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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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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이란 지명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44년으로, 이는 뒤에 하나로 통합된 자매도시 쾰른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보다 7년 늦은 것이다.

이 두 도시는 모두 13세기초에 건설되었다. 정확한 건설시기는 알 수 없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도시 모두 슈프레 강 일대의 동서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었던 지리적·상업적 조건에 힘입어 도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들 두 도시의 건설시기는 이 지역 일대에서의 게르만족 부흥 시기와 일치하는데, 원거주민이었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그들 대신 슬라브족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들 슬라브족들은 서쪽으로부터 엘베 강을 건너온 작센족 곰왕 알브레히트 1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의 후계자들은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대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지금도 베를린 시의 상징물은 도전적 자세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검은 곰이다.

오늘날 대도시권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있는 슈판다우와 쾨페니크는 베를린·쾰른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의 추종자들이었던 아스카니아인들은 1160년 슈프레 강이 하펠 강으로 흘러드는 북부 슈판다우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232년에 이르러 도시의 자격을 획득했다. 베를린·쾰른은 북서쪽의 슈판다우와 남동쪽의 쾨페니크 사이에서 도시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1250년에 이르러 베를린·쾰른은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대인 오데르 강 동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는데, 그 지역에는 1214년에 이미 요새가 건설되었다.

베를린·쾰른은 14세기에 독일 북부의 도시들로 구성된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호엔촐레른가 시대

1411년 브란덴부르크 변경지대는 뉘른베르크의 봉신 프리드리히 6세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베를린은 호엔촐레른가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호엔촐레른가는 15세기말부터 브란덴부르크 선거후를 지내면서 베를린·쾰른을 자신들의 행정중심지로 정해 영구 정착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거후는 1640년 권좌에 오르면서 일련의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 사업의 일환으로 강화된 요새 덕택에 스웨덴의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곳곳에 운하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통치기간중의 일이었다.

1709년 베를린·쾰른과 신흥도시들인 프리드리히스베르더·도로테엔슈타트·프리드리히슈타트가 단일 행정구역으로 묶이면서 대(大)베를린의 윤곽이 드러났다. 베를린의 인구는 1670년 1만 2,000명에서 1712년에는 6만 1,000명으로 증가했는데, 그 속에는 프랑스 위그노 피난민들도 포함되었다.

18세기 전반기에 베를린의 도시규모는 사방으로 확대되었다.

대왕 프리드리히 2세는 많은 건축물을 새로 지어 베를린을 아름답게 가꾸었는데,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가 죽고 난 직후인 1791년에 완성되었다. 1809년에는 학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가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교(뒤에 훔볼트대학교로 개명)를 설립했다. 이 대학교에는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공산주의의 아버지 카를 마르크스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이 모여들었다.

1838년 베를린-포츠담 철로가 개통되자 베를린은 확장된 철로망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철로 발달 시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시대와 일치한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총리로서 일련의 군사적 모험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닦았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왕이 황제 빌헬름 1세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2제국이 탄생했다. 당시의 수도 베를린은 인구 82만 6,000명에 달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독일 공화국과 히틀러

1918년 베를린은 독일 제1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1918~33년에는 독일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대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이 시기에 급등하는 인플레와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졌고,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다. 정치적·경제적 대혼란은 히틀러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32년에는 베를린 내 실업자수만도 63만 6,000명에 달했다. 이듬해 1월 31일, 히틀러는 자신의 나치 돌격대가 수많은 깃발과 횃불을 치켜들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행진을 하는 가운데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1936년 베를린에서는 10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건설된 대규모 경기장에서 사상 유례 없이 장엄한 현대 올림픽 경기가 치러졌다.

2년 후에는 또 하나의 대사건, 즉 유대인 소유의 건물 유리창이 모두 산산이 부서졌다는 데서 유래한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 돌격대에 의해 저질러진 이날 밤의 광란은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 박해의 서곡으로 당시 17만 명에 달했던 베를린 거주 유대인의 인구는 1945년에 이르러 5,000명으로 줄어들었다(나치당, 유대인).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한 인명손실은 5만 2,0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베를린 탈환전투에서는 또다시 민간인 10만 명이 사망했다. 주거단지·공장·군사시설·시가지와 문화적 건축물들이 모두 전쟁으로 파괴되어 모래 평원으로 변해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 전체인구의 무려 70%가 여성들이었으며, '잡석 여성들'(Trümmerfrauen)이라 불린 여성들이 폭격 이후 거리를 가득 메운 쓰레기더미들을 치웠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총리 관저 지하에 건설해놓은 자신의 벙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5년 5월 8일 소련 당국은 베를린에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독일의 항복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바로 그 전날 프랑스 랭스에서 연합국에 의해 거행된 독일의 항복식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연합국과 소련에 의해 각각 분리되어 진행된 이 독일 항복식은 전후 동서 양 진영 사이에 형성될 냉전의 초점, 즉 베를린 시가 겪게 될 드라마의 서곡이었다.

분리된 베를린

1920년 10월 1일 7개 행정구와 59개 농촌 공동체, 그리고 27개 사유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대도시 베를린이 탄생했다.

그결과 베를린 시는 20개 행정구로 구성된 대도시가 되었는데, 각 행정구는 베를린 시로 편입된 이후에도 대부분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말 소련은 8개 행정구, 미국은 남부의 6개 행정구, 영국은 티르가르텐 공원의 중부 및 서부 행정구와 훨씬 서쪽에 있는 3개 행정구, 그리고 프랑스는 북부의 2개 행정구를 각각 점령했다. 이같은 베를린 시의 분할 점령은 1944년 런던에서 미국·영국·소련 간에 맺어진 협정에 기초한 것으로, 독일을 몇 개의 점령지로 나누며 소련 점령지에 둘러싸인 대베를린을 독자적으로 나눈다는 영국의 안을 현실화한 것이었다(포츠담 회담). 베를린과 관계된 이 협정의 특징은 서방 진영이 베를린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소련의 보증을 문서로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48년 3월 서방측의 3개국은 그들의 독일 내 점령 지대를 단일 경제단위로 통합하는 데 합의했다(트리존). 소련은 이에 항의해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대표부를 철수했다(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1948년 6월 서방 진영은 서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서부 점령지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소련은 이에 반발해 서베를린에 대한 육상봉쇄를 결행했다. 서방 연합국은 183만 1,200t의 식량·석탄·생필품을 극적으로 서베를린에 긴급 공수함으로써 생필품 보급을 차단하려는 소련의 시도를 분쇄했다.

1949년 5월 12일 소련은 서베를린에 대한 육상봉쇄를 철회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그해 9월까지 공중보급작전을 계속해 생필품 1년분을 서베를린에 공수했다. 소련은 그후에도 가끔씩 서베를린에 대한 단기간의 육상봉쇄를 단행해서 서방 진영을 괴롭혔다. 1948년 11월 30일 동베를린에는 자체 시장(市長)을 둔 별도의 시 행정조직이 수립되었으며, 이로써 베를린은 완전히 동서로 분리되었다.

1961년 8월 서베를린은 철조망이 얹혀진 장벽에 의해 물리적으로 동베를린과 분리되었고, 둘러쌓은 철조망 울타리와 그 사이사이에 우뚝 솟은 감시탑들에 의해 다른 동독지역과도 완전 분리되었다(베를린 장벽). 밤에는 길이 166km에 달하는 방책 전구역에 불이 밝혀졌다.

소형자동차와 도보에 의한 순찰이 정기적으로 행해졌고, 눈으로 감시하기 어려운 지역들에서는 긴 가죽끈에 매달린 훈련견들을 이용해 순찰이 이루어졌다. 베를린 장벽은 그것이 갑자기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계속 증축되어 그 높이가 약 3.7m에 달했다.

장벽으로 인해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나 독일의 동쪽 및 남쪽과 접경해 있는 이웃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변화는 동독인들에게 간접적 탈출 경로를 제공했는데, 특히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들어간 후 서독으로 가는 경로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동서 양 진영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영국·프랑스는 1971년 소련과 베를린 협정을 맺었다. 서방인들이 보다 쉽게 서베를린을 출입하고, 서독 및 서베를린인들이 장벽 너머 동독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베를린 협정의 세부 실천조항들은 동·서독 정부 당국자들에 의해 직접 작성되었다.

이 베를린 협정이 발효되자 서독 및 서베를린인들은 대거 동독으로 몰려들었고, 1988년 동독 방문 건수는 900만, 자동차 및 열차편을 이용해 서베를린을 오고간 통과여행 건수는 2,700만에 달했다.

그러나 동·서독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이러한 점진적 개선책들은 특히 체제 속에 갇혀 지내는 동독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너무도 미흡한 것이었다. 1989년 가을,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전지역에서는 수십만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 정권 타도 및 서독과의 재통합을 외쳐댔다.

같은 해 11월 9일 동·서 베를린을 가르고 있던 모든 벽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빠른 속도로 철거되었다. 이날 이후 3일간 200만이 넘는 동베를린 및 동독인들이 자동차·도보·지하철·고가철도 등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동독 임시정부는 서베를린 및 서독인들에 대해 자유로운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했고, 1990년 1월 1일에 이르러 동·서 베를린 간의 대규모 인구이동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1990년 중반에 베를린 시 중앙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나란히 뻗어 있던 장벽을 포함한 전구역의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었다(독일 통일). 또한 새로운 검문소들이 생기면서 베를린은 실제적인 단일도시가 되었다.

동·서독 재통합을 다룬 협약 조항에 따라 베를린은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6월 20일 재통일된 독일의 의회는 독일 정부를 베를린으로 옮긴다는 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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