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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성직자들이 정치·사회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교리주의를 내세우고 특권과 부를 누리는 데 반대하는 주의.
이 용어는 12~13세기 이래 유럽에서 사용해왔지만, 이후 역사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및 그 영향,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관련이 깊다.
반성직주의에는 3가지 주요형태가 있다.
① 18세기에 발전된 것으로서 봉건제도가 성직자들에게 부여했던 부패한 특권 향유를 반대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② 자유주의의 등장과 관계가 있는데 대체로 성직자가 군주에게 맹종하거나 과학적 사고의 무지함을 비판한다.
③ 좌익이든 우익이든 전체주의 체제가 지닌 태도로서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대대로 종교는 '인종', '민족', '민주주의'에 반대하도록 성직자들이 주입해온 '민중의 아편'이라고 보았다.
개신교나 성공회가 지나친 보수성과 국가권력에 대한 맹종 때문에 자주 비난당했으나, 주요적대대상은 서방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였고 동방에서는 러시아 정교회 및 그밖의 정교회들이었다.
프랑스의 반성직주의
18세기에 볼테르나 백과전서파 같은 회의론자들은 왕의 검열과 왕에 대한 성직자들의 영향력에 분개했다. 이러한 반성직주의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가톨릭 교회들을 공격하고 그 교회들의 특권을 폐지하며 재산을 몰수하는 것에서 절정에 달했다. 180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혁명을 마무리짓고 교황청과 종교협약을 맺었으며, 프랑스 국가로부터 지원받고 국가에 복종하는 일종의 종교청으로 교회를 '국교화'했다(→ 1801년종교협약).
이 제도는 몇 번 수정을 거치면서 절대왕정, 공화정, 보나파르트 왕정으로 이어지는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1871년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성직자파와 반성직자파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1871~79년의 투쟁에서 왕당파-성직자파는 공화정파-반성직자파와 대립했다. 레옹 강베타는 "성직주의는 적이다"(le cléricalisme voilà l'ennemi)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대립에서 이긴 공화정파는 수많은 반성직 법률을 제정했다. 이 결과 예수회가 탄압을 받았으며(1880), 페리 법(1881~82)으로 세속교육·세속결혼(종교의식에 따르지 않음)이 의무화되었고, 이혼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2번째 대립은 조르주 불랑제가 독재권력을 얻으려고 한 결과 일어났는데 공화정파-반성직자파의 승리로 끝났다.
3번째 대립은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 때문에 생겼는데(1894~1906) 이때 하원의 모든 공화정파를 중심으로 반성직자파-공화정파가 결성되어 왕당파·군국주의자·성직주의자를 공직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그결과 더욱 엄격한 반성직주의 법률들이 제정되었다. 그중 단체법(1901)은 프랑스 대부분의 수도회를 탄압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분리법(1905)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다.
이탈리아의 반성직주의
라틴계 국가들에서도 프랑스에서부터 퍼져나간 반성직주의 사상 및 조처들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의 반성직주의는 민족주의·자유주의와 결합되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령을 다스리는 세속 군주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밀로 카보우르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피에몬테 의회에서 몇 차례에 걸쳐 반성직 입법을 단행하고 교회재판소의 세속 사법권을 박탈했으며, 많은 수도원을 탄압했다. 카보우르가 내건 '자유로운 국가의 자유로운 교회'라는 구호는 이탈리아 반성직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에도 성직자파와 반성직자파 사이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됨으로써 교황은 세속권력을 잃었다. 반성직주의 입법으로 수도원의 숫자가 줄었고 대학교 신학교수들은 탄압받았으며 세속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혼법은 공포되지 않았고, 학교의 종교교육도 금지되지 않았다. 또한 보장법으로 교황이 영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했다. 그러나 피우스 9세는 이탈리아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1874년 가톨릭교도가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1919년까지 이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한동안 반성직주의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파시즘이 국가에 의한 절대통제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이 종교자유 축소에 계속 반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대립이 없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의 체결로 교황이 바티칸 시티라는 작은 국가의 군주가 됨으로써 세속권력을 둘러싼 분쟁이 끝나게 되었다.
스페인의 반성직주의
스페인에서는 나폴레옹의 침략(1808)으로 반성직운동이 시작되었다. 1812년에 제정된 헌법에서는 종교재판소를 폐지하고 수도원의 숫자를 제한했으나, 가톨릭 신앙을 국교로 인정했다. 이 헌법은 1814년 페르디난드 7세가 왕권을 되찾음으로써 폐지되었다.
반성직주의파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때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의 좌우익 투쟁은 라틴 유럽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훨씬 더 성직자파와 반성직자파 사이의 갈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갈등은 1870년 이후에 더욱 격렬해졌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바르셀로나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주의자(Syndicalist)와 무정부주의자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최초의 스페인 공화국(1873)은 몇몇 반성직주의 법을 제정했으나 1875년 다시 왕정이 들어서면서 이 법들은 폐지되거나 무시되었다.
1909년 반성직주의 폭동이 일어나 군중은 교회를 불태우고 사제들을 습격했다. 이들을 진정시키는 조치로 정부는 수도원의 숫자를 제한하고 수도원이 벌인 사업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세속결혼을 의무화했다. 1931년 혁명을 통해 수립된 제2공화국에서는 반성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아서 프랑스와 비슷한 반성직 법률을 제정했다(→ 스페인 내란). 그러나 이 정부는 군중이 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사제와 수녀들이 살해당했다.
이에 맞서 가톨릭 교회는 자체적으로 군대를 소집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파는 공화국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했고, 그결과 수립된 팔랑헤 독재정부는 반성직주의 법률들을 폐지하거나 무시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은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반성직주의
19세기 이 지역 국가들의 역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독립투쟁은 프랑스 대혁명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반성직주의도 그중 하나이다(→ 라틴아메리카).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독재자들이 집권하는 험한 정치적 상황에서 반복되는 반성직주의적 조처들(종교단체, 특히 예수회에 대한 탄압, 교회재산 몰수, 세속교육 장려와 종교교육 제재, 세속결혼과 이혼 도입)이 과연 프랑스 대혁명의 지적인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여러 당파들이 정치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상황은 나라에 따라서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는 반성직주의 법률을 제정해 30년 이상(1849~84) 시행했으나 곧 가톨릭 교회에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충분한 자유와 독립'을 되돌려주었다(1888). 반면 베네수엘라의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 정부(1870~88)는 교회의 제도적인 활동을 막고 심지어 사제들의 결혼을 입법화하려고까지 했다. 훗날 일부 제재조치들이 완화되긴 했지만 반성직주의는 여전히 성행했다.
독일의 반성직주의
독일에서 반성직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프랑스 대혁명 기간의 여러 가지 사상에 힘입어 지적인 면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독일 남부에서는 '평신도 국가' 원칙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고가 발전했으며, 이는 1848년에 혁명사건들이 일어나게 한 부분적인 요인이 되었다. 또한 마르크스 사회주의가 일어남으로써 노동자 계층의 상당수가 반성직주의 진영에 가담했다.
그러나 인구가 많던 라인 강 유역의 로마 가톨릭 교도들 대부분이 입헌주의자로서 자유주의의 일부 내용에 동조했고, 사회 및 선거 개혁을 열정적으로 원했다. '중앙당' 결성으로 이어진 그들의 정치계획에는 모든 소수 종교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871년 독일 통일 직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자유주의 계획의 일부를 채택함으로써 '문화투쟁'(Kulturkampf), 즉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을 시작했다. 반성직주의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종교단체 수를 제한하고, 예수회를 금지하며, 세속결혼을 인정하고, 비협조적인 사제들을 교구에서 추방하는 것 등을 그 내용으로 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처벌받았고 일부 주교들은 폐위당했다.
1880년대에는 반성직주의 법률 대부분이 법령집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예수회에 대한 금지령은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1919~33)에는 로마 가톨릭교도에게 자유를 부여했다.
나치 독재정권(1933~45)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반성직주의 계획을 강요했다. 1933년 히틀러는 바티칸과 종교협정을 맺었으나 이 협정은 지켜진 것보다는 지켜지지 못한 것으로 유명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의 성직자 수백 명이 재판을 받고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1950년대 중반 독일의 반성직주의는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도로 구성된 기민당에 반대하는 요인이 되었다.
공산권의 반성직주의
공산정권 아래 러시아 반성직주의의 특징은 모든 종교를 적대시했다는 점이다.
소련 정부는 맨 처음 1917~18년에 모든 교회 소유 토지를 국유화하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등의 행정조치를 취한 데 이어 주교들을 체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도대주교 베니아민을 재판·처형(1922)하는 등 잔인한 박해를 가했다. 그후 교회는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고, 반종교 선전과 적극적인 박해가 번갈아 가해졌다.
1939년 소련이 발트 해 연안 국가들과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에도 심한 박해가 가해졌다. 전후 위성국가들과 동독을 점령, 종속시킨 뒤 종교활동 분야에 대해서 폭력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가혹한 탄압을 했다. 악명높은 재판을 거친 뒤 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의 고위성직자 대부분이 투옥되었다.
수많은 주교·성직자·평신도가 감옥이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종교교육·종교서적의 출판이 금지되었고, 소수의 수녀원과 수도원만이 남아 곤욕을 치렀으며 병원들도 국유화되었다. 알바니아에서는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학살당했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는 동방귀일교회(Uniate Church)가 파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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