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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AD 1세기에 활동한 나자렛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죽음에서 유래한 세계적 종교의 분열.
성상파괴논쟁은 종식(843) 되었지만, 파벌을 유산으로 남겼다. 847~877년까지 자신의 직위를 빼앗기기도 하고 되찾기도 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활동했던 이냐시오스는 858년 당국에 의해 추방당했고 포티오스가 그를 대신하였다. 평신도 학자로 제국 법원의 수장이던 포티오스는 총대주교로 선출되어 6일 동안 총대주교 자리에 있었다.
이냐시오스의 지지자들이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 재위)를 설득하여 포티오스를 인정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오는 불가르족에 대한 비잔티움 교회의 선교에 대해 격노하였다(→ 볼가리). 왜냐하면 그는 불가르족이 자신의 선교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오가 불가르족에 서신을 보내 그리스 의식들에 공격을 가하라고 명하자, 포티오스는 서방교회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Filioque)고 말함으로써 신경를 이단적으로 변조하였다고 고소하였다(→ 필리오쿠에).
포티오스로 인한 분열의 주요내용은 로마가 교황 니콜라오와 하드리아노의 주장대로 모든 교회들에 대한 전제군주적인 관할권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포티오스와 그리스인들의 생각대로 로마가 5개의 준독립적(準獨立的)인 총대주교 관구들의 맏형에 불과하므로 교회법에 의거하여 다른 관구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였다.
포티오스 시대에 나타난 상호불신은 교황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들에게 라틴식 관습을 강요하였던 11세기 중반에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1054년 7월 16일 이탈리아에서 온 한 교황사절은 냉대를 받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는 로마 교황의 파문장을 올려놓았다. 또 성령에 대한 그리스식 교리를 정죄하였고, 기혼자의 사제 서품을 매도하였으며, 성찬례를 위해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는 그리스 방식을 비난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이 불화는 양편이 얼마간 격분하여 행동한 데서 비롯된 작은 폭풍으로 취급되었으나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이 점점 더 소원해지자 사람들은 1054년의 사건이 동서의 최후 분열을 일으킨 계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965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세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마침내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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