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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24/25,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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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74. 3. 7, 파사노바 시토 수도원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1323년 성인으로 추증됨. 그리스도교 철학자.
(이). San Tommaso d'Aquino. 별칭은 Doctor Angelicus.
인성·창조·섭리를 다룬 형이상학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들로부터 그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대이교도대전 Summa contra gentiles〉이라는 2편의 걸작을 써서 라틴 신학을 고전적으로 체계화한 신학자였으며, 교회 전례에서 사용되는 몇 편의 아름다운 찬송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가운데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를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인정한다(→ 토마스주의, 그리스도교)
초기생애
토마스는 1224(또는 1225)년 로마에서 나폴리로 뻗은 도로가 지나는 아퀴노 근처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황제와 교황이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던 이 변경지방에 소규모 중세 장원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롬바르디아 태생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를 침공한 노르만족의 후예였다.
그의 장원에 속한 사람들은 교황세력과 황제세력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벌인 내전기간 동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위해 복무했다. 그의 가족은 어린 소년이었던 토마스를 집 근처에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보내 수도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의 가족은 토마스가 언젠가 대수도원장이 되어 가문에 이익을 가져오기를 원했을 것이다. 9년 뒤인 1239년 수도원에서 영적인 생활과 문화적 생활을 보낸 청년 토마스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당시 황제는 수사들이 교황에게 너무 복종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수사들을 추방했다.
그뒤 그의 가족은 황제가 얼마 전에 세운 나폴리대학교로 그를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리스어·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과학저서들과 철학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30년 전에 설립된 탁발수사설교단, 곧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수사들에 대한 전통적인 부자 관계 형태의 조직을 버리고 민주적인 형태의 탁발수도회(단체와 개개인이 가난하여 자선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수도회)로 탈바꿈했으며, 기도와 육체노동 중심의 수도생활로부터 설교와 교육 중심의 보다 적극적인 생활로 나아갔다.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함으로써 그는 그가 태어난 봉건세계와 그를 양육한 수도원적인 영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결심의 의미심장함을 보여주는 극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지혜로운 선배들은 그를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당시 가장 우수하고도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던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파리로 보냈는데, 그 직후 그의 부모는 파리로 가는 길목에서 그를 납치했다.
파리 유학 시절
토마스는 1년 동안 붙잡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뜻에 완강히 저항했다. 마침내 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 1245년 가을 파리로 가서 파리대학교 내에서 도미니코 수도회 중심지가 되었던 생자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탁월한 학자 대 알베르토 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토마스는 봉건세계로부터 탈출한 직후 파리대학교 생활에 몰두하고 새로 설립된 탁발수도회에 종교적 소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제도 및 개념구조에 대한 신념이 공격을 받고 있던 세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복음과 당대 문화의 만남은 토마스가 세운 견해의 핵심을 이루었고, 그 견해의 발전을 이끌었다. 대체로 그의 업적은 그당시 새로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통합시킨 것이라고 간주되며, 이것을 그리스도교 역사의 처음 12세기 동안 교부들의 영향 아래 플라톤 사상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통합한 것과 비교하곤 한다.
이같은 견해는 대체로 정확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토마스의 업적은 개개인의 삶과 교회 전반에 걸쳐 문화적·영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복음적 각성을 실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토마스는 한편으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주의로부터, 또다른 한편으로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설립한 성 도미니코의 학문적 열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탁발 종교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대학교에 왔을 때는 아라비아-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유입되어 신자들이 이에 대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교회 당국은 이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는 자연주의 및 합리주의를 여러 차례 봉쇄하려고 했다. 여러 고위성직자들은 이 자연주의와 합리주의가 젊은 세대를 유혹한다고 보았다. 토마스는 이 새로운 사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스승 대 알베르토나 파리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던 로저 베이컨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연구하고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의했다. 그당시 그리스도교도들과 신학자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 합리주의의 엄격한 요구에 직면했다. 이와 동시에 기술이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농업사회의 초급 경제로부터 벗어나 도시사회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사회는 생산, 시장경제, 깊은 공동체 의식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성직자들을 위시해 새로운 세대의 남성들과 여성들은 세계를 경멸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반기를 들었고, 이성을 이용하여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구조는 지성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기술 그 자체는 진리에 접근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기술은 우주를 인간화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스콜라 철학을 지배해왔던 보편개념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붉다'라는 일반개념과 '이 붉은 것'이라는 특수개념의 상호관계에 대한 물음)은 뒷전으로 밀리고, 지식과 세계에 관한 일관성 있는 형이상학이 발전되었다(→ 스콜라주의).
1248년 여름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와 함께 파리를 떠났다. 알베르투스는 쾰른 수도원에 도미니코 수도회가 새로 설립한 대학의 학장을 맡았다. 토마스는 1252년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신학석사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학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자격(licentia docendi)을 얻었으며, 그 직후 교수라는 칭호와 특권 취득에 필요한 훈련을 마쳤다. 1256년부터는 파리대학교와 합병한 도미니코 수도회의 두 학교들 가운데 한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황청시절과 파리 복귀
1259년 토마스는 그 당시 서방 인문주의의 중심지였던 교황청의 신학 고문과 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재위 말년에 아나니에서 2년을 보냈고, 우르바노 4세와 함께 오르비에토에서 4년을 보냈다. 1265~67년 그는 로마의 산타사비나 수도원에서 가르친 뒤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요청을 받고 비테르보의 교황청으로 갔다. 1268년 11월 교황청은 갑자기 그를 파리로 파견했으며, 그곳에 가서 막 시작되었던 치열한 교리논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아베로에스의 저작들이 그당시 파리의 대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코르도바 출신의 아베로에스는 스페인에서 아랍 철학을 대변하는 탁월한 학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뛰어난 주석가와 해석자로 유명했다. 아베로에스가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지식이 이성적 지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종적인 분석 차원에서 보면 2가지 진리, 곧 신앙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이슬람 정통주의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더욱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제르 드 브라방이 등장한 뒤 1266년부터 파리대학교의 교양학부 학생들은 우수한 아베로에스의 주석서와 이성적 경향을 띠고 있던 그의 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료 교수들인 아베로에스와 시제르에 반대했으나, 양편은 모두 상대방을 높이 평가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제르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시제르가 정통주의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아우구스티노적인 전통과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1270년 급진적 아베로에스주의는 정죄당했고, 이와 동시에 신앙 아래서 이성이 누리는 자율성을 인정했던 토마스도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 논쟁이 진행되면서 신학의 방법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성은 신앙 안에서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활동할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고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신비는 적극적·의식적·조직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성 활동의 규칙과 구조가 신앙의 빛과 통합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신학은 '과학'이다(물론 이 말은 현대적 의미의 '과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전제들로부터 이성적으로 추론된 지식이다.
신학자들은 권위와 신앙을 출발점으로 받아들인 뒤 이성을 사용하여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전적으로 자연적인 이성의 빛에만 의지한다. 토마스는 신학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자 여러 진영에서 아퀴나스에 대해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 이러한 반대는 오늘날까지도 종교적 열광주의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이들은 특히 이성을 신비적인 영성체, 관상, 복음적 열정에 사로잡힌 갑작스러운 황홀이 지배하는 세계에 뛰어든 침입자로 본다.
아퀴나스의 저술이 취하고 있는 문학 유형은 그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아퀴나스는 찬반의 논거와 함께 비판적 연구를 제시하는 '질문'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는데, 이것은 당시 대학교들에서 사용되던 교수법 체계에 따른 것이다. 그 형식은 공식 문서에 대한 단순한 주석으로부터 중세 대학교 생활의 중요한 이벤트가 되었던 공개 논쟁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토마스의 저작들은 3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 〈구약성서〉, 〈신약성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신학 명제집 Sentences〉(대학교에서 사용되던 공식적인 신학 교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등에 대한 주석들, 둘째, 질문들에 대한 논박(논쟁들에서 대가의 자격으로 자신의 교리를 설명한 것), 셋째, 2편의 독창적 종합서인 〈대이교도대전〉·〈신학대전〉(이 책들은 초보자들을 위한 종합적인 입문서로 쓰임) 등이 있다.
이와 아울러 수많은 〈소논문집 opuscula〉도 주목해야 하며, 이 〈소논문집〉은 그것이 씌어진 특수한 상황 때문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신앙과 이성에 대해 아퀴나스가 취한 입장은 그 논리 때문에 자연적 실재의 근본적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physis)은 필연적 법칙을 가지며, 이 사실을 인정하면 로고스(이성적 구조)에 따라 과학을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마스는 기적이나 하느님의 섭리에 소박하게 의지하여 자연의 힘을 신성시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네스크 예술과 사회관습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물과 인간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가 인간의 상상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자체의 세속적 성격이 폭로된 자연은 그에 합당한 종교적 가치를 가져야 하며, 보다 이성적인 방법에 따라 인간을 하느님에게 인도해야 한다. 이제 자연은 더이상 초자연적인 것의 그림자가 되지 않는다. 아시시의 프란키스쿠스가 새·나무·태양을 찬미한 것은 이러한 이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Physics〉을 대학교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학문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당시 세계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반대되는 자연주의가 영성·사회관습·정치행위 등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있었다. 1270년경 프랑스 신흥도시들을 찬미한 시인이며 파리의 생자크 거리에서 토마스의 이웃에 살고 있던 장 드 묑은 자신의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에서 물리적 우주를 고찰하고 생식의 법칙을 비난하면서 거칠기 짝이 없는 사실주의를 표현했다.
로마 시인 오비드의 〈사랑의 예술 Ars amatoria〉이 수많은 사본들로 만들어져 읽혔고, 앙드레 르 샤플랭의 〈사랑의 하느님에 관하여 De Deo amoris〉는 대중의 기호에 맞는 세련된 판본으로 출판되었으며, 보다 유혹적인 형태의 궁정 연애가 13세기 문화에서 더 크게 유행했다. 동시에 로마 법이 볼로냐대학교에서 소생하고 있었다. 볼로냐대학교는 자연법을 엄격하게 분석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법률가들에게 교회의 신정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했다.
성서적 상징을 사용하여 훌륭한 경건자들의 모습을 그리며 군주의 역할과 의무를 밝혔던 전통적인 견해는 정부의 실험과 이성적인 논문들로 대체되었다. 토마스도 1266년 키프로스의 왕을 위해 〈군주들의 통치에 대해 De regimine principum〉 같은 논문을 작성했다. 정의를 관장하는 일에서는 사법적 수사와 재판이 시죄법(試罪法)과 하느님의 심판에 호소하는 열광주의적 태도를 대체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직면하자 많은 사람은 자연의 진정한 가치로 마음과 영혼의 혼란스러운 성향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우려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성향을 보이던 신학자들은 어떤 형태의 결정론적 철학도 배격했다.
그들은 이러한 철학이 자유를 위축시키고 개인의 책임을 해소시키며, 섭리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고, 창조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하느님의 활동이라는 관념을 부정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노의 교리에 물들어 있던 신학자들은 죄로 인해 갈갈이 찢긴 자연에 대한 은혜의 필요성과 은혜의 힘을 역설했다. 자연의 종교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신학의 낙관주의는 그들에게 걸림돌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이단적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그가 볼 때 결정론은 자연에만 해당되고 인간은 자유로우며, 그 자유를 합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섭리신학에서 창조가 계속된다고 가르쳤다. 계속되는 창조는 창조주의 지혜에 대해 피조물이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또한 자연질서의 존재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하느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그가 창조한 만물을 움직인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주에 대해 행사하는 절대적 통치는 각각의 존재가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는 창조주의 섭리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율성은 이성적 피조물에게서 가장 높은 형태로 실현되어 있다. 지적·의지적·신체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파괴되지 않으며, 오히려 바로 그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피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어떤 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창조적 능력의 완전성 그 자체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것이다." 신비한 원리이기도 한 이 형이상학적 공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여준 영성의 핵심이다(자유의지).
말년
1272년 부활절에 토마스는 나폴리대학교에 도미니코 수도회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것은 대학교의 부흥에 관심을 가졌던 앙주 왕 샤를이 요청한 것에 대한 응답조처였다. 오순절 주간에 피렌체에서 개최된 도미니코 수도회 참사회 총회에 참가하고 가정 문제를 해결한 뒤, 10월 나폴리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그 이듬해말까지 강의를 계속했다. 수년 동안 토마스는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논쟁하는 한편,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보았던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노 사상을 따랐던 그리스도교 대가들과도 논쟁했다.
그런데 그당시에는 후자의 논쟁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1273년 나폴리대학교에서 개최된 일련의 협의회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 탁발수사이자 파리 시절 토마스의 친한 동료였던 보나벤투라는 토마스의 가르침을 위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성향을 띤 사상을 새롭게 비판했다. 그는 철학이 신학과 구별된다는 명제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 자연이 이미 결정된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도 비판했다.
그는 특히 인간 본성을 이루는 2가지 필연적 원리인 영혼과 육체가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이론을 비판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지식이 형상에 근거한다는 플라톤-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을 부정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보나벤투라와 토마스의 이견은 심각했다. 모든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물질과 정신이 구별된다고 가르쳤지만, 각 개인 안에서 물질과 정신의 내적 관계를 찾는 경우에만 이러한 구별을 지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견해 차이는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관념론 철학과 실재론 철학의 지적인 차이였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차이이기도 했다.
어떤 철학자들은 물질세계를 단순히 물리적·생물학적인 실재로만 보았다. 그것은 영적인 인간들의 역사가 연출되고, 문화가 전개되고, 구원이나 멸망이 결정되는 무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무대 자체는 정신적 사건과 무관하다. 자연의 역사는 우연히 정신의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가 되었을 뿐이다. 자연의 역사는 의연히 그 나름의 길을 간다. 자연의 역사에서 인간은 이방인이다. 인간은 자연의 역사에서 막간의 역할을 맡을 뿐인데, 그것은 오로지 가능한 한 빨리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순수한 정신의 세계, 곧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토마스는 자연의 역사를 정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것과 동시에 자연의 역사에 대한 정신의 역사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두 세계의 접합점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만나는 지평선'과도 같다. 인간에게서 정신과 자연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 둘은 내적인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퀴나스에게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는 사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범주들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형상은 어떤 사물을 현재의 상태로 존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형상과 질료는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2가지 내적인 원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육체는 인간의 질료이고, 영혼은 인간의 형상이다. 그러나 그당시 많은 학자들은 토마스가 정신의 초월성(영혼이 육체의 죽음 뒤에도 살아 있다는 교리)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1274년 1월 토마스 아퀴나스는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그레고리오 10세의 개인적인 부름을 받았다.
리옹으로 가던 도중에 그는 병에 걸렸다. 그는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 체류하다가 1274년 3월 7일 그곳에서 죽었다. 1277년 신학 문제에 대한 최고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파리의 대가들은 219개에 달하는 일련의 명제를 정죄했는데, 그 가운데 12개는 토마스의 명제들이었다. 이것은 중세기에 있었던 것 가운데 가장 극심한 정죄였다. 이 정죄가 미친 영향은 그 이후 사상의 발전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정죄는 수세기 동안 아퀴나스의 우주적·인간학적인 실재론을 거부했던 건강하지 못한 정신주의를 조장했다.
평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기는 극히 단순하다. 대학교 생활에만 헌신했던 공직활동 기간중 파리, 로마 교황청, 다시 파리, 나폴리로 여행한 것을 제외하면 연대를 표시할 만한 활동조차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그당시의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무관한 조용한 교수생활이었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의 정신과 종교 생활에 나타났던 극적인 반전은 모두 대학교에서 비롯되었고 대학교에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 대학교들에는 급속히 발전하는 문명의 모든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전만 해도 그리스도 교회는 교묘하게, 권위주의적으로 이 대학교들에 교회의 교리와 정신을 위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는 그의 사상을 정립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찾았다. 논쟁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심도 있고 포용력 있는 정신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은 토마스에게 풍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똑같은 환경에 있을 때 비로소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적인 유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23년 시성되었고, 1567년 공식적으로 교회박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19세기말에 현대주의를 둘러싼 위기가 조성되자 정통의 주창자로 공표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칭찬들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신학이 쇄신되던 13세기에 그가 휩쓸려들어갔던 역사적 난제들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의 쇄신은 서방세계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진보에 영향을 입은 것이기도 했다. 토마스는 그리스 과학·문화·사상의 재발견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세계가 교리적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에 활동했다. 최초로 아퀴나스의 전기를 쓴 토코의 굴리엘모는 그를 잘 알고 있었고, 스승의 가르침이 불러일으킨 인상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토마스 형제는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고, 새로운 방법을 창안했으며, 새로운 증명체계를 사용했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논거와 새로운 교의에 귀를 기울인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이 새로운 빛과 숭고한 영감을 주어서 그가 말과 글로 새로운 견해와 새로운 지식을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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