을 받아 했던 작업은 아주 드물었지만 이 일로 〈베르사유의 사창가 Brothel, Versailles〉(1921경) 등의 걸작품들을 남겼다. 1926년 파리에 살고 있던 미국의 화가이자 사진사인 맨 레이(1890~1976)가 〈상점진열장:양복점 마네킹 Shop Window:Tailor Dummies〉(1910경)·〈파리 롭세르바투아르가의 이발사 Coiffeur, Avenue de l'Observatoire, Paris〉(1920경)와 같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맨 레이는 아제가 상점 유리창의 반사를 이용하여 기괴하게 얽힌 형상을 얻어낸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의 사진 4점을 잡지 〈초현실주의 혁명 La Révolution Surréaliste〉에 실었다. 이 작품은 아제가 생전에 인정받은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죽기 전 몇 년 동안은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1900년 이후로 빵과 설탕, 우유를 제외한 모든 식품에는 독이 있다고 믿게 되어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그러한 엄격한 규정식과 오랜 시기에 걸친 고된 노동으로 육체적으로 쇠약하게 되었다. 1926년 일생의 충실한 반려자가 죽고 나자 그는 혼자가 되어 완전히 무력해졌다.
맨 레이와 함께 작업하던 미국의 사진사 버러나니스 애벗과 뉴욕의 미술품 상인 줄리언 레비가 그의 유작품들을 샀고 현재 그것들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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