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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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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히브리 |
요약
시나이 산에서 계약 의식을 통해 십계명을 공포해 이스라엘이라는 종교공동체를 창설했고, 이 계약의 조문들을 해석해 이스라엘의 종교적, 세속적 전통을 확립했다.
유대교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자 교사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서방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대교를 모세교 혹은 모세 신앙으로 일컫는 경우도 있다. 모세의 영향은 서구 문명의 종교생활, 도덕적 관심, 사회윤리에 이어져오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모세의 불멸의 의미가 있다. 모세는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기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명기 34장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진짜 모세가 신명기의 저자인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 의식을 통해 십계명을 공포해 이스라엘이라는 종교공동체를 창설했고, 이 계약의 조문들을 해석해 이스라엘의 종교적·세속적 전통을 확립했다. 유대교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교사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서방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대교를 모세교 혹은 모세 신앙으로 일컫는 경우도 있다.
모세의 영향은 서구 문명의 종교생활, 도덕적 관심, 사회윤리에 이어져오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모세의 불멸의 의미가 있다.
모세에 관한 역사적 문제
모세에 관한 역사적 견해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모세만큼 상이한 해석을 내리게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초기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전승들은 모세를 〈토라〉('율법' 또는 '교훈')의 저자로 간주했는데, 5경이라 불리기도 하는 〈토라〉는 〈구약성서〉의 처음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에도 보수적인 학자들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믿고 있다.
독일의 학자 마르틴 노트는 모세 저작설을 반대하는 이론을 제시해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준비하는 데는 관여했지만 성서 전승에 나타난 모세의 역할에 대해서는 극도의 회의를 나타냈다.
그는 출애굽-시나이 전승의 배후에 역사적 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서로 다른 두 집단이 이 사건을 경험한 후 별도로 이야기를 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들의 노정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는 모세를 주인공으로 하여 서로 다른 주제와 전승들을 짜맞춘 편집자의 작품이며, 실제로 모세는 모압 출신으로서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성서고고학자이며 역사학자인 W. F. 올브라이트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마르틴 노트의 이 논문은 극단적인 두 주장 사이에서 중도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출애 1 : 8~신명 34 : 12)의 골자를 수용하면서도 수세기 동안 구전전승과 문서전승을 거치면서 본래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첨가되어 층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비평을 통해 5경의 문서자료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 자료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문학비평 이외에 문학양식, 구전, 문체, 편집, 고고학 등의 관점에서 성서 본문을 연구하는 다른 비평적 방법들도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다양한 계열의 증거들을 수렴할 때 성서비평 문제에 대해 가장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작업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자료들이 개략적이기 때문에 모세라는 인물에 대해 큰 윤곽만을 그릴 수 있다.
모세의 활동 연대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의 부모는 이집트에서 히브리라고 불렸던 여러 집단들 가운데 하나인 레위 지파 출신이었다고 한다.
히브리라는 용어는 본래 종족이나 인종과는 무관한 용어로서 하피루(Ḫapiru : 또는 Apiru)의 변형철자인 하비루(Habiru)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하피루는 여러 가지 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던 민중계급을 가리킨다. 성서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았으나,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파라오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이 이집트 왕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이 왕의 신원에 대해서도 학자들간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따라서 모세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들이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도 합의점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한 해로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는 〈열왕기 상〉 6장 1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솔로몬 치세 4년, 곧 BC 960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출애굽 사건은 BC 1440년에 일어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같은 결론은 성서 및 고고학의 증거와는 차이가 있다.
히브리인들은 파라오를 위해 곡물을 저장하는 피톰(비돔)과 람세스 도성을 건설했는데, 이 도성들은 이집트 삼각주의 북동쪽에 있었다. 히브리인들이 살았던 이 지역은 고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성서의 이야기는 파라오의 궁전과 수도가 이 지역에 있었다고 암시하고 있지만, 투트모세 3세(BC 1440년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 지역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테베를 수도로 삼았고, 삼각주 지역에서는 거대한 건축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더욱이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에돔과 모압의 동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요르단 동편의 소왕국들이었던 에돔과 모압은 이때만 해도 아직 세워져 있지 않았다. 끝으로, 히브리인들은 피톰과 람세스를 정복하여 파괴했다고 주장하는데, 발굴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 도성들의 파괴는 BC 1400년이 아니라 BC 1250년에 일어났다.
전승은 모세로부터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12세대가 흘렀다고 그 숫자를 명기한다.
그런 만큼 480년은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은 편집자의 언급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1세대는 실제로 25년 정도이기 때문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해는 BC 1290년경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출애굽(출애 1 : 2~2 : 23) 때의 포악하기로 이름난 파라오는 세티 1세(BC 1318~1304 재위)였고, 출애굽이 진행되는 동안의 파라오는 람세스 2세(BC 1304경~1237경)였다.
따라서 모세의 출생은 BC 14세기 말엽으로 추정된다.
생애와 활동
형성기
히브리인들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이 취했던 조치 가운데 하나는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벱(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다른 자식들은 아론과 미리암이었음)은 3개월 동안 모세를 감추어 두었으나 결국 역청과 송진을 바른 갈대 바구니에 그를 담아 나일 강에 띄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목욕중이던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이집트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전승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아무튼 그의 이름은 이집트어 모세(물에서 '태어났다'라는 뜻)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 이름은 투트모세('[신] 토트가 태어났다'는 뜻) 같은 이름에도 나타난다.
원래 모세의 이름은 더 긴 것이었지만 신을 가리키는 부분은 삭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세는 히브리 민중에게 되돌아왔을 때 이처럼 개명했거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라는 단축된 형태의 이름은 그 당시에 매우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모세가 궁정에서 보낸 세월에 대해 아무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이룩한 업적을 살펴보면, 종교·세속·군사 문제에 관해 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집트는 가나안(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를 지배했고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 접촉했으므로, 모세는 고대 근동 지방의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육을 받는 동안 그는 어떤 경로로든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히브리 민중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때문에 그들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모세는 120년을 살았고, 파라오와 대결했을 때는 80세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히브리인들을 보러 갔을 때 몇 살이었는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후대의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 전승은 모세가 이집트 궁정에서 40년 동안 머물렀고, 40년 동안 미디안에서 보냈으며, 40년 동안 광야를 편력했다고 한다. 모세는 25세가 되었을 무렵 히브리 민중을 살피러 여행을 떠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때 그는 히브리인들이 억압적인 조치 아래서 고역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한 이집트인 근로감독자가 어떤 히브리인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그 히브리인은 죽었을 것임) 모세는 정의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모세는 그 잔인한 이집트인 감독자를 죽여버렸다. 그는 궁정에 사는 왕자로서 훌륭한 신체적 조건을 갖추었을 것이며, 최근에 개발된 격투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날 모세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히브리 민중에 대한 하나의 위협을 제거한 그는 그들을 다시 돕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그는 히브리인 2명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떼어놓은 후 모세는 화해시킬 생각으로 잘못한 사람을 나무랐다.
그때 그는 2가지 반문을 받고 충격을 받고 말았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이듯이 나를 죽일 작정이오?" 스스로 구원자임을 자처한 모세는 자신감을 잃고 공포에 휩싸였다. 히브리 민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파라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미디안(아라비아 북서부지역)으로 갔다.
미디안에서의 모세
성서의 이야기는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사실만을 언급할 뿐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전하지 않는다.
이집트 궁정 관리 시누헤(BC 1960년 이집트 궁정에서 도망쳤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옴)처럼 모세는 '통치자의 벽'을 몰래 통과했음에 틀림없다. 통치자의 벽은 동쪽 국경선에 세워진 일련의 요새이며, 그 요새가 있던 곳에 오늘날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어 있다. 모세는 그곳을 지나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광야를 통과했다. 불행하게도 성서는 모세가 미디안의 어느 지역에서 거주했는가를 자세히 밝히지 않는다.
미디안 본토는 아카바 만 동부지역이었다. 그곳은 아라비아의 헤자즈 북부지역이다. 그러나 미디안 부족들 가운데 일부는 아라바 협곡(사해 남쪽의 대협곡)을 가로질러 시나이 반도 동쪽 지역과 남부지역에 정착했다는 증거가 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가 한 우물가에서 쉬고 있을 때 미디안족의 사제인 이드로의 7명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우물로 왔다고 한다. 그때 다른 목동들이 왔다. 그들은 그들이 기르는 양떼에게 물을 주기 위해 이드로의 딸들을 쫓아냈다. 모세는 다시 한번 전사로서의 용기와 힘을 과시해 그 목동들을 공격해 쫓아버렸다(이드로의 딸들도 이에 합세했을 것임). 이 일로 모세는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마침내 7명의 딸들 가운데 시뽀라(십보라)와 결혼했다.
이드로의 양떼를 책임지게 된 모세는 풀밭을 찾아 광야를 떠돌아다녔다.
어느날 산자락에서 타오르는 가시덤불을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가시덤불은 불에 타면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전에도 불꽃과 같은 꽃들이 현란하게 피어 있는 가시덤불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 것은 그 가시덤불들과는 달랐다. 그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그 가시덤불을 향했다.
그러나 움직이기도 전에 그는 더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므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불타는 가시덤불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중요한 것은 모세가 신과 만나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을 자처한 이 신은 모세에게 히브리인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해내라고 명령했다. 옛날에 그는 자기의 동족을 나름대로 열심히 도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지금 그는 자신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나타낸다.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마음은 두려움이었다. 그는 세티 1세로부터 도망쳤는데, 지금에 와서 람세스 2세와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차 이 산에서 모세 자신과 히브리인들이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언했다. 그러자 모세는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조상들의 신은 대부분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나 엘 샤다이('산의 신' 또는 '전능하신 하느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신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은 야훼(여호와)라고 알려주었으며, 앞으로 이 새로운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존재한다'는 동사의 사역동사 형태인 야훼는 '창조하는(존재하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모세는 이 계시를 받고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이 자연과 세상의 민족들에 대해 주권을 가진 분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차례 다짐을 받고 나서도 모세는 야훼의 소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내세우며 짐을 벗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야훼는 모세의 약점을 인정해 그에게 말을 잘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이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모세는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해 야훼에게 간구했다.
"오, 나의 주여, 간구하노니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야훼는 모세에게 화를 내면서도 뜻을 꺾지 않았다. 모세는 야훼의 대리자가 될 것이고, 황금의 혀를 가진 모세의 형 아론은 야훼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모세는 아론이 야훼의 예언자로 일한다는 조건으로 파라오에 대해 하느님의 역할을 대행하기로 작정했음이 분명했다. 그는 이드로에게 가서 이집트에 있는 자신의 동족을 방문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신이 야훼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모세와 파라오
람세스 2세는 10대에 왕이 되어 67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히타이트족(헷족)을 정복하고 시리아 전역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재위 5년째 되는 해 람세스 2세는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에서 히타이트족의 함정에 빠졌다. 그 함정은 카데시(가데스)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단호한 결정을 내려 탈출하기는 했지만, 그의 목표에 비추어 보면 전투는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람세스는 다른 모든 파라오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신이라고 자처했다(신성한 왕권). 그러므로 패배는 람세스가 히타이트족을 혼자 힘으로 정복한 대승리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의 상처받은 자아는 이집트 전역에서 대규모 건설사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끝내기도 전에 자신의 성공을 자랑했다. 그는 수많은 벽면에 자신의 성공을 기리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모세와 아론이 람세스를 만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의 백성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한 것은 카데시의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안 되었을 때였다. 인간의 모습을 띤 신임을 자처했던 람세스는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신들의 명령을 받는 법이 없었으며, 야훼처럼 알려져 있지도 않은 신에게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는 반문했다. "야훼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자아를 가지고 야훼를 불신하는 왕과, 야훼와 그의 능력을 새롭게 이해한 예언자 사이에 오랫동안 투쟁하는 국면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람세스는 히브리인들에게 벽돌을 만드는 데 사용할 지푸라기를 모으도록 하되 과거와 똑같이 1일생산량을 채우게 하는 악랄한 계획을 세워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을 가중시켰다.
히브리인들 가운데 일부는 모세를 거부했다. 좌절감을 느낀 모세는 야훼에게 "당신은 왜 나를 보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모세의 의심은 야훼가 파라오에게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하자 사라졌다. 재앙의 이야기와 관련해 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에 3가지 자료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2가지 전승만을 구별한다.
과거의 비평가들은 재앙 가운데 일부만이 역사적인 핵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으며, 현재와 같은 이야기들은 신앙심에 의해 각색된 환상적인 이야기들이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의 한 학파는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재앙들이 역사적인 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학파의 해석에 따르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일 강이 이례적으로 크게 범람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백나일 강은 중앙 아프리카 동부의 호수지역(지금의 우간다 지역)에서 발원한다. 강물의 흐름은 적도지방에 일정하게 내리는 비 때문에 1년 내내 변동이 없다. 그러나 청나일 강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상류에서 발원하는데, 이 강은 얕은 시내처럼 흐르기도 하고 포효하는 급류가 되어 흐르기도 한다. 모세가 람세스와 협상하고 있을 때 에티오피아에 상당히 많이 내린 여름비가 산비탈의 분가루 같은 연홍색 흙을 씻어냈다.
핏빛과도 같은 붉은색 급류는 타나 호수 지역 주위에서 연홍색 편모충과 박테리아를 함유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댐이 없었기 때문에 나일 강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핏빛으로 물든 채 흘렀다. 이 물줄기는 8월에 나일 강 삼각주지역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희귀한 자연현상은 그 다음해 3월까지 일련의 재앙이 계속 일어나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마련한 셈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던 몇 개월 동안 모세는 람세스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기 위해 피 재앙, 개구리 재앙, 모기 재앙, 등에 재앙, 가축전염병 재앙, 피부병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어둠의 재앙과 장자의 죽음 등 10가지 재앙을 내렸다.
처음에 왕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는 노예들은 히브리인들만이 아니었다. 만일 람세스가 히브리인들이 나가는 데 합의한다면, 다른 집단들도 똑같은 특권을 요구할 것이다. 건설 계획을 차질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노예들의 반란을 처음부터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재앙의 결과를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야훼의 권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질서를 회복하려는 임시방편으로 그는 히브리인들이 고센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람세스는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국경선에서 야훼에게 제사를 드려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로 3일 동안 여행하여 도착한 곳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주장했다. 파라오는 이에 대응하여 히브리인 장정들은 가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이 제안도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은 모두 나가게 하겠다고 제안하고, 다만 그들이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보장책으로 가축들을 놓고 가라고 했다.
모세는 이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파라오는 모세를 쫓아냈다. 파라오와 9차례 협상이 끝났어도 히브리인들의 해방은 가시화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회의와 좌절에 빠지곤 했던 과거와는 달리 모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파라오가 굴복하고 말리라는 내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세와 출애굽
〈출애굽기〉 11~14장은 매우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이다. 전승들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전하기도 한다. 드라마의 윤곽은 이제까지의 것보다 모호하다.
이 자료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도 매우 다양하다. 자기 아들이 죽자 파라오가 충격을 받아 히브리인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는 전승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의 전승자료는 모세가 맏아들을 위한 애도의 기간을 이용해 이집트로부터 은밀하게 도망쳤다고 전한다.
경위야 어떻든 파라오가 군대를 풀어 히브리인들을 추격하게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히브리어 본문을 해석한 후대의 한 전승은 약 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났다고 주장하지만, 비평 방법에 의거해 이 본문을 해석하는 학자들은 그 수효를 1만 5,000명 정도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집트 군대는 히브리인들을 갈대(파피루스) 바다로 몰았다. 히브리인들은 갈대 바다 때문에 동쪽으로 탈출할 수 없었다.
후대의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이 바다가 홍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 잘못된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영역 성서에서조차 이 잘못된 해석이 버젓이 반영되어 있는 형편이다. 갈대 바다의 위치에 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려 있다. 파피루스는 깨끗한 물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갈대 바다의 위치는 이집트 북동쪽 끝의 얕은 호수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집트 군대에 의해 포위된 히브리인들은 모세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한 전승에 의하면, 모세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물 안에 휩싸여 야훼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또다른 전승은 모세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그들에게 침착을 되찾아 야훼의 구원활동을 지켜보라고 외쳤다고 전한다. 밤새도록 강한 동풍이 불자 호수를 관통하는 마른 통로가 형성되었고, 히브리인들은 이 통로를 통해 갈대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이집트 추격대는 갈대 바다에 다시 물이 차들어오자 괴멸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자연현상이 절묘한 시점에 일어나자 파라오는 마침내 "도대체 야훼는 누구인가?" 하는 오만불손한 물음을 던졌다.
바다 건너편으로 무사히 건너간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은 히브리 민중을 선도하여 야훼를 향해 승리의 찬가(출애 15 : 1~21)를 불렀다. 이 시의 문체는 BC 14세기 가나안 문학의 문체와 흡사하다. 여러 모로 살펴볼 때, 사실상 이 시의 본래 형태는 "야훼를 향해 노래해라. 그 분은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신 분, 말과 병거를 바다에 처넣으셨도다"라는 내용의 후렴구이다.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의 여행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야발 무사를 향한 남부 여행로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야발 무사는 전통적으로 시나이 산(호렙 산)이 있던 곳으로 생각되어왔으며, 시나이 반도의 남쪽 끝 화강암 산맥 가운데 있다. 그곳까지 여행하는 동안 히브리인들은 매우 황량한 광야지대를 몇 차례 가로질러야 했다. 모세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다는 히브리인들의 극렬한 불평에 직면했다. 그러나 마침내 히브리 민중을 '하느님의 산'으로 데리고 왔는데, 야훼는 이미 그 산에서 불타는 가시덤불을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적이 있다.
모세와 시나이 계약
BC 14세기 내내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이웃 민족의 통치자들과 수많은 협정을 맺었다.
그것은 평등한 협정이 아니라 히타이트 왕(宗主)과 그에게 예속된 통치자(封臣) 사이의 협정이었다. 서문에서 히타이트 왕은 자신을 조약인준자인 '대왕'으로 지칭한다. 그 다음에는 히타이트의 종주와 그의 봉신 사이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개관된다. 대군주가 신하에게 친절함을 보였다는 사실이 특별히 부각되는데, 이것은 조약의 조문들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봉신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봉신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충성의 서약이다.
그당시의 국제 정치에서 이집트는 히타이트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이집트의 궁정 생활을 통해 히타이트의 조약문 양식을 배웠을 것이다.
〈출애굽기〉 19장과 20장은 야훼가 무시무시한 바람으로 시나이 산에 나타났다고 전한다. 이 야훼의 현현(顯現)은 모세에게는 불타는 가시덤불과 똑같은 계시경험이었다.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히타이트의 조약이 야훼와 히브리인들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훼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야훼의 사랑과 관심에 대해 합당한 응답을 하는 길은 야훼의 뜻에 복종하겠다고 서약하는 것뿐이다. 학자들은 십계명(시나이 계시의 일부)이 가나안 정복 이후에 공포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십계명이 농경문화에서 유래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십계명 안에 하나도 없다. 십계명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의식을 거행할 때 반포된 조문들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야훼는 유일한 참 하느님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첫째 계명이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한 금령이 된 것은 당연하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신 이해가 유일신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그것이 후기에 발전된 철학적 유일신론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이 인정하는 신들은 그 누구든 야훼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실천적 유일신론이다. 야훼는 그 신들을 존재하게 했고 야훼가 주재하는 회의에 그 신들이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는 모든 신들과 민족들을 지배하는 주(主)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신들의 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라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본래 야훼 자신의 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이나 형상이 없는 예배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모세의 금령은 확실히 독특하다. 야훼는 형상을 그릴 수 없는 신이며, 따라서 물질적인 형태로 재현될 수 없다. 야훼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계시했다. 그러므로 십계명이 야훼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거나 비윤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적절한 조치였다.
다른 계명들의 바탕을 이루는 관념들이 그당시의 종교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계명들은 야훼의 거룩하고 정의로운 성격 때문에 매우 높은 수준의 계명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계약의 백성이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섬기는 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훼의 피조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간음·도둑질·거짓말·탐욕은 정당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짓을 하면 공동체는 혼돈에 빠져 붕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야훼는 이집트에서 힘없는 히브리인들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그들도 고아, 과부, 거류민들, 그들의 사법권 아래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의 규정에 따라 살아가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계명들을 해석해야 했다. 모세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되는 법령들을 공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법령의 대부분을 그당시의 판례법에서 끌어왔다.
아마 그는 '만남의 장막'(진 바깥에 설치된 검소한 성소)에서 어떤 법령들을 선택해 적용할 것인가를 숙고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야훼는 모세에게 '얼굴을 맞대고 친구에게 말하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계약이 이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속죄의 수단이 강구되어야 했다. 이것은 제사와 예배에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사제들이 임명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전승에 따라 생각해보면, 히브리 제의의 원리들은 시나이 계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동체의 민사 문제를 관장하는 재판제도와 심문제도를 수립했다.
시나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12지파로 조직되었던 것 같다. 모세의 가장 두드러진 품성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인들이 완고하고 반역적인 행동을 일삼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옛 신앙으로 되돌아가 수송아지(성서의 본문이 전하는 바와는 달리 이 송아지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듯함)를 섬겼을 때 야훼는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모세와 그의 후손들과 새출발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세는 야훼의 제안을 거부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면서 모세는 만일 야훼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을 야훼가 쓴 기록에서 삭제해달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시나이를 떠난 후의 모세
〈민수기〉에 따르면, 시나이 산을 떠난 후 모세는 더 많은 저항과 좌절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스(에티오티아)의 여인을 2번째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그의 정력은 쇠퇴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미리암은 아론의 지원을 받아 이 결혼에 반대했다. 바란 광야의 카데시에서 정찰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정탐꾼들은 정탐을 끝내고 되돌아와서 주로 비관적인 보고를 했다. 이 정탐 보고는 북쪽으로 행군해 가나안을 정복하려는 모세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취하려는 조치를 재고하도록 촉구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야훼에게 중보기도를 드렸다. 왜냐하면 야훼는 그들을 멸망시키고 또하나의 더 큰 민족을 세우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분노가 자비를 능가하는 경우가 모세에게 단 1번 일어났다고 한다. 므리바(바란의 카데시 지역에 위치한 듯함)에서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을 반역자라고 칭하고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바위를 2번 쳤다. 그러자 목이 마른 백성들에게 물이 솟아났다. 그는 그 전에도 진노를 터뜨린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야훼의 이름과 명예,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쟁을 일삼는 백성에 대한 극심한 좌절 때문에 화를 냈다. 야훼가 모세의 가나안 진입을 허락하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 과실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모세가 계속되는 압력하에서도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요르단 동편에서 에돔과 모압은 그곳을 지나게 해달라는 모세의 청을 거절했다. 에돔과 모압은 미디안의 속국으로서 그당시 새로 창설된 국가였다. 모세는 현명하게도 에돔과 모압의 동쪽으로 돌아갔고, 아모리 족의 왕 시혼과 바산의 왕 옥을 공략했다. 모세는 일부 지파들이 요르단 동편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에 대해 모압족과 미디안의 대군주는 반발했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저주하기 위해 시리아의 점술가인 발람을 고용했다. 그러나 발람은 도리어 히브리인들을 축복했다.
일부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발람이 야훼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발람은 나중에 옛 신앙으로 되돌아갔음이 분명하다. 성서의 전승에 따르면, 발람은 과거의 고용주들에게 히브인들을 종교적으로 유혹해 그 힘을 약화시키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죽기 직전 미디안족에 대한 거룩한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어 그들의 적대감을 응징했다. 모세는 광야 편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시나이 계약을 갱신했다. 이것이 모세가 마지막으로 행한 공적인 활동이다.
모세는 요르단 협곡의 진영에서 나와 피스가(비스가)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히브리인들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고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비밀에 싸여 있다. 전승에 따르면, 야훼는 모세를 벱브올 건너편 계곡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를 기념하는 성지이다.
모세에 대한 평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모세의 모습은 더 분명해지겠지만 모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문헌 자료에서 비롯된다. 성서에는 모세가 문자로 기록을 남겨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5차례 나온다(출애 17 : 14, 24 : 4, 34 : 27~28, 민수 33 : 2, 신명 31 : 9, 31 : 24~26). 이 기록의 분량을 넉넉하게 잡는다 해도 그것은 5경 전체의 1/5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5경 전체를 모세가 저작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다.
모세는 십계명을 정식화했고, 계약을 중재했으며, 계약 법조문들을 보완하고 해석하여 조문화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가 일부의 기록을 보관했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기록들은 점점 더 방대해진 율법과 전승의 핵이 되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히브리 성서의 처음 5권은 모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세가 없었다면 이스라엘도 없었을 것이고, 토라라는 이름의 모음집도 없었을 것이다.
모세는 재능이 뛰어나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성은 야훼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야훼와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말을 더듬는 살인자였던 모세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자비로운 야훼의 은총으로 인해 생명을 유지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모세는 이해력이 깊었고,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야훼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용서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이 야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히브리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대행자로서 그는 그들의 예언자·지도자였고, 계약의 중재자로서 공동체의 창시자였다. 또한 계약의 해석자로서 조직가·법률가였고,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자로서 그들의 사제였다. 모세는 재능과 은총의 특수한 결합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아론의 아들 엘르아잘이 그렇게 해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모세에 미치지 못했다.
후대의 예언자들은 모세의 정신으로 예언한 위대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은 모세만큼 많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전승이 전하는 바와 같이 그는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고, 역사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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