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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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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1426 |
국적 | 이집트 |
요약 이집트 제18왕조의 왕(BC 1479~1426 재위).
개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여겨지는 왕이다.
노련한 전사로서 시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미탄니 왕국을 무찔렀으며, 나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수단 지방의 나파타까지 뚫고 들어가 이집트 제국의 번영을 절정에 올려놓았다. 또한 자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신전과 기념비를 세웠다(신왕국).
어린시절
투트모세 2세의 아들로 어머니는 첩인 이시스였다.
투트모세 2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아들이 투트모세 3세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10세 정도였고, 아버지의 상속녀이며 자신의 이복 누이인 네페루레와 약혼한 사이였다. 네페루레의 어머니 하트솁수트는 투트모세 1세의 딸이자 투트모세 2세의 아내이며 누이였다. 어린 조카의 섭정을 맡게 된 하트솁수트는 강한 결단력과 야심을 가진 여인이었다.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에 하트솁수트는 왕의 상징과 의복 및 휘장을 지니고 사실상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투트모세는 성장한 뒤에 누비아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가 팔레스타인에서도 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의 할아버지 투트모세 1세는 시리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아버지 투트모세 2세도 결코 허약한 왕은 아니었지만, 투트모세 1세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여자인 하트솁수트는 군대를 전쟁터에 내보내기를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집트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을 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투트모세가 왕위에 오른 지 22년째 되던 해, 이집트에 대항하는 만만찮은 연합세력이 형성되었다. 이 연합세력의 지도자는 시리아 북부에 있는 카데시 왕국의 왕이었으며, 분명 미탄니 왕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위기의 순간 하트솁수트가 죽었는데 이는 시기적절한 죽음이었다. 하트솁수트의 조카 겸 사위인 투트모세가 이 죽음에 책임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통치 말년에 그는 하트솁수트의 이름을 모든 기념비에서 삭제하고 그녀의 동상을 깨부수고 부조에서 하트솁수트의 모습을 지워버리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군사원정
불과 2~3개월의 준비 끝에 왕은 군대를 이끌고 행군할 준비를 갖추었다.
첫번째 전투는 그가 테베의 카르나크에 세운 신전 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투트모세가 가자를 지나 카르멜 산맥 남쪽에 있는 야마이까지 행군한 과정과 참모회의, 그리고 오늘날의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29㎞쯤 떨어진 카르멜 북동쪽의 메기도에 포진하고 있는 적군을 기습하겠다는 왕의 대담한 결정을 묘사하고 있다. 투트모세는 가장 예기치 않은 길, 즉 산을 넘는 비좁은 길로 메기도에 접근했다.
적군은 패배했고, 메기도는 8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함락되었다.
투트모세가 즉위한 지 33년째 되는 해는 그가 가장 대담한 조치를 취할 기회가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것은 투트모세 1세가 죽은 뒤 날이 갈수록 강대해진 미탄니 왕국 자체를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투트모세는 이 원정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시리아를 가로질러 유프라테스 강의 도하 지점까지 부교(浮橋)로 쓸 상자배들을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한 것이다.
전투 결과 미탄니 왕국의 왕은 달아났고, 그의 첩 30명과 수백 명의 병사들이 포로로 붙잡혔다. 승리한 투트모세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투트모세 1세의 기념비와 자신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비를 나란히 세웠다. 이곳이 그가 가장 멀리까지 진격한 지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오론테스 계곡에 있는 니이족의 땅에서 코끼리를 잡았고, 귀환하자마자 테베에서 대승을 자축했으며, 포로와 전리품을 국가신 아멘의 신전에 바쳤다.
후기 원정(원정은 통틀어 17차례 이루어졌음)에서 투트모세 3세는 자신이 그동안 얻은 영토를 통합하고, 아시아 영토에 제국 조직의 토대를 놓는 것으로 만족했다.
현지의 지배 왕조에 속하는 토착 통치자들은 그후 이집트의 봉신으로서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 대신 평화를 유지하고 해마다 이집트에 공물을 바치고 이집트 대표로 그 지역에 파견된 '영토 감독관'에게 복종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지켜야 했다. 토착 통치자의 아들들은 이집트에 볼모로 보내졌고, 결국에는 사고방식과 감정이 이집트화한 상태로 고향에 돌아가서 상속받은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이집트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곳곳에 요새가 세워졌고, 해안과 산악 지방의 요충에는 이집트 수비대가 주둔했다. 투트모세는 남쪽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지배력이 미치는 누비아 땅의 남쪽 경계선을 카니사쿠르구스까지 확정짓고, 바르칼 산 근처에 있는 나파타에 아멘 신전을 세웠다. 그는 불온한 누비아인을 철저히 진압하고 많은 누비아인을 금광인부로 고용했는데, 이 금광들은 그가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집트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
이집트는 금광에서 나오는 금을 서아시아의 군주들과 물물교환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다. 치세의 마지막 12년 동안 투트모세는 승리의 열매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및 수단 지방에서 보내오는 공물이 그의 금고로 쏟아져 들어왔다(봉건제, 정치제도).
이집트의 장식
새로운 번영은 왕의 건축가들이 착수한 놀랄 만한 건축 계획에 반영되었다.
특히 카르나크에 있는 아몬 레 신전은 수많은 새 건물의 증축으로 더욱 커지고, 수많은 오벨리스크로 더욱 화려해졌다. 투트모세가 이 신전에 세운 화려한 화강암 오벨리스크 가운데 2개는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과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신전을 장식했던 2개의 오벨리스크는 오늘날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 뉴욕 시의 센트럴 공원에 있고, 다른 하나는 영국 런던의 템스 강변에 있다.
투트모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예술과 공예는 그의 후원으로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
말년에 투트모세는 체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아들 아멘호테프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아멘호테프는 그의 2번째 아내이며 하트솁수트의 딸인 메리에트레가 낳은 아들이다. 투트모세는 BC 1426년에 죽었으며 테베 서부에 있는 왕들의 무덤 계곡 구석에 묻혔다(왕들의 계곡). 이 무덤도 다른 많은 왕들의 무덤과 함께 나중에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했다.
그의 미라는 제21왕조의 제사장 겸 왕들이 안전을 위해 숨겨둔 은신처에서 1889년에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발견되었다. 원래의 무덤 속에는 엄청난 부장품이 함께 묻혀 있었던 것 같지만 발견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다이르알바리의 계단식 대지에 하트솁수트의 장제전(葬祭殿)과 나란히 세워진 그의 장제전은 1962년에야 발견되었다.
그의 미라를 보면 그는 키가 160㎝도 채 되지 않는 작달막한 사람이다. 그의 얼굴을 묘사한 조상들은 콧마루가 높은 커다란 코와 즐거운 듯이 미소짓는 입술을 가진 단호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의 명성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수많은 부적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그 부적을 지닌 사람에게 권세를 가져다주고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승리를 찬양하는 민중의 송가는 나중에 승리찬가의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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