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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AD 1세기에 활동한 나자렛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죽음에서 유래한 세계적 종교의 2번째 분열.
동방교회와의 갈등은 중세기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특색있게 발전하게 한 원인이기도 하고, 그러한 특색있는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안으로부터 교회와 교황권을 개혁하였다. 그는 교황직이 부패와 외부의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교황직의 교회법적·도덕적 권위를 확립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재임기간(1198~1214) 동안 교황의 보편성 주장은 교회생활의 모든 수준들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두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다른 세속 통치자들로부터 교황권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교회가 봉건주의에 편입되고 세속군주들이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이 주제가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가 시작된 이후 수세기 동안 중세 그리스도교의 산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중세사상,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과 철학이다. 이 신학과 철학의 탁월한 대표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였다.
스콜라주의 신학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 전통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고대의 고전적 업적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동방과 서방의 초기 교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적 사유방식의 영향 아래서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 신학들을 스콜라주의에 의거하여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교리내용을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가정들로부터 분리해내야 했다.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재발견을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이슬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먼저 알려졌으며, 결국 비잔티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본 문헌들을 번역하고 연구함으로써 재발견되었다. 스콜라주의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자연정신'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와 결합시켜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서구문화사 모두의 지표가 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중세사회와 문화의 그리스도교화를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고, 중세사회와 문화에 그리스도교가 야합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다.
스콜라주의와 중세교회 자체에 대한 후기의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고취시켰다. 프로테스탄트는 서구 가톨릭주의의 교회법적·신학적·성례전적 발전에 대하여 철저히 논박했다는 점에서, 중세 후기에 나타난 다양한 저항운동들과 구별된다. 처음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교리와 생활을 안으로부터 개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이와 같은 개혁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비타협성과 개신교 운동들의 배타성 때문이기도 했고, 정치적·문화적 상황 때문이기도 했고, 이 모든 요인들이 합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중세신학과 경건성, 교회조직에 대한 저항의 정도에 따라 몇몇 파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운동 및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 전통을 다룰 때 전반적으로 극히 보수적이었다.
장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은 덜 보수적이었다. 재세례파와 종교개혁 좌파의 다른 집단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가장 적었다. 이들은 서로 큰 차이점들이 있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개혁운동들은 교회나 교회전통과 구별되는 성서를 종교의 권위로서 강조한다는 점, 죄사함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점,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전제조건으로 업적을 전혀 도외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한다는 점,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과 예배에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 공통의 특징이다.
종교개혁은 콘스탄티누스 이래 번영을 누렸던 기성 그리스도교 내부의 운동으로 출발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1,000년 이상 발전해온 그리스도교 문화의 해체를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완료되었을 때 교회와 문화는 철저하게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변형은 부분적으로 종교개혁의 결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원인이기도 했다. 지리상의 대발견, 자본주의 경제의 태동, 과학시대의 동틈, 르네상스의 문화 등 이 모든 요인들과 그밖의 다른 요인들이 '중세적 종합'을 붕괴시키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 요인들 가운데 종교개혁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확실하게 가장 의미있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종교개혁의 사실상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분열과 서구의 세속화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못지않게 가톨릭 교회주의도 이 결과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자신의 역사적 형태를 맞추려고 노력하며 근대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다.
4세기 이래 서방에서 발전해온 기성 그리스도교가 종교개혁 이후 모든 곳에서 일시에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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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중세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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