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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남 남해군 남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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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을 떠나 다랭이마을로 가는 길은 경상남도가 자랑하는 바래길이다. 바래는 남해 사투리로 바다에 조개를 캐거나 해조류를 채취하러 가는 것을 '바래 간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갯벌로 가던 길을 이어 만든 코스이며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자리매김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환상적인 바래길을 한껏 음미하면서 달리다 보면 경상남도를 넘어 어느덧 우리나라 남단 끝에 있는 다랭이마을에 도착한다.
남해는 통영과 여수로 이어진 한려수도의 중심지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하는 남해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망망대해가 펼쳐지는데 벼랑에 걸려 있는 마을이 바로 다랭이마을이다. 이 마을의 유래를 알면 전화위복 또는 새옹지마가 이런 경우를 뜻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천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갈대가 많은 냇가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가천(加川)으로 바뀌었다. '다랑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 따위에 있는 계단식의 좁고 긴 논배미'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랭이' 또는 '달뱅이'라고 불린다.
다랭이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 계단, 10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것부터 1,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것까지 680여 개의 논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길, 집, 논 등 모든 것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곡선 위의 오선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다랭이마을이 생기게 된 경위는 간단하다. 선조들이 산기슭에 90도로 곧추 세운 석축으로 한 평이라도 더 논을 내서 쌀을 확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작은 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남해군 남면에 위치한 다랭이마을은 옛날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니 논 한 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있었다."
이처럼 작은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이라 해 삿갓배미, 삿갓다랑이 또는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바꿀 정도로 작다 해서 죽배미나 밥배미로 불린다.
다랭이 논은 이곳에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주민들의 눈물과 땀으로 만든 땅이다. 위정자나 지주들의 착취와 전쟁 등을 피해 오지 중의 오지로 이주한 가난한 농민들은 돌투성이의 가파른 비탈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걷어낸 돌로 논둑을 쌓고 물이 쉬 빠져나가지 않도록 점토나 흙으로 마감했다. 모든 일이 사람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목표는 손바닥만 한 땅도 논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의 눈물겨운 노동으로 일구었으므로 계단식 논은 생태 가치가 높다. 토양 침식을 막고 물을 머금어 홍수를 줄이며, 산속에 습지를 조성해 생물 다양성을 높였다. 태풍이 종종 부는데도 유실된 논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일부 전문가들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예술로 승화되어 계단식 논이 되었다고 극찬한다. 현재에도 기계가 들어갈 수 없어 여전히 소와 쟁기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곳이 많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이 오히려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명소를 만들었다.
계단식 다랭이 논의 가장 큰 문제는 물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다. 천수답각주1) 이 기본이지만 필요할 때 물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는 문제 역시 선조들이 슬기롭게 해결했다. 마을 자체가 설흘산과 응봉산을 등에 업고 있으므로, 위에서부터 고루 물을 댈 수 있게 수로를 각 논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를 만들기 위한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다랭이마을 사람들이 어렵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어촌인데도 남다른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바닷가 마을이라고 하면 어업이 주를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마을에는 포구가 없다. 이유는 마을 아래쪽 해변에 내려오면 금방 알 수 있다. 거친 파도와 많은 바위 때문에 조각배조차 정박할 공간이 없다. 더구나 태풍도 잦아 배의 쉼터가 되지 못해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다.
이런 기후는 마을의 지붕들이 나지막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매서운 바람에 번뜻한 집들이 남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을 때 마을 뒤 설흘산에 오르면 남해도의 바다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늑도가 수평선 위로 아득하게 보이지만, 어업을 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고단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다랭이마을은 얼마 전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연 평균 소득이 낮은 지역 중 하나였다. 현재 다랭이마을에는 58가구 1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약 1.5배 많을 정도로 생산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선조의 땀이 밴 한 뼘의 역사가 희망이 되어 2002년 환경부는 다랭이마을을 '자연생태보존우수마을'로 선정했고, 2005년 문화재청은 명승 제15호로 마을 전체를 포함한 다랭이 논을 지정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다랭이마을을 '색깔 있는 마을'로 선정했다. 이뿐이 아니다. CNN에서 운영하는 〈CNN GO〉는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곳' 중 하나로 다랭이마을을 선정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남해군 서쪽 최남단에 있는 작고 잘 보존된 다랭이마을은 탁 트인 바다 뒤에 있는 가파른 산비탈에 셀 수 없이 많은, 아주 작은 계단식 논의 기이한 광경이 특징이다."
다랭이마을은 국내외를 통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고 그 효과는 그야말로 놀랍다. 빈한한 바닷가 마을에 불과했던 곳이 2011년만 해도 30만 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란 이름을 벗어던지면서 명승지로 자리 잡았다. 조상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던 좁은 다랭이 논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벼와 마늘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다랭이마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으로 고작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마을 출신 김종철 씨가 면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을 뒤쪽의 설흘산 등산로를 개발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산에 올라 환상적인 경관을 보면서 입소문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단 5년 만에 다랭이마을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전화위복과 새옹지마가 이런 경우를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랭이마을 주민들이 이런 혜택에만 안주한 것은 아니다. 허물어져 가던 집을 고쳐 펜션과 민박 시설로 탈바꿈하고 마을의 주변 볼거리를 코스로 엮었으며 다랭이 만들기, 농사 체험 등 사계절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골목마다 친절한 간판이 세워졌으며, 나무 난간으로 이루어진 산책로도 편리하게 조성했다. 지붕에는 알록달록한 꽃과 유자, 마늘을 큼지막하게 그렸고, 담벼락은 마을의 일상을 묘사한 각종 벽화로 장식해 탐방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다랭이마을의 원천적인 경쟁력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랭이마을은 다랭이 논으로 유명하지만 이제는 벼농사를 많이 짓지 않고 마늘 밭이 주를 이룬다. 다랭이 마을에서 마늘을 기르게 된 데는 이력이 있다. 남해에는 과거에 마늘 밭이 많았는데 어느 해 마늘을 심은 농가가 늘어나는 바람에 마늘 값이 폭락했다. 이때 마늘 밭에서 저마다 일정량의 마늘을 뽑아냈더니 마늘 값이 폭등해 오히려 소득이 좋았다고 한다. 남해의 마늘은 다른 지역보다 맵고 알이 굵어 질이 좋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많은 곳에서 마늘을 심는 까닭은 남해대교 등의 개통으로 뭍과 마을을 잇는 다리가 생겨나면서 유통이 편리해졌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마을 사람들이 마늘 농사를 짓지만 대부분 민박으로 생계용 직종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 마을에서 민박을 치지 않는 집을 찾기 힘들 정도이지만 먼 옛날 농토 한 뼘이 아쉬워 산비탈을 깎아 만들었다는 계단식 논과 마을의 풍광은 여전하고, 남쪽 바다는 변함없이 새파랗다.
삼천리 방방곡곡 마을마다 대개 남근이나 여근을 뜻하는 한두 개의 이름들이 있다. 이런 이름들은 고대 성기 숭배 신앙의 흔적이거나 기자각주2) 신앙이 결합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풍수지리상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워 음기와 양기의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무덤을 여근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묘 앞에 세우는 망주석은 남근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이 둘이 결합해 자손들이 번창하고 복 받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랭이마을은 우리나라의 성 신앙의 메카라고 불리는 곳이다. 2005년 명승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민속학자들에게는 매우 유명했다. 현지에서는 미륵바위로 통하고 공식적으로는 '가천암수바위(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라고 불리는 대형 성기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성기 바위로는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며 숫바위는 높이 5.8미터, 둘레 약 1.5미터로 발기한 남자 성기 모양이고, 암바위는 높이 3.9미터, 둘레 약 2.5미터로 잉태해 배가 부른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양이다. 바다를 등지고 마을을 향해 비스듬하게 짝을 이룬 형상으로 자연석 화강암이지만 숫바위는 인공을 가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귀두와 힘줄이 사실적이다. 안내문에는 영조 27년(1751) 땅속에 묻힌 바위들을 캐냈다고 한다.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내가 묻혀 있는 곳에 사람과 짐승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해 견디기 어려우니 나를 일으켜주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조광진이 아전을 데리고 가천에 가보니 꿈에 본 것과 똑같은 지세가 있어 땅을 파자 숫바위와 암바위가 나왔다. 조광진은 암바위는 누운 그대로 두고 숫바위는 일으켜 세웠다. 또한 바위 이름을 미륵이라 하고 다섯 마지기 논을 제답으로 바쳐 해마다 미륵이 발견된 음력 10월 23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리게 했다.
부정 없는 동민 중에서 제주와 집사를 선정해 제를 올리는데, 미륵에 대한 제사이므로 어육과 술을 일체 쓰지 않고 과일, 떡, 나물 등을 큰 그릇에 담는다. 제의의 목적은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풍어의 기원이다. 미륵불의 영험함이 소문을 타고 펴져나가자 마을 사람뿐 아니라 남해, 사천, 통영 등지의 사람들도 참여해 미륵계를 만들어 제를 주관했다.
어부들은 처음 잡은 고기를 이 바위 앞에 놓고 빌면 고기가 많이 잡히며, 해난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의를 행할 때 계원의 이름을 부르면 이들의 집안이 무사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알려진다. 제를 마치면 제물을 사방에 조금 흩뜨리고 땅에 파묻은 뒤 나머지는 가지고 와서 다음 날 동민들과 음복을 한다.
다랭이마을의 제의는 민속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나 마찬가지다. 풍요와 다산을 빌던 민간의 성기 신앙에 불교가 융합되어 민중 구제의 미래불인 미륵으로 신격이 격상되면서, 종교적 기능이 확대되고 신체(神體)의 신성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즉, 남해 현령이 바위를 땅에서 파내 미륵불로 봉안했다는 전설을 통해, 관의 권위를 빌려 신앙에 품위를 부여한 것이다. 바위 한 쌍의 신격이 성기 숭배 대상물에서 미륵불로 변했지만, 불교 신으로서의 변모가 아니라 본래 지닌 풍요 다산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마을 수호, 기복, 치병, 소원 성취, 태평 무사 등으로 기능이 확대되어 성 숭배 신앙의 추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한다.
사람들은 암수바위를 손가락질하거나, 욕심을 부려 바위 가까이에 작물을 심으면 화를 입는다고 생각했다. 상여도 반드시 바위 아래로 지나가야 변고가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새가 암수바위에 앉으면 죽을 정도로 영험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미륵바위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자 타 지역 사람들도 찾아와 촛불을 밝히고 치병, 소원 성취 등을 기원했다. 아들을 못 낳은 여자들은 소문을 듣고 무당을 데리고 와서 푸닥거리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다랭이마을에는 또 다른 특별한 민속자료가 있는데 바로 밥무덤이다. 밥무덤은 마을의 중앙과 동·서쪽 3군데에 있다. 중앙에 있는 것은 삼층탑 모양의 조형물로 밑변 180센티미터, 높이 162센티미터나 된다. 동쪽 언덕과 서쪽 언덕에 있는 것은 돌을 쌓아 감실각주3) 처럼 만든 것이다.
밥무덤은 굴뚝처럼 생겼으며 제사를 지낼 때 밥을 정갈한 한지에 서너 겹으로 싸서 정성껏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반반한 덮개돌을 덮어두는 것이다. 제물로 넣은 밥을 쥐, 고양이, 개 등의 짐승이 해치면 불길한 일이 생기거나 신에게 바친 밥의 효력이 없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음력 10월 15일 주민들이 모여 마을 중앙에 있는 밥무덤에서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축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그러나 밥무덤의 또 다른 목적은 먼 거리 항해 등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어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들을 위해 밥을 묻어둔다는 의미도 있다. 밥무덤에 제사를 지낸 일주일 후 음력 10월 23일 밤 12시경 남근바위로 가서 미륵제를 올린다. 그러므로 밥무덤의 동제는 남근바위의 미륵제를 지내기 위한 식전 행사라고도 볼 수 있다.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유독 밥무덤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상대적으로 경작할 논이 적어 쌀이 귀한 지역이므로 쌀에 대한 애착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신앙으로 변모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귀한 제물인 밥을 땅속에 넣는 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모든 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풍요를 점지해 주는 땅의 신, 즉 지모신에게 밥을 드림으로써 몇십 배 또는 몇백 배의 풍요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의 표출이라고 풀이한다.
우리나라 도처에 동제 또는 당산제를 지내는 곳은 많지만 밥무덤 제사를 지내거나 밥을 묻는 제의를 행하는 곳은 많지 않다. 예부터 이런 제의가 전승되고 있는 곳으로는 남해군 본섬과 창선도, 남해군과 사천시 사이 해협에 있는 신수도, 초양도, 마도, 늑도와 사천시의 사남면 화전리, 용현면 용치리, 곤양면 환덕리 등이다. 마을 행사인 암수바위 미륵제와 밥무덤 동신제는 문화재청이 지정하는 자연 유산 민속 행사로 지정되었다.
인근에는 남해대교, 창선삼천포대교, 사촌해수욕장, 상주해수욕장 등이 있다. 금산(681미터)은 삼남 제일의 명산으로 불리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 공원이다. 또한 금산 정상 부근에 있는 보리암은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하나다.
창선교 옆 지족해안에는 2010년 명승으로 지정된 죽방렴이 있다. 죽방렴이란 참나무와 대나무를 발처럼 엮어 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고, 물때를 이용해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재래식 어항이다. 한국 특유의 고기 잡는 법이 놀랍기 그지없다.
충무공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열린 관음포, 충무공이 전사한 후 유해가 제일 먼저 육지에 안치된 이락사,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은 승병들이 용감하게 싸운 용문사도 인근에 있다. 용문사에서는 숙종이 호국 사찰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 금패를 볼 수 있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되었던 노도는 벽련항에서 배가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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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윤순영, 「아무리 가팔라도 산사태 모르는 다랭이 논의 지혜」, 『한겨레』, 2011년 8월 15일.
- ・ 김선규, 『김선규의 우리 고향 산책』(생각의나무, 2002)
- ・ 이다일,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네이버캐스트, 2009년 7월 1일.
- ・ 유연태 외, 『우리나라 최고의 가족 여행지』(시공사, 2006)
- ・ 이용한, 『이색 마을 이색 기행』(실천문학사, 2002)
- ・ 김기빈, 『땅에 새겨진 문화유산』(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 2006)
- ・ 김두관, 「바닷가에 펼쳐진 수채화, 남해 바래길」, 『시사IN』, 2011년 5월 13일.
글
출처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인 한국의 전통 마을.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우리 전통 마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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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다랭이마을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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