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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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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입상하지 못한 작가들이 심사의 편파성에 항의하며 낙선된 작품들을 모아 국전 전시기간에 따로 모아 열었던 전시회.

국전 33년 동안 4번 개최되었다. 1949년 시작되어 1981년 30회로 끝나기까지 국전은 심사위원 선정과 심사결과를 놓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 원인은 조형이념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인맥·학연·지연으로 얽힌 화단 내의 이해관계에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국전은 공정성을 가질 수 없었으며, 국전 심사를 좌우하는 '계보'의 뒷받침없이는 어떤 새로운 미술도 화단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일반화가들의 불만이 쌓였다. 국전과 이를 통해 형성된 화단의 주류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낙선전', '국전 보이코트 사건', '반국전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이중 '낙선전'과 '국전 보이코트 사건'은 국전을 둘러싼 이권배분의 요구와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국전 자체의 존립 여부에 대한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반면 '반국전운동'은 당시 앙포르멜 미술의 생성·성장을 저해하는 보수적 아카데미즘화된 국전과 국전류의 고답적인 구상미술에 대해 이론적·실천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다. 최초의 '낙선전'은 선전 및 국전을 통해 작가로서 상당한 위치에 있던 정진철과 김화경이 낙선되자 1954년 3회 국전의 동양화부에서 다른 낙선작가들을 모아 국전기간중인 11월 11~15일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었다. 그러나 정진철과 김화경을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의 작품은 여론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했다.

1963년에도 12회 국전 서양화부 낙선전이 있었다. 당시 서양화부 심사위원 15명 중 13명은 '목우회' 회원으로서 구상계열 작품들을 주로 입상시키고 비구상(非具象)·반추상(半抽象) 계열 작품들을 낙선시켰다. 낙선된 작품들은 유경채·문학진·정창섭 등 대부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진의 비구상·반추상 작품에 영향을 받은 같은 학교 학생들의 작품이었다.

1967년에는 10월 12~22일 덕수궁 중화문 옆 건물에서 제16회 국전 동양화부 낙선 작품전이 열렸다.

남종 수묵산수화 작품들, 특히 배렴의 제자들이 대거 입상하고 천경자·김기창의 채색화에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작품이 모두 낙선되자 심사 결과에 대한 이의제기로서 낙선전을 열었다. 낙선전 출품 작가 27명은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내 심사위원의 화풍을 닮은 아류들의 사숙전(私淑展)이 된 국전의 시정을 요구했다.

1971년에는 10월 24~28일 미도파화랑에서 제20회 국전 서예작가평가전이 열렸다. 심사에 참여한 박세림·구철우의 제자들이 입상하고 김충현·유희강·김응현의 제자들과 부산지방 작가들이 도외시되자, 부산작가 김용옥이 주동이 되어 서예평가추진위원회를 구성, 김충현·유희강 등이 국전 입상작 55점을 제외한 228점을 다시 심사하여 최고상과 특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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