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모세에 관한 역사적 문제

다른 표기 언어
모세

ⓒ Rembrandt/wikipedia | Public Domain

모세에 관한 역사적 견해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모세만큼 상이한 해석을 내리게 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초기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전승들은 모세를 〈토라〉('율법' 또는 '교훈')의 저자로 간주했는데, 5경이라 불리기도 하는 〈토라〉는 〈구약성서〉의 처음 5권(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에도 보수적인 학자들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믿고 있다.

독일의 학자 마르틴 노트는 모세 저작설을 반대하는 이론을 제시해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준비하는 데는 관여했지만 성서 전승에 나타난 모세의 역할에 대해서는 극도의 회의를 나타냈다.

그는 출애굽-시나이 전승의 배후에 역사적 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서로 다른 두 집단이 이 사건을 경험한 후 별도로 이야기를 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들의 노정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는 모세를 주인공으로 하여 서로 다른 주제와 전승들을 짜맞춘 편집자의 작품이며, 실제로 모세는 모압 출신으로서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성서고고학자이며 역사학자인 W. F. 올브라이트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마르틴 노트의 이 논문은 극단적인 두 주장 사이에서 중도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출애 1 : 8~신명 34 : 12)의 골자를 수용하면서도 수세기 동안 구전전승과 문서전승을 거치면서 본래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첨가되어 층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비평을 통해 5경의 문서자료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 자료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문학비평 이외에 문학양식, 구전, 문체, 편집, 고고학 등의 관점에서 성서 본문을 연구하는 다른 비평적 방법들도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다양한 계열의 증거들을 수렴할 때 성서비평 문제에 대해 가장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작업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자료들이 개략적이기 때문에 모세라는 인물에 대해 큰 윤곽만을 그릴 수 있다.

모세의 활동 연대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의 부모는 이집트에서 히브리라고 불렸던 여러 집단들 가운데 하나인 레위 지파 출신이었다고 한다.

히브리라는 용어는 본래 종족이나 인종과는 무관한 용어로서 하피루(Ḫapiru : 또는 Apiru)의 변형철자인 하비루(Habiru)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하피루는 여러 가지 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던 민중계급을 가리킨다. 성서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았으나,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파라오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이 이집트 왕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이 왕의 신원에 대해서도 학자들간에 일치된 견해가 없다. 따라서 모세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들이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도 합의점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한 해로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는 〈열왕기 상〉 6장 1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솔로몬 치세 4년, 곧 BC 960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출애굽 사건은 BC 1440년에 일어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같은 결론은 성서 및 고고학의 증거와는 차이가 있다.

히브리인들은 파라오를 위해 곡물을 저장하는 피톰(비돔)과 람세스 도성을 건설했는데, 이 도성들은 이집트 삼각주의 북동쪽에 있었다. 히브리인들이 살았던 이 지역은 고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성서의 이야기는 파라오의 궁전과 수도가 이 지역에 있었다고 암시하고 있지만, 투트모세 3세(BC 1440년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 지역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테베를 수도로 삼았고, 삼각주 지역에서는 거대한 건축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더욱이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에돔과 모압의 동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요르단 동편의 소왕국들이었던 에돔과 모압은 이때만 해도 아직 세워져 있지 않았다. 끝으로, 히브리인들은 피톰과 람세스를 정복하여 파괴했다고 주장하는데, 발굴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 도성들의 파괴는 BC 1400년이 아니라 BC 1250년에 일어났다.

전승은 모세로부터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12세대가 흘렀다고 그 숫자를 명기한다.

그런 만큼 480년은 한 세대를 40년으로 잡은 편집자의 언급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1세대는 실제로 25년 정도이기 때문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해는 BC 1290년경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출애굽(출애 1 : 2~2 : 23) 때의 포악하기로 이름난 파라오는 세티 1세(BC 1318~1304 재위)였고, 출애굽이 진행되는 동안의 파라오는 람세스 2세(BC 1304경~1237경)였다.

따라서 모세의 출생은 BC 14세기 말엽으로 추정된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모세에 관한 역사적 문제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