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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6년 3월 11일,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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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5년 10월 22일, 서울 |
요약 한국 최초로 서양화를 개척한 20세기 한국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금강산 진주담도>와 <이상화 초상화>. 호는 춘곡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한성어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처음으로 서양미술을 접했다. 을사조약 후에는 안중식의 문하로 들어가 동양화를 공부하다가 근대한국화를 개척하고 일본으로 가서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서양화에서는 자연주의 경향을 보였고, 한국화에서는 수묵담채를 주로 그렸으며, 이후 미술단체를 주도하고 화단을 주도했다.
생애와 주요 활동
호는 춘곡(春谷). 근대화단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군수를 지낸 영철(永喆)의 셋째 아들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경상도 봉화, 함경도 고원 등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3세에 서울로 올라와 한성법어학교에서 4년 동안 프랑스어와 근대학문을 배웠다.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레미옹 선생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서양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 서양화를 선보인 최초의 작가인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허버트 보스 다음으로 1900년 정부의 초청으로 온 작가가 프랑스인 레미옹이었다.
그는 원래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년간 프랑스어와 서양미술을 보급했다. 1902년에는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일본인 아마쿠사[天草神來]가 서울 남산에 화실을 차려 어느 정도 서양미술이 알려졌다.
고희동은 처음부터 서양화에 뜻을 두지는 않았다. 15세에 결혼한 그는 아버지의 권고로 1904년 궁내부(宮內部) 광학국 주사(主事)로 일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문하로 들어가 전통적인 동양화를 공부했다.
안중식은 조석진(趙錫晉:1853~1920)과 더불어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던 어진화가(御眞畵家)로서 많은 후진들을 양성하여 근대한국화를 개척했다. 그뒤 고희동은 좀더 새로운 서양화 기법을 배울 생각으로 23세 때 혼자 일본에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작품세계
도쿄 미술학교에서 졸업작품으로 남긴 3점의 유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였다.
〈자매〉라는 제목으로 두 젊은 여인상을 그린 것, 자화상으로 한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개화기풍의 청년상,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양반티를 낸 자화상으로 습작시기를 엿보게 하는 자연주의 화풍을 띠고 있었다(도쿄 예술대학 소장). 국내에서 그가 처음 선보인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한일합병 이후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선전하기 위해 열었던 '시정(施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였다.
1915년 가을 〈가야금을 타는 여인〉은 서양식 유화작품이 일반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점과, 그리고 작품의 모델이 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장안의 화제가 되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는 중앙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어 유화기법과 목탄 데생을 가르치는 신미술교육의 보급에 힘썼으나 유화물감은 비싼 수입품인데다가 전문적인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다.
또한 스스로도 유화기법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키우지 못해 그의 후배인 김관호(金觀鎬:1890~?)의 명성에 압도당했다.
1920년대 중반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사회가 아직도 동양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양화로 바꾸었다. 작품활동보다는 미술단체를 조직하고 화단을 주도하는 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때는 조선시대에 전문 화가를 양성했던 도화서제도(圖畵署制度)가 폐지된 이후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없었다.
1911년 안중식과 조석진이 힘을 합쳐 최초의 사설 미술강습소라 할 수 있는 서화미술회를 만들었지만 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 등이 서화전을 갖는 정도였을 뿐이다.
동·서양화 작가를 막론하고 작가를 모으고 근대 미술계를 조직적으로 키울 필요성을 절감한 고희동은 13명의 발기인을 모아 민족미술단체 '서화협회'(書畵協會)를 발족시켰다. 양화작가도 포함된 서화협회라는 명칭은 일본인 양화가들끼리 '조선미술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민족의식의 발동이었다.
그해 창립총회에서 안중식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고 고희동은 운영을 맡은 총무로 피선되었다. 서화협회의 목적을 보면 "본회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케 함을 목적함"이라 했다. 곧바로 창립전을 열 계획이었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 회원들이 검거되거나 죽어 미루어지다가 1921년 중앙학교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서화협회전은 1936년 15회까지 지속되었다.
고희동은 서화협회전의 중단 이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도 거부하고 별다른 작가활동없이 침묵을 지켰다. 8·15해방 후 그는 민족미술의 새 건설을 위해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을 맡으며 친일작가들을 거세하는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술계가 좌우익이념의 대립과 주도권다툼으로 분열하는 양상이 심화되자, 그는 우익과 보수성을 대변하는 조선미술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제1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다음해 창립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으로 뽑혀 사실상 국전을 주도했으며 8회전까지 동양화심사부 위원장을 6차례 연임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4·19혁명으로 장면정권이 들어서자 신민당에 입당하여 참의원에 당선, 5·16군사정변 전까지 정치활동을 했다. 국전에서 손을 떼었으나 7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화단의 원로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평가
그의 화풍은 초기의 유화로서 자연주의 그림과 수묵담채의 실경산수풍(實景山水風)이 있으나 뚜렷한 창의성을 남기지 못했다.
주요작품으로 〈자화상〉·〈두자매〉(1915)·〈부채를 든 자화상〉(1915) 및 동양화작품 〈금강산소경〉(1939)·〈삼선암설경〉(1947, 개인 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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