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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4년의 교회 대분열

다른 표기 언어 Schism of 1054 동의어 동·서방분열, East-West Schism, 동서 교회의 분열, The Great Schism

요약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미카일 케룰라리우스가 이끈 동방그리스도 교회와 교황 레오 9세가 이끈 서방그리스도 교회 사이에 마지막 분열을 촉진시킨 사건(→ 기독교,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
동·서방분열(East-West Schism)이라고도 함.

교황과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한 1054년은 교회사의 분수령을 이룬다.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계는 5~11세기에 점차적인 반목의 관계였다. 초기 교회에서 로마·알렉산드리아·안티오크 주교의 역할이 현저하게 두드러졌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들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었다.

황제의 권좌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격전장이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가 쇠퇴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한편 동방교회회의 총대주교구가 때때로 일어난 격렬한 신학적 논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서방교회는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의 위치가 수위권을 주장할 정도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교황의 수위권이나 이에 관련된 로마 교회의 이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동방교회에 수위권을 강요하는 것은 분열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되었고, 혼란의 시기에 우위권을 주장하는 것은 분열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동방교회의 신학적인 풍조는 서방교회와는 달랐다. 동방교회 신학이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반면에, 대부분의 서방교회 신학은 로마 법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기기도 했는데, 성령을 고찰하고 규정하는 방식에서도 서로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동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보았고,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보았다. 로마 교회는 동방교회와 상의 없이 자신들의 신조에 이들을 삽입했던 것이다. 또한 동방교회는 로마 교회가 성직 독신주의를 강요하고, 견진성사의 권한을 주교에게만 부여하며, 성체성사 때 효모가 들어 있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

두 교회의 분열은 정치적인 시기와 이권 때문에 더욱 촉진되었고, 분열의 전조적인 징후들이 계속 나타났다. 마침내 교황 레오 9세가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우스와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총대주교 역시 비슷한 파문으로 보복하여 1054년에 마지막 분열이 일어났다. 이전에도 상호간의 파문은 있었으나 영구적인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에 화해의 가능성이 보이기는 했지만 두 교회 사이의 틈은 점점 더 벌어졌고, 특히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라틴인들에 의해 정복되자 그리스인들은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리옹 공의회(1274)와 페라라 - 피렌체 공의회(1439)에서 재연합(서방교회의 용어)이 탄원되었지만, 비잔틴 교회는 거절했고, 분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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