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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다른 표기 언어 Bern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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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90
사망 1153. 8. 20, 샹파뉴 클레르보
국적 프랑스

요약 1174년 1월 18일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8월 20일. 시토 수도회 수사, 신비주의자, 클레르보 대수도원 설립자 및 대수도원장.
(프). Saint Bernard de Clairvaux.

개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성직자들 중 한 사람이다.

초기생애와 경력

부르고뉴의 귀족 출신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고, 형제가 5명, 누이가 1명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자비, 정의, 타인에 대한 충실한 사랑이 몸에 배게 되었다. 신앙과 윤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나 자신만 의로운 체하지는 않았다. 그의 부모는 매우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 알레트는 5세기에 모니카가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에게 했던 것에 버금가게 베르나르도에게 도덕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는 1107년에 죽었는데, 베르나르도는 그때가 바로 '완전한 회심을 향한 먼 길'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때였다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샤티용쉬르센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성직자로 출세하려는 꿈을 버리고 금욕과 은둔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시토 수도회 대수도원장 스테파노 하딩에게 조언을 구했고, 새롭게 고군분투중인 이 작은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 수도회는 1098년 몰렘의 로베르가 베네딕토 수도회를 더욱 소박하고 엄격한 생활형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세웠다.

베르나르도는 시간을 내서 집안 일을 매듭짓고 형제들과 25명가량 되는 동료들을 설득해서 자신의 길에 동참하도록 했다. 1112년 시토 수도회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1115년까지 영적·신학적 훈련에 몰두했다. 그는 이때 질병과 싸우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젊어서부터 평생 일관되게 육체적 금욕을 실천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빈혈·편두통·위염·고혈압·식욕부진 등으로 고생했다.

클레르보 대수도원 설립자와 대수도원장

1115년 스테파노 하딩은 그를 지명해 소규모 수사 집단을 이끌고 부르고뉴와 샹파뉴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세우게 했다.

그의 형제 4명, 삼촌, 사촌 2명, 건축가 1명, 노련한 수사 2명이 클레르보 수도원이 자립할 때까지 10년이 훨씬 넘는 동안 끔찍하게 궁핍한 생활을 견뎌냈다. 그동안 베르나르도의 건강은 악화되었지만 영성(靈性)은 깊어졌다. 상급 성직자들과 친구들, 특히 주교이자 학자인 샹포의 기욤의 권유로 그는 수도원 근처 오두막에서 은둔 생활을 했는데, 그의 초기 저작들도 이곳에서 썼다.

이 책들은 교부들의 글을 반복해서 인용하고, 동류어·어원분석·두운법·성서의 상징들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았고, 공명(共鳴)과 시적인 분위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마리아론(성모 마리아에 관한 교훈 및 교리 연구)에 대해 짧지만 완벽한 논문 〈성모 예찬론 Praises of the Virgin Mother〉을 썼다. 그는 비록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훗날 온건한 마리아 공경의 옹호자가 되었다.

1119년 시토 수도회 수사들은 9개의 대수도원을 시토 수도회 대수도원장 관할하에 두는 회헌을 마련하고 교황 갈리스토 2세의 승인을 받았다.

베르나르도는 순종하며, 자선사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욕구와, 수도원에 머물면서 내면의 삶에 몰두하고 싶은 욕구가 부딪혀 생기는 긴장을 안고 갈등하며 사는 법을 배웠다. 그가 남긴 설교들과 300통이 넘는 편지들에는 하느님께 몰입하는 신비로운 생활과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연결하려는 노력, 교회생활의 수호자로서 맡은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해야겠다는 결심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그는 신비주의적·직관적 방법으로 신을 체험했고, 신앙의 완성이자 결실이며 기도와 명상으로 도달하게 되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주장하게 되었다. 또한 자연에 묻혀 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있게 말하건대 책보다는 숲에서 훨씬 더 큰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스승들에게 배울 수 없는 것을 돌과 나무들이 가르쳐줄 것입니다."

그는 '성전기사회'라는 새로운 기사수도회를 예찬하는 글을 쓴 뒤 그리스도교도의 영적 생활, 즉 그리스도를 명상하고 본받는 것에 관한 글을 그의 설교인 〈겸손의 단계들〉과 〈하느님의 사랑〉에 쓰곤 했다.

교회의 기둥

그의 생애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는 1130~45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중추 역할을 하던 클레르보와 로마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수많은 시민회의와 교회공의회, 교황청이 7년간 불화를 겪으며 벌인 신학 논쟁에서 중재자와 고문 역할을 하면서도 시간을 내서 〈구약성서〉 〈아가〉에 대한 방대한 설교를 남겼다. 그는 5명의 교황의 친근한 고문 역할을 하면서 대립교황들(유효한 성직임명 절차를 무시하고 교황에 선출된 사람들)로 인한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당시 가장 위대하고 인기있던 변증가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의 합리주의적인 영향과 대결해, 대표적인 성직자들 사이에 우정을 두텁게 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생각했다.

그는 교황을 꾸짖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가 인노첸시오 2세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에도 나타난다.

"우리 신실한 목자(牧者)들은 모두 똑같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정의가 사라졌으며, 베드로가 받은 열쇠의 권위가 떨어지고 성직자들의 권위가 썩었습니다. 반면 그 어느 주교도 하느님께 저지른 그릇된 행위를 징계할 힘이 없고, 게다가 어떠한 잘못도, 심지어 자기 교구에서 벌어진 악행에 대해서도 처벌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원인을 당신(인노첸시오 2세)과 로마 황실에 두고 있습니다."

아벨라르두스와 몇 차례 접촉했으나 두 사람은 성격과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립으로 끝나고 말았다. 베르나르도는 수도원 영성학파가 전통적으로 '침묵을 통한 반대'를 해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변증법적 스콜라주의는 하느님의 신비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스콜라주의 자체가 하나의 기교에 불과하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스콜라주의는 신앙의 영역 안에 머문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판적인 호기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비의 학교에서 인생을 배움으로써 하느님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보다 가치있는 방법을 추구하며 논쟁보다는 기도를 통해 훨씬 더 쉬운 방법을 발견한다." 또한 하느님을 아는 첫째 조건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마침내 아벨라르두스에 대해 승리를 선언했는데, 이것은 논쟁 기술과 설득력 때문이 아니라 설교를 통한 비판과 주교들 및 교황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그리스도교).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베르나르도에게 라틴 및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집어삼킬 듯이 몰려오는 이슬람 대군에 맞서 제2차 십자군(1147~49)을 일으켜야 할 당위성을 홍보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십자군 원정은 베르나르도가 정치문제, 민족, 왕조, 여러 모험가의 온갖 불평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로부터 기사정신과 어머니로부터 경건심을 물려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의 금욕적인 이상주의자로서 십자군(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잔인한 광신자들이었음)의 마음속에 순결한 동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스콜라주의 변증가이자 푸아티에의 주교로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오직 인간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 질베르 드 라 포레를 단죄하는 일에 참여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 에우제니오에게 세속 권력자 역할보다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도록 권고했으며, 교회 공의회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대표적 역작 〈아가에 대한 설교 Sermons on the Canticle of Canticles〉는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씌어졌다.

이 책에는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라는 훗날 그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꿀처럼 달다"라고 표현된 그의 교훈이 담겨 있다. 이것은 또한 지고의 사랑을 노래한 책인데, 즉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완전히 알 길이 없다." 또한 그가 즐겨 사용하던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느님에게서 생긴다. 이 사랑의 기준은 무엇인가? 무한정 사랑하는 것이다." 이 기도문에서 그의 교리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1830년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고, 1953년 교황 비오 12세의 교황 회칙에서 '꿀처럼 단 박사'로 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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