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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다른 표기 언어 Berlin
요약 테이블
위치 독일 동부
인구 3,574,000명 (2023년 추계)
면적 891.8㎢
언어 독일어
대륙 유럽
국가 독일

요약 독일의 행정구역. 북독일평원 심장부에 있다. 교역 및 지리상의 동서 중심축 위에 걸쳐 있다는 이점이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고, 이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양분되면서, 이 도시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영토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베를린은 둘로 갈라진 독일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로 지정되었고, 서베를린은 지리적으로 서독 본토로부터 격리된 채 독일연방공화국의 주가 되었다. 1989년말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과 그에 따른 베를린 장벽의 개방은 베를린이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될 수 있는 전망을 낳게 했다.

베를린(Berlin)

ⓒ Pixabay | Public Domain

북독일평원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 교역 및 지리상의 동서 중심축 위에 걸쳐 있다는 이점이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고 이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베를린의 옛 영광은 1945년에 끝났으나,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파괴를 극복, 재건되었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양분되면서, 이 도시는 완전히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영토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베를린은 둘로 갈라진 독일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동(東)베를린은 동독의 수도로 지정되었고, 서(西)베를린은 지리적으로 서독 본토로부터 격리된 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주(헌법상 실제 주로 편입된 것은 아님)가 되었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이런 특이한 상황은 1961년에 세워진 콘크리트 장벽(베를린 장벽)에 의해 상징·심화되었고, 40년 이상 베를린을 동서 양 진영의 끊임없는 대치 현장으로 만들었다.

지도
베를린

1989년말에 일어난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급작스런 몰락과 그에 따른 베를린 장벽의 개방은 예기치 않게 베를린이 다시 전체 독일의 수도가 될 수 있는 전망을 낳게 했다. 1990년 재통합 조약규정에 따라 이곳은 전쟁 이전 상태로 복구되었고, 이어 통일 독일을 구성하는 16개주 중 한 주로 지정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그것이 지니는 정치적 중요성 외에, 베를린이 다시 유럽 제1의 문화·상업 중심지가 되리라는 것을 예고했다.

자연환경

위치

폴란드에서 서쪽으로 약 55km, 체크에서 북쪽으로 약 180km 떨어져, 독일 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발트 해에서는 대략 180km 남쪽에 있다. 베를린 시 중앙을 흐르는 슈프레 강의 넓은 빙하곡(氷河谷)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도는 해발 35m이다.

남북길이가 37km, 동서길이가 45km로 현재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주로 빙식의 사질토(砂質土) 위에 건설되었으며, 도시 주변에는 남동쪽 다메 강과 서쪽 하펠 강 강물에 의해 조성되고 가장자리가 숲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호수지대가 펼쳐져 있다.

실제 베를린 대도시권의 1/3은 지금도 모래가 많은 소나무·자작나무 숲, 호수들, 호숫가 지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인해 생긴 잡석들로 이루어진 여러 언덕들 중 하나인 '악마의 산'(토이펠스베르크)은 높이가 120m에 달하며, 현재는 스키와 썰매를 즐길 수 있는 겨울 스포츠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기후

이곳에서는 대서양의 영향이 약화되고 대륙 평원의 기후가 시작된다.

이처럼 2가지 기후가 교차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현지인들이 '베를린 공기'라고 부르는 기후적 특성을 보인다. 이 공기는 산업공해로 대기오염이 심해지고 있으나, 호수가 많은 저지대 습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공기가 독일 서부만큼 습하지 않으면서도 차고 신선하다. 연평균기온은 약 9℃이며, 겨울평균기온은 0℃, 여름평균기온은 18℃이다. 연평균강수량은 598㎜이며, 그중 약 1/5~1/4은 눈으로 내린다.

도시계획

애초에 쌍둥이 마을로 건설된 베를린과 쾰른이 13세기부터 슈프레 강의 한 섬(쾰른 소재지)과 그 섬이 마주보이는 슈프레 강 북안의 조그마한 땅(베를린 소재지, '역사' 항목 참조)에서 발전했다.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부터 브란덴부르크 선거후들(1701년 이후로는 프로이센 왕을 겸함)이 유럽 정치 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베를린 중심지 또한 그 규모가 확대되었고 넓은 거리와 아름다운 광장들 그리고 웅대한 석조건물들로 단장되었다. 중심지에는 남북 방향으로 넓은 빌헬름가(街)와 프리드리히가 등이 들어섰고, 베를린 특유의 동서 도로축이 형성되었다.

이 동서 도로축을 보강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 현재 주요간선도로로 쓰이고 있는 몇 개의 넓은 출입로들이다. 19세기말에 생긴 교외지역들은 모두 이들 간선도로와 그 보조거리들 주변에서 발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파괴가 있었던 곳에는 현대식 고층 아파트와 사무용 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중심지 부근에 있는 큰 공원이라고는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서쪽에 있는 티르가르텐 공원뿐이나, 놀랍게도 베를린은 늘 푸른 전원도시로, 거의 모든 거리마다 들어서 있는 돌로 된 아파트 단지의 삭막함을 잎이 우거진 푸른 나무들이 완화시켜주고 있다.

베를린에는 나무도 많지만 물은 더 많다. 도시 중앙으로 슈프레 강이 흐르고 동과 서로는 넓은 호수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곳곳에 운하가 지나고 인공항구도 몇 개 있어 그야말로 물의 도시이다.

1989년 정치적 돌발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했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지형지물은 베를린 장벽이었다. 이 장벽은 원래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더 나아가서는 동독 주민들과 서베를린 주민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동·서 베를린 접경지대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가 몇 군데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프리드리히가에 있던 카를 검문소였다. 처음에 베를린 장벽은 철근을 댄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졌으나, 여러 해에 걸쳐 점차(일부 구역에서는 3차례까지) 쇠말뚝들 사이에 조립식 콘크리트 조각을 끼워넣는 공법으로 교체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된 이후에는, 크레인으로 모든 장벽을 제거하면서 포츠다머 광장 검문소 같은 새로운 검문소들이 생겨났다.

장삿속이 밝은 동서 양 진영의 주민들은 끌과 망치로 장벽을 부숴 그 파편들을 기념물 시장으로 빼돌리는 기민성을 보였는데, 이들에게는 '장벽 딱따구리'(Mauerspechte)라는 별명이 붙었다.

도시계획과 관련해 베를린의 정치적·지리적 분리가 미친 영향은 실로 광범위했는데, 이런 영향은 부분적으로 장벽을 쌓아 만든 국경 때문에 생겨났다. 사실상 과거 베를린의 행정중심지 바로 서쪽에 있는 베를린미테까지가 동독 영토에 편입됨으로써, 서독은 새로운 중심지를 개발해야 했다.

그결과 서베를린은 베를린미테와 드넓은 티르가르텐 공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쿠어퓌르스텐담과, 샤를로텐부르크의 이전 교외지역인 초 철도역 일대에 새로운 행정중심지를 건설했다. 이 지역은 19세기말 이래로 특색있는 상업·유흥 지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입은 광범위한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현대적 모습을 띠게 되었다.

시내 곳곳에는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적절히 조화시키려고 한 베를린 시의 노력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그중 베를린 서부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인데, 19세기 건축물(제2차 세계대전중 파괴됨)의 종탑이 유리와 콘크리트를 절묘히 섞어 만든 1961년의 현대적 교회와 잘 조화되어 있다. 베를린 서부지역에 있는 건축물 중 복구작업을 마친 라이히슈타크 건물은 전통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이밖에도 서부지역에서 유명한 건축물로는 교향악 홀과 신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교향악 홀의 부수시설인 실내악 홀은 1987년에 개관되었다. 17세기말에 건설된 샤를로텐부르크 궁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뛰어난 베를린 시 건축물이다.

베를린 시 동부지역에서는 전쟁기념 교회인 장크트니콜라스 교회(1200경)가 대표적 건물이다.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이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공습 이후 붉은 벽돌로 된 건물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으나, 베를린 건설 750주년인 1987년에 복구작업이 완료되었다.

꼭대기에 뾰족탑 2개가 달린 이 교회는 장크트 니콜라스 구역의 중심부를 장식한다. 장크트니콜라스 구역에는 300년 된 똑같은 모양의 공동주택들이 모여 있다. 알렉산더 광장 부근의 베를린 중심부에는 과거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건설된 2개의 건축물인 높이 365m의 텔레비전 송신탑과 공화국 궁이 우뚝 솟아 있다. 송신탑에서는 베를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며, 245m 지점에는 회전식 레스토랑이 있다.

베를린 중심부에는 또 베를린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전되어온 교회인 장크트마리 교회와 무제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구박물관, 신박물관, 국립미술관, 보데 박물관 외에도 유명한 그리스의 제우스 제단이 소장되어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이 있다. 이 지역에는 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시청, 주 의회 건물, 개축된 장크트헤트비히 성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1747년에 지어진 장크트헤트비히 성당은 종교개혁 이후 베를린에 세워진 최초의 로마 가톨릭 성당이다.

알렉산더 광장 부근으로부터 브란덴부르크 문에 이르는 넓은 거리 운터덴린덴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지구 또한 옛 것과 새 것이 적절히 조화되어 있다.

운터덴린덴 거리 동쪽 끝에는 베를린 성당이 서 있다. 이 거리에는 현대식 호텔과 백화점, 그리고 베를린 궁(옛 황태자 궁), 공주 궁, 오페라 하우스, 국립도서관, 빌헬름 황제 궁, 훔볼트대학교를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운터덴린덴 거리 남쪽에는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집합지 중 하나인 옛 겐다르메 시장(뒤에 아카데미 광장으로 개명)이 있는데, 독일 성당과 옛 왕립극장인 슈아우슈필하우스가 1987년 바로 이곳에서 복구되었다.

남북으로 뚫린 빌헬름 거리는 과거에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정부 청사들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또 히틀러가 사용했던 지하 벙커가 남아 있다. 이 지하 벙커는 베를린 장벽 철거 후 기념물 수집가 등에 의해 재공개되어, 또다시 중요한 역사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인구동향

장벽으로 갈라진 동서 베를린의 면적은 거의 비슷했으나, 인구면에서는 동베를린이 서베를린의 2/3에도 못 미쳤다. 서베를린 시민의 평균연령이 서독의 다른 도시민들의 평균연령보다 높았기 때문에, 서베를린에서는 젊은 서독 노동자들의 유입이 장려되었다. 그러나 동·서독 재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곧 새로운, 혹은 동·서독 분리 이전 원상태대로의 인구증가 패턴이 나타났다. 일부 서독인들은 보다 값싼 주택을 찾아 동베를린으로 이주해왔고, 베를린 곳곳의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외국기업들은 앞을 다투어 베를린에 상주하려고 했다. 일부 연구조사에 따르면, 베를린 시 인구는 2000년까지 500만 명 또는 그 이상이 될 전망이다.

경제

산업·무역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크게 위축되었던 전통적인 경제활동은 베를린 전역에서 괄목할 만하게 회복되었다. 섬유·금속·직물·자기류·기계·자전거 산업이 그런 활동 분야에 속한다. 서베를린에서 발달한 담배와 과자류 제조업은 계속 번창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 베를린에서 주력산업이 된 전자산업 역시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교통

버스는 현재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현대화된 고가철도와 지하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유력한 교통수단이다. 1871년에 가설된 고가철도망 에스반(S-Bahn:슈타트반)은 현재 베를린 시 전역에서 이용되고 있고, 1897년에 처음 건설된 지하철 우반(U-Bahn:운터그룬트반)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이미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지하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공중수송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중요한 수송수단이 되었다. 테겔과 베를린-쇠넨펠트에는 중요한 공항이 있어 모든 국제항공편을 운행하고 있다(→ 템플호프 중앙 공항).

베를린에 있는 라이히스아우토반(국립고속도로)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개통된 국립고속도로망의 일부이다. 이 고속도로는 베를린 시를 둘러싼 고속도로망인 베를린링과 연결되어 있어, 베를린 시내로 통하는 출입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와 사회

정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에서 각각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지방행정이 대부분 그대로 존속하여 시장과 시의회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시 전체적으로 통일을 해야하는 초·중등 교육과 같은 문제들에서는 중앙집권화 경향이 나타났다.

1990년 봄 동독 전역에서 1933년의 히틀러 집권 후 처음으로 자유총선에 의한 국회의원과 시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는 동·서독 및 동·서 베를린이 정치적·실제적으로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변화들의 첫 징후였다. 동베를린 시의회 활동에 오랜 동안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던 동독의 공산당 중앙 정부는 자유선거로 뽑힌 국민의회 대표들에 의해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났다. 그후 서베를린 시장은 동·서 베를린 연합 행정부를 베를린 동부의 옛 시청에 유치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베를린 내 4대 승전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관할 지역들은 동·서 베를린이 공식적으로 통합된 이후 해체되었고, 베를린은 독일의 16개주(州) 중 하나가 되었다(독일사회민주당).

교육

베를린은 전통적으로 독일 교육의 중심지였다. 동베를린은 현재 훔볼트대학교가 된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를 직접 통제하는 방법으로 서베를린에 앞서 대학교육 체계를 재건했다. 동베를린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비공산주의자 대학인들은 1948년 동베를린을 떠나, 서베를린에 자유대학교를 설립했다. 자유대학교에는 설립 초기부터 독일 전국의 정치적 행동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서베를린에는 그밖에도 등록 학생수가 도합 10만 명이 넘는 3개의 주요대학교가 있다.

베를린 시내에는 중요한 도서관이 몇 개 있다. 서베를린에서는 전후 몇 년 사이에 미국 원조로 지어진 미국기념도서관과 1867년에 지어진 국립박물관인 미술도서관이 유명하다. 동베를린에서는 국립도서관이 중요한 문화·교육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

18세기 이전에는 문화적 흡인력에 있어 런던과 파리에 미치지 못했으며, 지방분권적인 독일인들의 생활방식 때문에 다른 주요수도들처럼 인재들을 독점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베를린은 문화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고, 19세기에 들어서는 '슈프레 강의 아테네'라는 별칭까지 생겨났다. 그런 별칭이 다소 과장되어 보이기는 하나 예술과 과학에 있어 베를린 시민들의 기여도는 상당했다. 1750년에 이르러 운터덴린덴 거리의 프로이센 국립 오페라 극장은 유럽 최고의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꼽혔으며, 베를린은 음악도시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18세기말부터 시작된 독일문학의 르네상스는 적어도 그 일부가 베를린에서 싹텄다.

이곳과 연관이 있는 19세기의 뛰어난 작가로는 독일 사실주의 소설을 완성한 테오도어 폰타네를 꼽을 수 있다. 그외에도 베를린에서 활약한 19세기의 유명한 작가로는 극작가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공상적인 단편소설들로 가장 널리 알려진 E.T.A.호프만이 있다.

18세기부터 이곳에서 활동한 일련의 뛰어난 건축가들이 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독일의 후기 바로크 양식을 창시한 안드레아스 슐뤼터, 프리드리히 대왕을 위해 베를린 밖에 잔소우치 궁을 건설한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 베를린 중심부를 개성있는 신고전주의풍으로 웅장하게 가꾸어낸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 등이 있다. 1810년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 베를린은 독일의 지성을 대변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는 또한 한때 라이프치히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의 출판 중심지였으나, 베를린의 출판사 거리는 전쟁중 폭격으로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19세기에 베를린은 독일의 신문발행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그 어느 대도시보다 많은 일간지를 발행하고 있다.

베를린은 제국의 전성시대보다는 오히려 그 이후 시대에 상상력이 풍부한 도시, 신화와 상징의 도시로서의 기능이 최고도에 달했다.

즉 혼란했던 1920년대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문화 및 지성의 요람으로서 그 명성을 드높였던 것이다. 많은 외국인들 눈에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비친 당시 베를린의 모습은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작품 〈노리스씨 열차를 바꿔 타다 Mr. Norris Changes Trains〉·〈베를린이여 안녕 Goodbye to Berlin〉에 잘 묘사되어 있다. 1920년대에 베를린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각종 클럽과 카바레, 그리고 기타 유흥업소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영업을 계속했다.

바이마르 시대에 찬란한 문화도시였던 베를린은 나치 정권이 철저히 붕괴되면서 연기만 자욱한 폐허도시로 변했다. 그러나 베를린은 원래의 문화적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1년 서베를린에서는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열었는데, 이 오페라 하우스는 곧 서구 최고의 오페라 극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베를린은 고전음악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베를린에는 유명한 음악 합주단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특히 1882년에 창설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극장으로는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48년 베를린에 돌아와 건립한 베를린 앙상블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외에 유명한 극장으로는 실러 극장과 슈로스파르크 극장이 있다. 베를린은 20세기초에 독일의 영화제작 중심지가 되었다. 독일에서의 괄목할 만한 영화제작 부흥운동은 1960년대부터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51년에 시작된 베를린 영화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 중 하나가 되었다.

베를린은 훌륭한 박물관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박물관들과 옛 소장품들의 일부가 동베를린 지역에 소재하게 된 관계로, 서베를린에서는 달렘 지역 내에 통틀어 달렘 박물관들이라 불리는 웅대한 새 박물관단지를 만들었다. 서베를린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에는 그 유명한 네페르티티 여왕 흉상을 비롯한 고고학적 진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라이히슈타크 빌딩 내에는 독일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든 상설 전시장이 있다.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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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원

베를린이란 지명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44년으로, 이는 뒤에 하나로 통합된 자매도시 쾰른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보다 7년 늦은 것이다.

이 두 도시는 모두 13세기초에 건설되었다. 정확한 건설시기는 알 수 없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도시 모두 슈프레 강 일대의 동서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었던 지리적·상업적 조건에 힘입어 도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들 두 도시의 건설시기는 이 지역 일대에서의 게르만족 부흥 시기와 일치하는데, 원거주민이었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그들 대신 슬라브족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들 슬라브족들은 서쪽으로부터 엘베 강을 건너온 작센족 곰왕 알브레히트 1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의 후계자들은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대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지금도 베를린 시의 상징물은 도전적 자세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검은 곰이다.

오늘날 대도시권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있는 슈판다우와 쾨페니크는 베를린·쾰른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의 추종자들이었던 아스카니아인들은 1160년 슈프레 강이 하펠 강으로 흘러드는 북부 슈판다우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232년에 이르러 도시의 자격을 획득했다. 베를린·쾰른은 북서쪽의 슈판다우와 남동쪽의 쾨페니크 사이에서 도시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1250년에 이르러 베를린·쾰른은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대인 오데르 강 동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는데, 그 지역에는 1214년에 이미 요새가 건설되었다.

베를린·쾰른은 14세기에 독일 북부의 도시들로 구성된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호엔촐레른가 시대

1411년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대는 뉘른베르크의 봉신 프리드리히 6세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베를린은 호엔촐레른가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호엔촐레른가는 15세기말부터 브란덴부르크 선거후를 지내면서 베를린·쾰른을 자신들의 행정중심지로 정해 영구 정착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거후는 1640년 권좌에 오르면서 일련의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 사업의 일환으로 강화된 요새 덕택에 스웨덴의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곳곳에 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통치기간중의 일이었다.

1709년 베를린·쾰른과 신흥도시들인 프리드리히스베르더·도로테엔슈타트·프리드리히슈타트가 단일 행정구역으로 묶이면서 대(大)베를린의 윤곽이 드러났다. 베를린의 인구는 1670년 1만 2,000명에서 1712년에는 6만 1,000명으로 증가했는데, 그 속에는 프랑스 위그노 피난민들도 포함되었다.

18세기 전반기에 베를린의 도시규모는 사방으로 확대되었다.

대왕 프리드리히 2세는 많은 건축물을 새로 지어 베를린을 아름답게 가꾸었는데,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가 죽고 난 직후인 1791년에 완성되었다. 1809년에는 학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가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교(뒤에 훔볼트대학교로 개명)를 설립했다. 이 대학교에는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공산주의의 아버지 카를 마르크스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이 모여들었다.

1838년 베를린-포츠담 철로가 개통되자 베를린은 확장된 철로망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철로 발달 시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시대와 일치한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총리로서 일련의 군사적 모험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닦았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왕이 황제 빌헬름 1세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2제국이 탄생했다. 당시의 수도 베를린은 인구 82만 6,000명에 달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독일 공화국과 히틀러

1918년 베를린은 독일 제1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1918~33년에는 독일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대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이 시기에 급등하는 인플레와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졌고,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다. 정치적·경제적 대혼란은 히틀러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32년에는 베를린 내 실업자수만도 63만 6,000명에 달했다. 이듬해 1월 31일, 히틀러는 자신의 나치 돌격대가 수많은 깃발과 횃불을 치켜들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행진을 하는 가운데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1936년 베를린에서는 10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건설된 대규모 경기장에서 사상 유례 없이 장엄한 현대 올림픽 경기가 치러졌다.

2년 후에는 또 하나의 대사건, 즉 유대인 소유의 건물 유리창이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는 데서 유래한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 돌격대에 의해 저질러진 이날 밤의 광란은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 박해의 서곡으로 당시 17만 명에 달했던 베를린 거주 유대인의 인구는 1945년에 이르러 5,000명으로 줄어들었다(나치당, 유대인).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한 인명손실은 5만 2,0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베를린 탈환전투에서는 또다시 민간인 10만 명이 사망했다. 주거단지·공장·군사시설·시가지와 문화적 건축물들이 모두 전쟁으로 파괴되어 모래 평원으로 변해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 전체인구의 무려 70%가 여성들이었으며, '잡석 여성들'(Trümmerfrauen)이라 불린 여성들이 폭격 이후 거리를 가득 메운 쓰레기더미들을 치웠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총리 관저 지하에 건설해놓은 자신의 벙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5년 5월 8일 소련 당국은 베를린에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독일의 항복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바로 그 전날 프랑스 랭스에서 연합국에 의해 거행된 독일의 항복식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연합국과 소련에 의해 각각 분리되어 진행된 이 독일 항복식은 전후 동서 양 진영 사이에 형성될 냉전의 초점, 즉 베를린 시가 겪게 될 드라마의 서곡이었다.

분리된 베를린

1920년 10월 1일 7개 행정구와 59개 농촌 공동체, 그리고 27개 사유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대도시 베를린이 탄생했다.

그결과 베를린 시는 20개 행정구로 구성된 대도시가 되었는데, 각 행정구는 베를린 시로 편입된 이후에도 대부분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말 소련은 8개 행정구, 미국은 남부의 6개 행정구, 영국은 티르가르텐 공원의 중부 및 서부 행정구와 훨씬 서쪽에 있는 3개 행정구, 그리고 프랑스는 북부의 2개 행정구를 각각 점령했다. 이같은 베를린 시의 분할 점령은 1944년 런던에서 미국·영국·소련 간에 맺어진 협정에 기초한 것으로, 독일을 몇 개의 점령지로 나누며 소련 점령지에 둘러싸인 대베를린을 독자적으로 나눈다는 영국의 안을 현실화한 것이었다(포츠담 회담). 베를린과 관계된 이 협정의 특징은 서방 진영이 베를린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소련의 보증을 문서로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48년 3월 서방측의 3개국은 그들의 독일 내 점령 지대를 단일 경제단위로 통합하는 데 합의했다(트리존). 소련은 이에 항의해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대표부를 철수했다(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1948년 6월 서방 진영은 서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서부 점령지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소련은 이에 반발해 서베를린에 대한 육상봉쇄를 결행했다. 서방 연합국은 183만 1,200t의 식량·석탄·생필품을 극적으로 서베를린에 긴급 공수함으로써 생필품 보급을 차단하려는 소련의 시도를 분쇄했다.

1949년 5월 12일 소련은 서베를린에 대한 육상봉쇄를 철회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그해 9월까지 공중보급작전을 계속해 생필품 1년분을 서베를린에 공수했다. 소련은 그후에도 가끔씩 서베를린에 대한 단기간의 육상봉쇄를 단행해서 서방 진영을 괴롭혔다. 1948년 11월 30일 동베를린에는 자체 시장(市長)을 둔 별도의 시 행정조직이 수립되었으며, 이로써 베를린은 완전히 동서로 분리되었다.

1961년 8월 서베를린은 철조망이 얹혀진 장벽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베를린과 분리되었고, 둘러쌓은 철조망 울타리와 그 사이사이에 우뚝 솟은 감시탑들에 의해 다른 동독지역과도 완전 분리되었다(베를린 장벽). 밤에는 길이 166km에 달하는 방책 전구역에 불이 밝혀졌다.

소형자동차와 도보에 의한 순찰이 정기적으로 행해졌고, 눈으로 감시하기 어려운 지역들에서는 긴 가죽끈에 매달린 훈련견들을 이용해 순찰이 이루어졌다. 베를린 장벽은 그것이 갑자기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계속 증축되어 그 높이가 약 3.7m에 달했다.

장벽으로 인해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나 독일의 동쪽 및 남쪽과 접경해 있는 이웃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변화는 동독인들에게 간접적 탈출 경로를 제공했는데, 특히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들어간 후 서독으로 가는 경로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동서 양 진영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영국·프랑스는 1971년 소련과 베를린 협정을 맺었다. 서방인들이 보다 쉽게 서베를린을 출입하고, 서독 및 서베를린인들이 장벽 너머 동독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베를린 협정의 세부 실천조항들은 동·서독 정부 당국자들에 의해 직접 작성되었다.

이 베를린 협정이 발효되자 서독 및 서베를린인들은 대거 동독으로 몰려들었고, 1988년 동독 방문 건수는 900만, 자동차 및 열차편을 이용해 서베를린을 오고간 통과여행 건수는 2,700만에 달했다.

그러나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이러한 점진적 개선책들은 특히 체제 속에 갇혀 지내는 동독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너무도 미흡한 것이었다. 1989년 가을,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전지역에서는 수십만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 정권 타도 및 서독과의 재통합을 외쳐댔다.

같은 해 11월 9일 동·서 베를린을 가르고 있던 모든 벽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빠른 속도로 철거되었다. 이날 이후 3일간 200만이 넘는 동베를린 및 동독인들이 자동차·도보·지하철·고가철도 등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동독 임시정부는 서베를린 및 서독인들에 대해 자유로운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했고, 1990년 1월 1일에 이르러 동·서 베를린 간의 대규모 인구이동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1990년 중반에 베를린 시 중앙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나란히 뻗어 있던 장벽을 포함한 전구역의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었다(독일 통일). 또한 새로운 검문소들이 생기면서 베를린은 실제적인 단일도시가 되었다.

동·서독 재통합을 다룬 협약 조항에 따라 베를린은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6월 20일 재통일된 독일의 의회는 독일 정부를 베를린으로 옮긴다는 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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