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949년에 창설되어 1981년까지 존속, 30회전이라는 국내 최고기록을 남긴 관전(官展).
개요
약칭 국전(國展)이라고 한다.
8·15해방 후 신진작가를 많이 배출해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으며 한국 미술계의 역사와 영욕(榮辱)을 같이했다.
유래와 성격
8·15해방 후 조선미술건설본부를 둘러싸고 좌우익 작가들이 극심하게 대립함에 따라 많은 미술단체들이 생겨났는데, 관전은 1947년 미군정청 문교부가 조선종합미술전(경복궁미술관)을 개최한 것이 처음이었으며, 1948년 정부수립 기념전을 계기로 정부가 주도하게 되었다.
정부는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고시 제1호에 의해 기존에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의 규약을 모태로 국전제도를 규정했다. 초기에는 운영을 문교부에서 하고 심사위원 및 간사직에 문교부 공무원을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철저한 정부 통제하에 있었으나, 그뒤 주관부처가 문화공보부로 옮겨지고 심사위원장도 순수 미술인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이념 아래 민족미술을 널리 알리고 능력있는 신인을 발굴한다는 취지 아래 실시된 국전이 실제로는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미술가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 특선을 거듭하면 추천작가로 승격시키고 심사위원이나 초대작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다 이러한 국전경력은 학력에 관계없이 대학교수나 교사 임용의 자격으로서 문교부가 보장하는 등 관전체제가 갖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심사위원들 사이에 파벌이 생겨 심사과정에서 잦은 마찰을 빚었다.
역사
제1회 국전은 1949년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렸다.
심사위원장 고희동을 중심으로 선전 출신작가들이 많이 참여해 대통령상은 유경채, 국무총리상은 서세옥이 받아 서양화 출품작이 압도하는 현상을 보였다. 제2회 국전은 6·25전쟁이 끝난 1953년에 열렸으며, 1959년까지는 전쟁의 상흔 때문인지 제1회보다 참여율이 적었고 서양화가 대부분의 상을 차지하자 수상작의 장르별 배분문제가 제기되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교수진으로 나뉜 심사위원들간의 파벌형성은 마침내 '대한미술협회'(약칭 대한미협)를 이탈한 서울대학교 중심의 '한국미술가협회'(약칭 한국미협)를 발족하게 했으며. 한국미협은 국전에 작품을 내지 않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출품작의 성향은 1960년대까지 구상양식이 주류를 이루었고 대상작도 인물 좌상으로 소재와 표현방식이 제한되어 이를 비판하는 소리도 높았다. 특히 추상미술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이를 수용한 1960년대 신진작가들은 국전의 폐쇄성에 대해 반발했으며 새로운 사조를 적극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결과 1969년 동양화·서양화·조각 부문에 각각 구상·비구상으로 나누어 출품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구상·추상 논쟁).
1970년대에는 화단에서 비구상양식이 득세하고 신문사와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민전(民展)이 생겨났으며,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작가들이 늘어나 국제전에 출품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짐에 따라 국제전의 참여경력이 중시되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편 원로작가들의 사망·은퇴 등으로 심사위원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국전폐지론이 조성되었다.
이에 주관부처는 서울에서 전시하던 이전까지의 관례를 깨고 전국 순회전을 가짐으로써 관람객 확대를 꾀하고 일부 평론가 및 심사위원을 영입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으나 1980년 제30회를 끝으로 국전은 막을 내렸다. 이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실시되었으며, 이 전람회는 1986년부터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의 통합단체)가 주관하게 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미술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