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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말을 타고 달리면서 속도를 겨루는 경기.
기수가 서러브레드종의 말을 타고 벌이는 경주와 마부가 탄 마차를 스탠더드브레드종의 말이 끌고 달리는 경주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 두 종류의 경마를 각각 평지경마와 하니스 경마라고 부른다.
평지경마 가운데는 도약을 포함하는 경주도 있다. 이 항목에서는 서러브레드종 말이 평지에서 도약을 하지 않고 달리는 경주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스포츠의 왕 또는 왕들의 스포츠로 알려진 평지경마는 유한계급의 오락에서 거대한 대중오락산업으로 발전했다. 어떤 경마대회가 열리는 날은 공휴일로 간주된다. 경마장의 일부 구역에 무료입장이 허용되는 엡섬의 더비 경마일에는 구경꾼이 50만 명이나 모인다. 많은 나라에서 평지경마와 하니스 경마는 모든 운동경기 가운데 관중이 가장 많은 경기이다.
초기역사
경마가 처음 알려진 것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필시 선사시대였을 것이다. BC 700~40년에 열린 올림픽대회에서는 4필의 말이 끄는 전차경주와 기수가 안장을 얹지 않은 채 말 등에 올라타고 달리는 경주가 벌어졌다.
조직화된 경마에 관한 그밖의 역사는 충분히 확립되어 있지 않다. 조직화된 경마는 승마술이 일찍부터 고도로 발달했던 중국·페르시아·아라비아·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곳들은 유럽 최초의 경마에 이바지한 아라비아 말, 바바리 말, 터키 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이 품종들은 십자군전쟁(11~13세기) 때 유럽에 도입되어 유럽인들에게 친숙해졌다.
1174년경 영국 런던의 스미스필드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경마에서는 직업 기수들이 구매자들에게 말의 속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경주를 벌였다. 사자심왕 리처드 시대(1189~99)에는 기사들이 기수로 참가하여 3마일을 가장 빨리 달린 기사가 40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것이 경마 사상 최초의 상금이었다.
16세기에 헨리 8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바바리 말로 추정되는 말을 도입하여 여러 지역에 종마사육장을 세웠다. 17세기에 제임스 1세는 영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후원했다. 그의 후계자인 찰스 1세는 1649년에 죽을 때 139필의 종마를 갖고 있었다.
조직화된 경마
'영국 경마의 아버지'로 알려진 찰스 2세(1660~85 재위)는 우승자에게 왕이 직접 상을 주는 '킹스플레이트' 경마를 창설했다.
그가 이 경마를 위해 작성한 정관이 영국 최초의 경마 규칙이다. 참가마의 나이는 6살이었고, 부담중량은 76㎏이었으며, 4마일(6.44㎞) 경주의 1착을 먼저 2번 하는 말이 우승마가 되었다. 찰스 2세의 후원으로 뉴마킷은 영국 경마의 본산이 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뉴욕 식민지 총독인 리처드 니콜스가 1665년 북아메리카 최초의 경마 우승컵으로 알려진 은컵을 내걸고 롱아일랜드의 햄스테드플레인에서 경마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신대륙에서의 코스 레이스의 시작이었다. 개척적인 성격의 비공식 경마는 그 이전에 버지니아에서 이미 열렸다.프랑스에서의 최초의 경마는 1651년 두 귀족의 내기로 열렸다.
루이 14세(1643~1715) 시대에는 도박성 경마가 유행했다. 루이 16세(1774~93 재위)는 경마 클럽을 조직하고 칙령으로 경마 규칙을 확립하여 경마에 참가하는 말은 반드시 혈통증명서를 제출하고 외국산 말은 더 무거운 중량을 부담하도록 했다.
내기경마
최초의 경마는 말 2필 또는 많아야 3필이 벌이는 내기 경주였고, 마주들이 판돈을 거는 단순한 내기였다. 기권하는 마주는 자신이 내놓은 판돈의 절반을 몰수당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나중에는 판돈 전액을 몰수당하게 되었다. 내기 역시 '돈을 걸지 않으면 벌금을 내는'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계약서는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작성했으며, 이 사람을 '내기기록부 관리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뉴마킷 경마장의 관리인인 존 체니는 여러 경마장의 내기기록을 한데 모은 〈체니의 말 시합 Cheny's Horse Matches〉(1727)을 출판했고, 이런 출판은 책제목을 달리하여 해마다 계속되다가, 1773년 제임스 웨더비가 〈경마편람 Racing Calendar〉이라는 제목으로 책명을 확립했다. 그리고 이 〈경마편람〉의 출판은 그후 웨더비의 가족에 의해 계속되었다.
야외경마
경마를 대중화하라는 압력이 높아지자, 좀더 많은 경주마가 야외경마장에서 겨루는 오픈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참가 자격은 말의 연령과 성별, 출생지 및 말이 지금까지 경마에서 올린 성적과 기수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세히 규정되었다.
마주들이 직접 기수(아마추어 기수)가 되는 경마도 창설되었는데, 이런 경마는 읍이나 군 지역에서만 열 수 있었으며, 일정한 횟수 이상의 우승기록을 가진 말은 참가하지 못했다. 1740년에 제정된 법령은 우수한 말이 우승기록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경주에 참가하여 열등한 말들을 쉽게 이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경주에 참가하는 말은 반드시 명실상부하게 그 주인의 재산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이런 '부정선수'를 방지했다. 또한 말들의 연령은 문서로 증명되어야 했고, 시합을 거칠게 하면 벌칙을 주었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기수들의 신원을 밝혔지만, 처음에는 기수들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영국에서는 17세기 후반부터 직업적인 기수를 '자키'라고 불렀고, 그후 프랑스에서도 이 용어를 채택했다. 초기에 이름이 기록된 기수인 '냇'은 1841년까지도 〈경마편람〉에는 '냇'이라는 이름만 나올 뿐 본명이 기록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승마의 조련사와 기수의 이름만이 기록되었지만, 1850년대말부터 모든 참가자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경주거리가 4마일이고 여러 번 달려 1착을 먼저 2번하면 우승을 차지하는 경주방식일 때는 기수의 판단력과 기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력질주의 단판 승부가 원칙이 되자, 경주에서의 2~3m가 극히 중요하게 되었다.
말의 혈통과 족보
단거리 경주를 제외한 모든 평지경마에는 서러브레드종 말이 출전한다. 서러브레드는 아라비아 말, 바바리 말, 터키 말을 영국 토종말과 교배하여 품종을 개량한 경주마이다.
말들의 혈통을 기록한 대장은 17세기초부터 있었지만,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1791년 웨더비는 그때까지 발행된 〈경마편람〉과 매매계약서를 바탕으로 말의 족보를 확립한 〈일반혈통대장 An Introduction to a General Stud Book〉을 출판했다. 개정판이 나오고 몇 년 후부터 해마다 발간되었다.
모든 서러브레드종 말은 1690~1730년에 영국에 도입된 3필의 '동양산' 종마인 달리 아라비안, 고돌핀 바브, 바이얼리 터크와 찰스 2세가 도입한 43필의 '왕실' 암말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다. 영국의 경마가 국제경마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혈통대장〉도 1791년부터 다른 혈통대장들의 표준이 되었다.
웨더비는 자신이 만든 혈통대장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 적은 없으며, 1838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프랑스 말 혈통대장 Stud Book Francaise〉도 마찬가지였다. 이 혈통대장은 서러브레드종으로 '동양산'(아라비아 말, 터키 말, 바바리 말)과 '영국산'(영국식에 따른 혼혈종)의 두 종류를 포함시켰는데, 이를 나중에는 '영국 순종'(chevaux de pur sang Anglais) 하나로 통합했다.
1897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미국 말 혈통대장 The American Stud Book〉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멕시코의 일부 지역에서 태어난 망아지도 포함되었다. 각국의 혈통대장 사이에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던 상호 존중 관계는 1913년 영국 경마 클럽이 제정한 저지 규정(Jersey Act)으로 인해 깨졌다. 이 규정이 영국이나 아일랜드가 아닌 지역에서 태어난 말을 서러브레드종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이 규정은 영국산 서러브레드종에 북아메리카(주로 미국)산 경주마의 피가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을 표면상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당시 미국 경마의 본산이던 뉴욕 경마장의 폐쇄도 미국산 말의 침투 위협이 되었다. 1940년대에 '더러운' 미국산 말의 피가 섞인 프랑스 말들이 영국 경마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하자, 1949년에 저지 규정은 폐지되었다.
경마 클럽과 경마위원회
1750년경에 뉴마킷에서 창설된 영국 경마 클럽은 종래의 킹스플레이트 규정과는 대조적으로 여러 종류의 경마를 고려한 독자적인 경마규칙을 만들었다.
나이가 다른 말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원래 뉴마킷에서만 적용되었지만, 〈경마편람〉에 이 규정이 실리자 다른 곳에서 열리는 경마도 이것을 본보기로 삼게 되었다.
영국 경마 클럽은 〈경마편람〉과 〈일반혈통대장〉의 소유권을 얻었고, 19세기에는 마침내 영국의 경마대회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운영권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경마촉진협회(1833 창설)가 프랑스의 경마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1969년부터는 경마편람도 관리하고 있다. 혈통대장은 정부의 농업부에서 발간한다.
미국에서는 각주의 경마위원회에서 경마대회를 관리하고, 경마장은 개인이 운영한다. 1894년에 뉴욕에서 결성된 북아메리카 경마 클럽은 한때 미국의 경마대회를 광범위하게 지배했다. 미국경마클럽은 〈경마편람〉과 〈미국 말 혈통대장〉을 발간한다. 영국의 경마는 19세기에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남아프리카 공화국·인도로 퍼졌고, 그 나라들의 경마관리단체는 대부분 영국경마클럽을 모방했다.
발전
1751년에는 63.5㎏의 중량을 부담하는 5살된 말과 57㎏의 중량을 부담하는 4살된 말이 킹스플레이트에 출전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경주로도 2마일(3.2㎞)로 단축되었다. 이때쯤에는 4살된 말을 대상으로 하는 그밖의 경기도 뿌리를 내렸으며, 1731년에는 3살된 말이 50㎏의 중량을 싣고 3마일의 거리를 1회 달리는 경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4살된 말의 장거리 경마가 18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장거리 경마를 대신한 단거리 경마라는 것도 거리가 짧다는 뜻이 아니라 1회 시합으로 승부를 판가름한다는 뜻이었다.
오늘날의 경마
영국에서 5대 클래식 경마가 발족한 것이 근대경마의 시발점을 이룬다. 18세기말에 세인트레저(1776)·오크스(1779)·더비(1780) 경마가 잇따라 발족했고, 뒤이어 투사우전드기니(1809)와 원사우전드기니(1814)가 가세했다. 이 클래식 방식은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프랑스의 클래식은 경마 클럽상 대회(1836), 파리 그랑프리 대회(1863), 개선문상 대회(1920)이고, 미국의 클래식은 벨몬트 스테이크스(1867),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1873), 켄터키 더비(1875)이다(→ 스포츠 기록 : 경마).
핸디캡 경마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핸디캡 경마에서는 말의 나이에 따라 부담중량이 조정되었다. 2살된 가장 어린 경주마에 대해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봄에 시즌을 시작할 때는 부담중량을 더 많이 줄였고, 가을로 갈수록 부담중량을 차차 늘렸으며, 경주로의 거리(1.2~2.4㎞)에 따라서도 부담중량을 조정했다. 그리고 암말에 대해서는 수말의 부담중량보다 대체로 1.35~2.25㎏을 줄여주었다.
말의 나이는 북반구에서는 1월 1일부터 계산하고 남반구에서는 7월 1일이나 8월 1일부터 계산한다. 부담중량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은 그 말의 경주기록을 근거로 결정되었다. 그런 핸디캡은 경마가 중앙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경우에는 중앙에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각각의 경마장에서 결정할 수도 있는데, 핸디캡을 주는 목적은 모든 말의 경주 조건을 되도록 거의 동등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1861년에 시작한 핸디캡 경마인 멜버른컵 대회는 남반구에서 가장 중요한 경마이다. 19세기에 발족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핸디캡 경마와 브루클린 핸디캡 경마 및 서버번 핸디캡 경마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였고, 지금도 3대 클래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1935년에 시작한 샌타아니타 핸디캡 경마는 10만 달러가 넘는 상금을 내걸어, 상금을 주는 경마의 선구자가 되었다.
경주마의 나이
경주마는 5살에 절정에 달하지만, 클래식 경마의 참가자격 나이는 3살이고 상금의 계속적인 증액과 사육비 및 매도가격 문제로 4살이 넘은 말이 참가할 수 있는 경마는 그만큼 적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선문상 대회, 아르헨티나의 국제 카를로스폐예그리니 그랑프리, 오스트레일리아의 콜필드컵과 시드니컵, 브라질의 국제 상파울루 그랑프리, 영국의 조지 6세 앤드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 이탈리아의 경마 클럽 그랑프리와 밀라노 그랑프리, 일본의 덴노컵과 아리마기념배, 뉴질랜드의 웰링턴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로트만 7월 핸디캡 경마,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클라시코시몬볼리바르 그랑프리 등의 대회는 출전하는 말의 나이를 제한하지 않는다. 1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이 걸려 있는 미국의 60여 개 경마 가운데 약 절반이 3살 이상 말의 참가를 허용하고 있다.
상금과 등록료
기업이 경마를 후원하고 상금의 대부분을 내놓는 경마에는 영국의 킹 조지 앤드 퀸 엘리자베스 스테이크스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로트만 7월 핸디캡 경마가 있다. 미국에서는 가장 풍성한 대회들의 상금 대부분이 마주들의 등록료로 마련된다. 상금은 원래 승자가 전부 차지하게 되어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출전마 가운데 2등까지 상금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3등상과 4등상도 차츰 추가되었고, 때로는 5등을 해도 어느 정도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경마 내기
내기에도 똑같은 변화가 일어나 결국에는 1등·2등·3등 말에 대해 내기를 걸게 되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내기를 했지만 19세기에 마권으로 확대되었고, 영국에서는 지금도 이것은 합법적인 도박이다. 19세기말에 이르자 전세계의 경마장에서는 우승마를 알아맞힌 사람들에게 판돈에서 수수료와 세금을 공제한 전부를 분배하는 내기방식을 채택했다.
20세기에 계산기가 도입되자, 판돈의 총액뿐 아니라 1등·2등·3등에게 각각 걸린 내기돈이 거의 즉시 계산되었고, 이중승식(같은 날 처음 두 경주의 1등마를 알아맞히는 것), 연승식(한 경주에서 1등과 2등을 차례대로 알아맞히는 것), 연승복식(연승식과 같지만 1등과 2등의 순서를 따지지 않는 것), 3연승 단식(한 경주, 대개는 마지막 경주에서 1등·2등·3등을 차례대로 알아맞히는 것) 같은 특수한 내기도 쉽게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경마가 큰 규모의 사업으로 발전하자, 정부가 장외 투표 방식으로 내기에 참가했다. 이것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프랑스에서는 경마에 큰 보탬이 되었으나, 영국·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조직범죄단이 불법 장외마권에 손을 뻗쳤다.
말 번식의 이론과 실제
번식의 기본원칙은 암수 모두 가장 우수한 말들 사이에서 가장 우수한 말이 태어난다는 것이다(동물육종). 새끼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새끼를 낳은 적이 없는 말들의 경우에는 족보, 혈통, 경주능력, 신체적 균형을 보고 자격을 정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수컷인 종마가 새끼의 능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했지만, 그후 새끼가 갖는 자질의 거의 절반은 암말한테서 물려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마장
경마장의 소유권은 소련에서처럼 정부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소련에서는 연방정부가 경마장과 경주마를 소유하고, 조련사와 기수 및 마부를 비롯하여 경마에 필요한 인원을 고용했다), 미국에서처럼 개인기업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미국에서는 개인이 경마장을 소유하고 이윤을 남기기 위해 운영하며, 경주마와 같이 조련사와 기수도 독자적으로 계약을 맺는다). 또는 정부가 경마장이나 경주마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그것을 업자에게 임대해주는 경우도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욕 경마협회처럼 비영리단체가 경마장을 소유하는 경우도 있다.
관람석은 프랑스의 롱샹 경마장과 영국의 애스컷 경마장과 같이 고급인 곳도 있고, 독일의 쾰른 경마장과 아일랜드의 커러 경마장과 같이 수수하고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 곳도 있다.
경주마 대기소도 역시 일정치 않다.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의 경주로의 노면은 풀밭으로 되어 있는 반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흙모래밭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풀밭이 많이 생기고 있다.
경마는 주로 낮에 벌어진다. 주로 유럽에 있는 오래된 경마장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관람석은 나중에 추가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예를 들어 3,600m의 경마를 펼칠 수 있는 영국 뉴마킷의 경주로는 90° 이상의 급회전을 해야 하는 부분이 없지만, 관중들이 경주를 다 볼 수는 없다. 새로 만든 경마장들은 타원형의 1마일 경주로를 갖고 있다.
경마 절차
경주마의 출전자격은 출전하기 전날 판가름된다. 경주하기 전에 기수는 몸무게를 재고, 경주마 대기소에 가서 조련사의 지시를 받고 말의 신원을 확인받은 다음 말 위에 오른다. 말과 기수들은 감독관들의 검열을 받고 몸을 풀기 위해 경주로를 따라 출발선까지 행진한다.
말들은 전기로 작동하는 출발문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칸막이가 되어 있는 출발점까지 걸어가거나 끌려 들어간다. 모두 제자리에 서면, 담당자가 전기장치를 작동하여 빗장을 끌어올린다. 경주하는 동안 감독관과 순회심판들은 이동촬영장치로 범칙 여부를 감시한다. 결승점에는 특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경주가 끝나자마자 사진을 확인하고 우승마를 발표한다. 경주 결과는 기수들이 다시 무게를 재고 그것이 적정한 무게임이 증명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는다.
무게를 잴 때, 기수·마주·조련사는 어떤 말이 주행을 방해했으므로 반칙을 범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감독관들이 반칙이라는 판정을 내리면, 1등으로 들어온 말이 꼴찌로 내려앉을 수도 있다. 감독관들은 경주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전광판에 배당금이 표시된다. 경주가 끝난 뒤에 우승마와, 출전마 가운데 한 마리를 표본으로 소변검사를 실시한다. 검사 결과 금지된 물질이 검출되면, 상금 지불에서는 결과가 바뀔 수 있지만 관중이 건 돈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시간기록은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나온다.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스피드가 생명으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1/5초까지 시간을 재는 반면, 미국 경마는 1/100초까지 기록한다.
경마 현황
20세기 후반에 이르자, 경마는 엄청나게 큰 사업이 되었다.
항상 12필 이상의 말이 경마에 출전했다. 옛날에는 경마가 하루나 이틀 동안 열렸지만, 나중에는 1, 2주일씩 계속되었다. 오늘날에는 특히 날씨가 좋을 때면 경마가 열리기로 예정된 날이 1년의 절반을 넘는다. 경마가 자주 열릴수록 더 많은 말이 필요해지고, 말들은 더욱 격렬한 경주를 벌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상금이 계속 늘어났다. 미국에서 1981년 새로 창설된 경마는 상금 액수를 명칭에 집어넣어 '앨링턴 밀리언 경마'라고 부른다. 평지 경마에 출전하여 100만 달러가 넘는 상금을 받은 말들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출전한 말들이다.
1980년대까지 20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받은 말은 2필이었다. 100만 달러의 상금을 받은 말이 종마로 나설 경우 100만 달러에 팔릴 수 있다. 콘퀴스타도르 시엘로는 50만 달러도 채 안되는 상금을 받고 3세 때인 1982년에 은퇴한 뒤, 무려 3,640만 달러에 종마로 팔렸다.
그밖에도 돈에 관한 기록은 마치 깨지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1973년 세크리테리어트의 종마인 볼드 룰러가 낳은 1살짜리 수망아지는 종마로서 능력을 시험받지도 않았는데 60만 달러에 팔렸다. 1982년에는 니진스키 2세가 낳은 1살짜리 수망아지가 무려 425만 달러에 팔렸다.
모든 마주가 그런 돈을 벌거나 쓰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경주마들이 경마에서 벌어들이는 평균수입은 2,000달러도 되지 않는다.
도박이 있는 곳에는 속임수가 있게 마련이고, 경마의 역사는 되풀이되는 매수와 부정선수 시비로 얼룩져 있다. 1960년대에 말에게 항염증제와 응고제가 널리 사용되자, 이 스포츠는 새로운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68년 켄터키 더비에서 우승한 말은 경주가 끝난 뒤에 받은 소변검사에서 금지된 약물이 검출되어 자격을 박탈당했다.
여러 경마단체가 그런 약물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경마단체도 있다. 특히 미국의 지나친 경마는 그런 약물의 사용을 조장하고 있다.
한국의 경마
한국에서는 1909년 6월 13일 훈련원(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기병대를 대상으로 열린 기병경마대회가 최초의 근대식 경마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이영철(李榮喆) 참위(지금의 소위)가 우승했다. 그후 1922년 4월 조선경마구락부가 창립되어 한강 백사장에서 매년 봄·가을에 열렸다. 1924년 이후에는 평양·대구·신의주·부산·군산 등지에 차례로 경마구락부가 발족되었다.
경성경마장이 신설동에 설치되면서부터 경마가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1932년 조선경마령과 시행규칙이 제정·공포되었고, 1933년에는 조선경마협회가 발족되었다. 1937년에는 전국에 걸쳐 모두 9개의 구락부로 늘었던 점으로 미루어 당시 경마가 대중적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2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가열되자 말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마사회령'을 공포하여 조선경마협회와 기존의 구락부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조선마사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1962년 한국마사회법(법률 1012호)이 제정되었으며, 1984년에는 마권발매를 전산화하고, 경주 실황을 컬러로 중계하기 시작하면서 경마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뚝섬에 있던 서울경마장은 1989년 과천경마장으로 이전하기까지 경마문화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승마경기장으로 건설된 과천경마장은 올림픽 이후인 1989년 서울경마공원으로 개조되어 1989년 9월 1일 첫 경주가 시행되었다. 1990년에는 제주도에 제주경마공원이 개장되어 조랑말 경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
2014년에는 서울경마공원의 이름을 '렛츠런파크'로 변경했다. 서울 렛츠런파크는 시설이 계속 확충되어 7만 여 명을 수용하는 6층 관람대 2개소와 가족공원, 승마장, 마사박물관 등을 갖추고 있다. 1,800m의 외주로, 1,600m, 1,000m의 내주로가 있으며, 최장 2,300m에서 1,000m 거리의 경주가 진행된다. 매주 주말 평균 6만 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며, 코리안더비, 그랑프리, 대통령배 등 20여 개의 경주가 연간 펼쳐진다. 렛츠런파크 서울 외에 렛츠런파크 제주,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이 있으며, 제주에서는 제주마로 경마를 시행하고 있다. 부산경남에서는 금요일과 일요일에 자체경주를 시행하며, 토요일에는 서울과 제주의 경마를 중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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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윤호중, 정지명, 김예기, <한국 경마산업의 발전과 경제변수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 한국체육과학회, 한국체육과학회지21, 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