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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충남 아산군 송악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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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답사지로 외암마을을 잡은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중요 민속 문화재로 지정된 일곱 마을 중 하나이며 앞으로 답사할 마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마을이라고 언제나 환경적으로 완벽한 조건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땅덩어리가 그다지 크지 않으므로 마을이 들어서기에 이상적인 입지가 많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풍수지리 등을 고려할 때 완벽하게 입맛에 맞는 천혜의 입지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입지에 조성된 마을이 더 많다. 외암마을도 그중 하나다.
외암마을의 기본적인 지형 조건을 보면 광덕산에 북쪽으로 뻗은 설화산(441미터)을 주산으로 하고 멀리 남서쪽에 위치한 봉수산(535미터)을 조산으로 한다. 설화산은 마을 남쪽 약 4.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광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금북정맥에 속하는 산악이다.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외암리의 내맥을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이라고 보는데 용이 제 몸을 휘감아 꼬리를 돌아보는 모양을 말한다.
외암이라는 이름은 마을 입구에서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설화산 바위에서 연유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대체로 외암리 서쪽에 있는 역말과 관련 있다고 추정한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부터 시흥역이 있었는데 외암마을은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므로 오양골이라고 불렀고 오양의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마을 정면의 야트막한 산이 면장산이다. 주민들은 흔히 '면적산'이라고 하는데 주변 산악 가운데 가장 먼저 떠내려와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외암마을은 전통 마을의 기본인 배산임수형이 아니다. 우선 마을과 산 사이에 논이 있어 산기슭에 기대어 있지 않다. 더욱이 마을의 북쪽과 서쪽으로 큰 내가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상 백호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겨울에 북서 계절풍에 노출되는 등 환경적으로 불리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렇게 열악한 입지임에도 중요 민속 문화재로 지정된 까닭은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발휘해 전통 마을의 특성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봉수산과 설화산의 맑고 깨끗한 물과 공기를 이어받은 외암마을에는 500여 년 전 강씨와 목씨가 살았고 일정 기간 동안 평택 진씨가 주로 살았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의 묘가 외암마을 남쪽으로 약 500미터 거리에 있다. 그런데 16세기에 이사종(?~1589)이 참봉 진안평의 맏딸과 결혼하면서 예안 이씨 일가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혼인 풍속인 남귀여가각주1) 가 행해지던 시기이므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외암마을이 본격적으로 예안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입향조 이사종의 5대손 외암 이간(1677~1737)부터다. 그는 숙종 36년(1710) 장릉 참봉에 천거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는데, 숙종 42년(1716) 다시 천거되자 세자시강원 자의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 능력이 매우 탁월했던 모양이다. 이후 종부시정, 회덕현감, 충청도도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서 주로 지내면서 권선재를 건립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외암유고』를 남겼다. 그는 조선 후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명으로 호서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51세인 1737년에 사망하자 정조는 이조참판을,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사후에 불천지위각주2) 로 모셔지면서 외암마을이 예안 이씨의 씨족 마을로 자리를 굳힌다. 외암의 묘는 현재 마을 입구의 소나무 숲에 서향으로 위치해 있다.
외암리는 조선 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성렬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 운동에 관여했다. 퇴호 이정렬(1868~1950)도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은 근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로 그는 어려서부터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7세 때(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내전에 들어가 사건의 전말을 명성황후에게 고해 명성황후로부터 직접 '원대지기(遠大之器)'라는 칭송을 들었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는데 34세 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 조약과 사법권 이양을 요구하자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 책임자인 외부대신을 탄핵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관직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직접 복직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나 끝내 사퇴했고, 일제 강점기가 되자 충남 일대의 항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살던 집이다.
외암마을은 입구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가므로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 밖에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다.
대부분의 전통 마을에는 다리를 건너기 전 효자, 효부의 정려각이 있기 마련인데 외암마을에는 안동 권 씨의 정려각이 있다. 권 씨는 예안 이씨 이용덕에게 13세 때 시집왔는데 불행하게도 다음 해에 남편이 요절했다. 청상과부가 된 권 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가사를 이끌다 86세에 사망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자 1978년에 정려각을 세운 것이다. 장승과 솟대도 세워져 있는데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암마을 입구에 있는 반석과 석각도 자랑거리다. 물레방아와 정자 아래 개천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고 마을 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글이 새겨진 석각이 있다. 외암동천은 높이 52센티미터, 너비 175센티미터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인 이용찬이 썼다. 동화수석은 높이 50센티미터, 너비 2미터로 역시 예안 이씨인 이백선이 썼다.
현재 개울 왼쪽에 재현되어 있는 섶다리는 외암마을의 전통을 보여주는 예다. 섶이란 작은 나뭇가지를 지칭하며 섶다리는 초겨울에 나무, 솔가지, 흙 등으로 만들어 여름 장마에 떠내려가게 했던 임시 다리의 일종이다. 매년 마을 사람들이 연중행사로 공동으로 만들면서 결속력을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
그러나 현재 설치된 섶다리는 원래 자리에 복원된 것은 아니다. 원래 장소는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곳이며 바닥 바위 위에 섶다리를 만들 때 사용한 돌구멍이 보인다. 둥그런 두 개의 구멍에 평상시에도 가득 개울물이 고여 있어 섶다리용임을 곧바로 알 수 있다. 한편 섶다리는 매년 홍수가 날 때 떠내려가는데 이곳의 다리는 그러지 않도록 구조를 튼튼하게 보강해 전통 섶다리와는 다소 다른 형태다.
마을의 건물들은 크게 두 가지 기준에 의해 배치되었다. 하나는 마을 가운데를 지나가는 안길을 활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을 동남쪽에 있는 개천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을 안길은 마을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중심축으로, 개천은 마을 전체의 범위를 한정하는 기준으로 활용했다.
안길은 마을 공간을 이루는 공동 시설들과 주요 건물들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마을 후면의 주거지 경계까지 이어진다. 반면 샛길은 안길이 형성된 후 뻗어 나온 길로, 점차 조성되는 대지에 접근하는 데 이용되는 골목이다. 샛길은 남부 지방에서는 고샅, 제주도에서는 올레라고 불린다.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좌우로는 주로 주택들이 들어서고 개천 밖으로는 장승, 솟대, 상엿집처럼 사람들이 상주하지 않는 공동 시설들과 농경지가 자리 잡았다. 예안 이씨가 정착한 근원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현재의 건재고택을 중심으로 가옥들이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주거 영역은 입구의 다리가 출발점이고 후면, 즉 동남쪽은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물길의 출발점이자 마을 영역의 한계점이다. 즉 물길을 벗어난 영역은 설화산의 화기가 미치므로 그 화를 피할 수 있는 수로의 출발점까지가 마을의 범위다.
다리를 건너면 동서 방향으로 주거지의 중앙을 관통하는 안길이 나타난다.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커다란 느티나무다. 높이 21미터, 둘레 3미터에 나이는 550세라고 하니 예안 이씨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중요시하는 것은 느티나무 앞에 단을 놓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매년 음력 정월 14일 장승제를 지낸 후 느티나무제를 지낸다. 멀리서도 눈에 띄어 그 지역에서 방향의 기준이 되는 것을 안정좌 또는 랜드마크라고 한다. 이곳의 느티나무는 마을 입구에 있기는 하지만 마을 자체와는 다소 떨어져 있다.
주변 지세가 아늑한 영역을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집들이 완만한 경사지를 최대한 이용해 외암마을의 내부에서는 별다른 허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택들은 표고각주3) 50미터에서 175미터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균 경사도는 25퍼센트다. 다른 전통 마을보다 다소 높지만 경사를 잘 이용해 집의 후면은 어느 정도 아늑하다.
외암마을은 위치상 겨울에 북서풍에 노출된다는 환경적 불리함이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런 악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좀더 나은 거주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불리한 자연 조건에 적응한 인문 경관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옥의 평면 구조와 좌향이다. 또한 설화산과 이간 선생 묘소를 잇는 능선상에 마을의 우백호로서 비보 역할을 하는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위치상 마을 북쪽에 있어 방풍림 역할도 한다. 외암마을처럼 불리한 입지 조건을 환경 친화적 요소로 극복했다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입지에 자리한 마을에서 얻는 교훈이다.
외암마을의 특징은 물이다. 앞내 강당골을 건너 마을 어귀의 정자인 반석정을 지나면 본격적인 마을 순례 길, 즉 동서 방향으로 마을 주거지의 중앙을 관통하는 안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길은 주거지의 뒷부분인 외암사당에서 끝나는데 주거지 안쪽에 들어가보면 특이하게 좁은 도랑이 마을을 누비고 있다. 이는 간단한 배수로가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물길을 적극적으로 주거지에 도입하지만 한국의 경우 배수로 이외의 수로는 대체로 주거지 외곽의 경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주거지 후면에는 설화산 계곡에서 내려온 개울물을 마을로 끌어들이는 유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주거지 안으로 들여온 물을 모든 길에서 끌어들여 사용할 수 있도록 유입구의 위치를 주거지의 가장 뒤로 정한 것이다. 주거지 내부로 들어온 물은 주로 안길의 북쪽 부분을 한바탕 휘돈 후 앞개울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외암마을에서는 거의 모든 집이 물을 지척에 두고 있다. 다만 겨울철에는 개울물이 유입되지 않도록 막는다. 추운 날씨에 수로가 동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수로를 마을 안에 끌어들인 이유도 풍수지리와 관계있다.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의 '화' 발음이 불 화(火) 자와 같으므로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물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를 풍수에서는 염승 기법이라 한다. 화를 제압한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적응해 나가기 위한 선조들의 빼어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풍수지리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수로를 흐르는 물은 유사시에 방화수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실용적인 의미도 있다. 외암마을에서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므로 불을 가장 경계한 것도 수긍이 간다.
이택종 외암민속관관리팀장은 수로의 물에는 또 다른 실용적인 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건재고택, 교수댁 등 격식을 갖춘 몇몇 상류층 집은 수로의 물을 모아 연못을 조성했다. 수로의 물을 조경수로 사용한 것이다. 물론 비가 많이 올 때 수로가 빗물의 배수로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수로의 물은 평상시 생활용수로 사용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용도는 빨래다. 현재에도 흔적이 보이는 빨래터는 마을 사람들이 수로의 물을 공동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물이 주민들의 구심적 역할을 한 것이다.
외암마을에는 2012년 기준 69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농가 38가구, 농사를 짓지 않는 가옥이 31가구이며 거주민은 약 200명이다. 마을 내 가옥 수는 모두 213동이며 그중 기와 건물이 57동, 초가 128동, 기타 28동이다. 1990년까지 가구 수의 절반 이상이 예안 이씨였는데 계속 줄어들어 현재 36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민속 마을로 지정되면서 타지의 타성들이 많이 이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씨족 마을이라는 고유한 풍모를 잃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예안 이씨가 주류를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외암리는 행정적으로 1구, 2구, 3구로 나뉜다. 외암리의 중심 마을인 외암골(오양골)과 설화산 아래의 설화리가 1구, 외암골에 인접한 윗산막골 및 아산시 방향에 위치한 아랫산막골이 2구, 윗산막골 서쪽 들판 가장자리에 위치한 새말(새마을)이 3구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암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있는 외암골만 외암리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여기서도 그 관습을 따른다.
외암마을은 전통적인 상류 가옥, 중류 가옥, 서민 가옥이 함께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전통 마을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대부의 집은 기와집이고 일반 평민이나 노비의 집은 초가집이다. 그들 간에는 남다른 갈등이 있었지만 풍경으로 만나는 조화로움은 외암마을이 지닌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외암마을에는 돌이 많다. 예부터 삼다 마을로 알려졌는데 삼다란 돌, 말, 양반을 뜻한다. 마을의 돌담은 사람들을 수백 년 전으로 되돌려보내는 타임머신의 입구 역할을 하며 이를 한번에 이으면 5.3킬로미터나 된다. 외암마을은 땅 밑 일정한 지층까지 호박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돌을 걷어 경작지를 만들고 집터를 확보하면서 걷어낸 돌로 담을 쌓았다. 줄눈각주4) 이나 속흙 채움 없이 막돌로만 쌓아올린 담이다. 돌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고 동결로 파괴되지 않는다. 따라서 외암마을에서는 참판댁 같은 양반 주택의 담장조차 기와를 얹지 않았다.
돌각 담장의 두께는 위로 갈수록 줄어들어 맨 윗부분은 80~90센티미터이고, 돌담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모두 성인의 눈높이인 1.5미터 이하다. 두 공간 사이가 눈높이 이상인 물체로 차단될 경우 서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인식하는데 이를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한 것이다. 외암마을의 돌각 담은 낙안읍성마을의 돌각 담과 함께 '아름다운 마을 돌각 담'으로 꼽힌다. 물론 상류층 가옥에는 석회를 섞은 돌담도 보이나, 전반적으로 순수한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담으로 유명한 곳은 조실댁이다. 이 집을 45도 방향에서 바라보면 집의 모양을 반복한 듯 ㄱ자형으로 조성된 돌담이 특이하다. 사람을 집 쪽으로 이끄는 듯한 느낌을 주며, 문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돌담으로 적절하게 집 안을 가리는 역할도 한다.
외암마을의 길을 안길과 샛길로 나누어 살펴보면 마을의 공간 구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안길은 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느티나무를 거쳐 마을 뒤쪽 의암사당에 이르며 서에서 동으로 점차 높아지는 일자형이다. 폭은 3~5미터이며 길 양쪽을 따라 조성된 돌담으로 마을 안길이 뚜렷이 규정된다. 안길을 향한 필지에서 외곽에 건물을 배치할 때는 외벽 바깥으로 다시 돌담을 둘러 되도록 건물 외벽이 담을 겸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필지에 다소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길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나간 샛길은 끝이 서로 연결되어 고리를 이룬다. 필지가 샛길과 접할 때는 길과 주거 영역 사이에 텃밭이나 바깥마당을 두어 건물과 샛길이 직접 만나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 앞쪽 외곽에 있는 건물 외벽이 그 자체로 주거 영역의 경계가 된다.
외암마을에서 안길과 샛길이 만나는 방식은 십자형이기도 하고 T자형이기도 하다. 전통 마을에서 십자형으로 만나는 길은 매우 이례적이다.
가옥의 건립 순서는 송화 군수를 지낸 이장현의 송화댁이 가장 빠르며 그다음으로 병사댁, 건재고택, 교수댁, 감찰댁, 조실댁, 참봉댁, 참판댁 순이다. 이들은 대부분 안길의 북쪽에 위치한다. 안길의 동쪽 끝은 막다른 길처럼 되어 있고 일대에 종가와 외암사당, 송화댁, 참판댁 등 최상류층 가옥이 분포하고 있어 마을의 심층부임을 알려준다. 안길을 기준으로 남쪽 저지대는 일반 민가와 아직 택지화되지 않은 논 등이 분포하고 있다. 마을의 중요 유적을 설명한다.
건재고택
중요 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된 건재고택은 외암리를 대표하는 가옥이다.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집을 지은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영암 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한옥에 대해 약간 설명한다. '호'와 '채'는 다소 다른데 '호'는 일정 단위 면적 안에 집을 이루는 안채, 사랑채, 부엌 등 여러 요소를 합한 개념이다. 반면에 채는 단독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말한다. 한옥의 경우 집 하나에 여러 채의 건축물이 들어서므로 집 전체를 호라 부르고 하나하나를 독립적으로 채라 부른다.
건물의 구조를 설명할 때 3량가, 또는 5량가, 7량가라고 하는데 이는 지붕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른 설명이다. 3량가란 가장 간단한 구조로 지붕 가장 높은 곳에 마룻대각주5) 를 설치하고 지붕의 앞뒤 양쪽 가장자리에 두 열의 처마 도리각주6) 를 두어 세 열의 도리가 서까래를 받치는 구조로 우리나라에서 시공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간단한 방식이다. 일반적인 양반 건물은 5량가이며 더불어 원형 기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인접한 두 기둥 사이는 '칸'이라고 하는데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는 면적 개념으로 건물의 평면 규모를 산정하는 기준이다. 만약 정면 3칸 측면 2칸이라면 6칸 집이라고 한다. '칸 사이(주간)'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실제 거리를 의미하는데 칸수를 설정한 후 칸 사이를 설정하면 건물의 실제 길이가 설정된다. 기둥은 단면의 형태에 따라 원주, 방주, 각주로 대별된다.
건재고택은 규모가 매우 크며 큰 집과 작은 집이 별개로 배치되어 있다. 큰 집은 10칸의 ㄱ자형 안채, 5칸의 一자형 사랑채, 8칸의 一자형 문간채가 있으며 작은 집은 6칸의 ㄱ자형 안채, 7칸의 一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 구성은 대체로 안방 구들에서 꺾어져 놓이는 중부 방식이지만 작은 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 방식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 기단은 장방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만든 축대로 막쌓기 기법을 사용했다. 기단 위에는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았고, 각기둥 위는 공포 없이 납도리각주7) 가구 구조로 만든 팔작지붕 형태다. 사랑채는 두 칸의 큰 사랑방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누마루를, 동쪽에는 대청을 두고 앞과 뒤로는 툇마루와 쪽마루를 꾸며놓았다.
특히 큰사랑 부엌은 건물 중간을 가로지르는 부재인 중인방 상부를 벽으로 처리했다. 하부에서는 단을 낮춰 부엌에 기어서 들어가게 했다. 아궁이가 낮을수록 연기가 잘 빠져나가는 온돌 고래의 특성상 부엌 바닥을 낮게 만들어 놓았지만, 부엌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 고역을 치렀음은 틀림없다.
건재고택에는 여러 종류의 굴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굴뚝으로, 벽돌로 네모나게 쌓아 올린 후 옹기 굴뚝을 위에 올려놓았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가면 사랑채를 드나드는 손님들이나 사랑채 하인들이 안채를 직접 볼 수 없도록 ㄱ자형 담을 두고 있고 위로 연가각주8) 가 있다.
일반적으로 불을 잘 빼내기 위해 굴뚝을 높이 올리기 마련인데 이곳 굴뚝은 연기가 땅바닥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작은사랑에서 불을 때면 연기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로 향한다. 아래로는 연기가 깔리고 위로는 아름다운 정원의 나무들이 구름 위로 떠 있는 모습이다. 반대로 정원의 정자에서 사랑채를 바라보면 구름 위에 떠 있는 기와집처럼 보인다.
사랑채는 강돌을 양회각주9) 로 고정한 토석 담을 사용했고, 안채는 돌로만 쌓은 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담장 밖 대문채 서편에는 두 채의 호지집각주10) 이 초가삼간 크기로 서 있다. 한 채는 사랑채 협문각주11) 으로 드나들기 가깝고, 다른 한 채는 별도의 담장 구획 안에 있으며 안채 부엌 쪽으로 난 협문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다. 사이 담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널찍한 안마당에 후원으로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안채는 가운데 두 칸의 대청마루와 윗방, 안방이 대청 서편으로 있으며, 그 앞으로는 상부에 다락을 둔 두 칸의 부엌이 있다. 기둥은 4각이며 5량 가구로 마루 대공은 여러 판재를 사다리꼴로 조립한 판대공으로 꾸몄다. 안채 기둥에 많은 글이 걸려 있어 사랑채 같은 운치 있는 분위기가 흐른다. 안채는 동쪽에 곳간채를 두고, 위쪽에 가묘인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북동쪽 높은 곳에 있는데, 맞배지붕에 방풍판을 옆에 댄 전형적인 건물이다. 앞뒤 반 칸을 나누어 앞쪽은 마루, 뒤쪽은 가묘로 꾸며져 있다.
건재고택은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계곡물의 일부가 동쪽 담장으로 흘러들어 안채의 연못물과 만난 뒤 사랑채 마당에 꾸며진 연못으로 흐르는 모습이 압권이다. 외암리의 다른 집들도 계곡물을 이용한 연못을 갖추고 있지만, 건재고택은 별도로 담 아래에 우물이 있다. 사랑채 동쪽에 정자와 연지가 배치된 것은 마을의 지형적인 특징과 풍수지리를 조합해 건설했기 때문이다. 특히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든 깨끗한 정원수와 소나무와 향나무, 단풍나무 등은 완벽한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하다.
한옥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는데 외암마을은 많은 집이 정원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암마을에는 건재고택 외에도 참판댁 큰댁과 작은댁, 송화댁, 교수댁 등에 정원이 있다.
이참판댁
중요 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된 이참판댁은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이다. 고종이 이정렬에게 하사한 '퇴호거사'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 때 쓴 현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솟을대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마을의 안산인 면잠산 봉우리가 문간에 정확히 들어온다. 대문간의 높이가 문간채의 지붕과 같은 경우 평대문이라고 하며, 대문간의 높이가 문간채 지붕보다 한 층 높을 경우 솟을대문이라고 한다.
솟을대문은 주로 양반 가옥이나 서원, 향교의 정문으로 사용되며 말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대문으로서 과시를 확실하게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솟을대문이 민속 신앙의 솟대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솟대는 풍년을 빌거나 과거 급제자 등 경사가 있을 때 마을 어귀에 높이 세우던 장대로, 이런 기능을 솟을대문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솟을대문은 원래 종2품 이상의 고관이 '초헌'이라는 바퀴 달린 높은 가마를 타고 출입하기 위해 지붕을 높이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격변기에 이 같은 규범은 지켜지지 않아 일반 양반집에서도 솟을대문을 달기 시작했고 신분제가 유명무실해진 조선 후기에는 중인의 집에도 솟을대문을 설치하곤 했다.
큰 집의 안채는 10칸으로 서쪽 앞이 개방되었으며 한쪽이 튼 ㄱ자형으로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감싸 안은 모습이다. 5칸 사랑채는 一자형이며 문간채는 8칸으로 一자형이다. 돌담을 둘러서 집 안 공간을 구분했고, 안마당에는 안채로 가는 길에 넓은 판석을 깔아놓아 운치를 더했다. 비나 눈이 와서 마당이 질어지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디딤돌로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
작은 집은 안채가 6칸 ㄱ자형이며, 서쪽으로 대청과 연결된 두 칸 규모의 안방과 다락이 있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큰 집보다 오히려 큰 7칸 ㄱ자형이다. 안방과 윗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아 겨울에는 웃풍을 막고 여름에는 개방해 시원하게 바람이 통하도록 했다. 전면에 툇마루를 둔 안채 가운데는 띠살 무늬 4분합을 가진 대청마루가 있다. 안채가 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뜨거운 여름 태양이 직접 내리쬐면 방이 더워지기 때문에 툇마루 방벽을 2분의 1칸 정도 뒤로 물러 앉혀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태양의 변화에 대응해 쾌적한 실내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툇마루는 건넌방 동쪽까지 둘러져 있는데, 외암리 사대부집 안채의 기본 형태다. 건넌방 동쪽 편으로 띠살 무늬 2분합이 있어서 뒤뜰에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장독대는 회벽으로 칠하고 기와 담으로 둘러친 담장에 두었다. 전라도에서는 이런 예를 쉽게 볼 수 있으나 충청도나 경상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고방은 재래식 주택에서 가정용 창고와 같은 기능을 했던 공간으로 곳간이라고도 하는데, 규모가 큰 집은 이와 달리 '광'이라고 칭한다.
감찰댁
감찰댁은 잘 가꾸어진 사대부 집의 전형이다. 대청 앞의 평주각주12) 와 툇보각주13) 는 사각기둥이며 두 열로 서 있는데 마치 궁궐의 행랑을 보는 듯하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외암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한옥의 마당은 일반적으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농산물을 처리하는 일터인 동시에 경조사가 있을 때 이용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경은 대부분 후원으로 옮긴다. 그런데 감찰댁은 정원과 정자까지 갖추고 있으며, 마당에 나무를 심지 않는 한옥의 일반적인 특성에서 벗어났다. 정원에 심은 소나무는 고급 품종인 다복솔이다.
신창댁
신창댁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이용현에서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해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는데 이곳에서 6세손까지 살아 병사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손들이 서울로 이전해 병사댁이라는 택호가 사라지고 신창댁이라고 불린다.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의 부인 보성임의 친정이 신창인 데서 기인한 것으로 전형적인 한국 전통 가옥의 택호 붙임을 따른 것이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ㅁ자형 평면으로 사랑채가 따로 없으며,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건넌방 끝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외암마을 안에 있는 유일한 식당이다.
교수댁
마을의 서쪽 길을 따라 올라가다 골목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교수댁이 나타난다.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집이다. 예전에는 사랑채는 물론 안채에 연못까지 갖춘 규모였지만 지금은 사랑채가 사라지고 사랑채 앞은 돌담장으로 꾸며지는 등 크기와 주변 풍경이 모두 변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一자형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 ㄱ자형 안채를 배치했다.
교수댁은 외암마을의 다른 집들과 다르게 수석같이 자연을 닮은 돌로 정원을 꾸미지 않았다. 그 대신 사찰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부도각주14) 및 연자방아 주춧돌, 맷돌 등의 석재들이 진열되어 있다. 일각 대문각주15) 과 옛 사랑채에서 사용하던 주춧돌을 집 앞에 나란히 놓아 위용을 보여준다.
안채 오른쪽인 동쪽에 한 칸 크기의 맞배지붕 사당을 두고 있으며, 연못 옆에 정자를 만들고 연못 주위에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어놓았다. 안채는 3벌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 주춧돌을 이용했다. 네모난 방주로 기둥을 세운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대청마루를 포함해 건넌방과 전면 다섯 칸 반, 측면 한 칸 반의 크기다. 동쪽에 다락형 방을 두고 그 아래에 살창을 둔 부엌을 만들어 건넌방으로 난방한다.
송화댁
외암마을의 중심부인 느티나무를 지나서 건재고택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논이 나온다. 논을 끼고 돌담을 따라 설화산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마을 동쪽의 개울이 마을로 접어드는 길과 만나는 곳에서 송화댁이 보인다. 외암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이사종의 9세손인 초은 이장현(1779~1841)이 순조 10년(1810) 건설했고, 그가 송화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집 앞에 서면 초가집의 대문채가 기와집의 본채와 어울리지 않아 굳이 초가집으로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하지만 눈 오는 날 초가지붕의 대문채가 설화산과 커다란 소나무 숲과 어울리는 장면만은 천하일품이다.
남서향의 대문간에 들어서면 커다란 소나무 사이로 양 갈래의 길을 둔 넓은 정원이 있다. 송화댁 정원은 설화산 계곡물을 집 안에 끌어들여 정원을 갖춘 외암마을 사대부가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처럼 인공적인 손길을 최대한 절제해 만든 이 정원은 한옥과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한국 전통 정원 중 하나다. 건재고택이나 교수댁처럼 정자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언덕과 물의 흐름이 주는 자연미가 있고, 음양을 주제로 한 조선 후기의 반가 정원이다. 돌담장 안에는 넓은 텃밭과 장독이 자리하고 있다.
정원을 지나면 ㄱ자형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튼 ㅁ자 형태를 하고 있다. 정면 네 칸의 사랑채는 막쌓기 기단 위에 덤벙 주초각주16) 로 했다. 사랑채는 가운데에 사랑방을 두고 좌우에 한 칸 크기의 작은 마루방을 하나씩 두었다. 양 측면에 마루방을 두고 작은 방을 하나는 정면에, 다른 하나는 후면에 하나씩 두어, 결국 ㄴ자형 평면이 된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중문과, 사랑채 왼쪽 처마 밑에 낸 월문(月門)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월문은 저녁쯤 중문을 닫은 이후에 사용하는 문이다. 안마당에는 신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주요 통행로에 디딤돌을 엇비스듬히 놓았는데, 안채 부엌과 사랑방을 연결하는 디딤돌이 가장 크고 넓어 사용이 빈번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자연석을 적당히 가공한 2벌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안대청은 5량 구조이며, 부엌 부분은 3량 구조다. 본채에는 가운데에 대청을, 서쪽에 안방을, 동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서쪽으로 내민 날개채는 부엌이며 안방에 붙어 있다.
사랑 앞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산이 있는데 정원 돌 중에 양과 음을 상징하는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었다. 이런 돌이 사대부 집안에 있다는 것이 특이하지만 만물의 조화를 의미하며 생활의 편안함과 자손의 번영을 바라는 집주인의 염원을 상징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일은 아니다. 지금은 여근석은 사라지고 남근석만 외롭게 남아 있다.
외암종손댁
송화댁 위로 외암사당과 외암종손댁이 자리하고 있다. 약 900여 제곱미터에 가까운 부정형의 대지 남쪽 앞에 안채와 문간채를 배치했으며, 대문 앞에는 불천지위로 모시는 외암사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전면 열은 툇간 마루다. 안채는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방 쪽에 온돌방을 두었고 왼쪽 안방 아래에는 부엌을, 오른쪽 방 앞에는 마루를 냈다. 안채의 서북쪽 문간채 사이에는 간이로 만든 작은 정자를 세웠고 뒤편의 화단 앞으로 마을 물길이 지나가도록 했다.
조선 시대는 유교를 국시로 삼았으므로 사당을 중요시했다. 사당은 조상의 혼백을 모신 곳으로 사대봉사라 해 4대조(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까지의 신주를 마련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주자가례』에는 "집을 지을 때 다른 것보다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위치는 정침의 동쪽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사당이 살림집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당이 있어야 비로소 양반이 거주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당이 없는 집은 대청마루에 벽감각주17) 을 설치해 신위를 모셨다. 각 신위마다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존위 앞에 놓는다. 4대조를 넘는 조상의 신위는 매안이라 해 묘지 앞에 묻는다. 하지만 불천지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가문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천지위 사당이었다. 마을에 그런 사당이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외암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녹지로, 제2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 '마을 숲' 부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될 정도로 명성이 있다. 이곳은 녹지를 미적 감각에만 맞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능도 지니도록 배려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안길의 북쪽, 주 주거지의 경계부에 대나무 또는 소나무 군락이 선 또는 면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마을 남동쪽의 개울가에는 키 큰 나무들을 간헐적으로 심었다. 전자가 주거지 영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방풍이라면, 후자는 앞이 트인 데서 생기는 불안을 줄이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마을 북서쪽 구릉에 조성된 소나무 숲에는 마을의 불리한 지세를 보완하는 동수(洞蓚) 기능이 있다. 마을에 들어갈 때 왼쪽에 있는 소나무 숲도 마찬가지다. 동수들은 주거지를 아늑하게 가려주며 수구막이 역할도 한다. 마을 공간을 흐른 물길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곳을 수구(水口)라 하며 그것을 막는 것을 수구막이라 한다. 수구막이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이중환이 『택리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넓은 곳에는 비록 좋은 밭이 만 이랑이 있고 집이천 간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을 때는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 구할 것이다."
외암마을은 충청남도의 유비쿼터스 시범 마을 1호다. 각 가옥에 유비쿼터스 단자가 보급되어 한국의 정보화 마을 성공작으로 알려진다.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누구나 끈만 잡아당기면 자동으로 신고가 접수되어 어떤 상황이라도 곧바로 대처할 수 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휴대전화로 현재 상태를 알릴 수 있어 마을의 현황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마을 스피커도 흥미롭다. 한국의 근대화에 견인차 역할을 한 새마을 운동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도 마을 행사를 알릴 때 사용한다고 한다. 또한 안길을 기준으로 남쪽 저지대에 논이 있고 중간에 상여가 보관된 상엿집이 있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있던 필수품이었지만 대부분 사라졌는데, 외암마을에서는 아직까지 간수하면서 매년 전통 상여 행렬 재현 행사를 벌이고 있다. 건재고택에서 오른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별도로 보관하고 있으므로 눈여겨보기 바란다.
외암마을 건물은 초가가 절반 이상으로 새마을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도 원형이 보존된 이유가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면서 집의 구조는 변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선조들이 살아오던 터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했다. 따라서 지붕만 다시 초가로 바꾸자 과거의 전통 마을로 금세 돌아갈 수 있었고, 이 사실은 외암마을이 민속 마을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암마을은 연엽주로도 유명하다. 조선 고종 때 현감을 역임한 이원집이 궁중에 있을 때 왕에게 올린 술로 대대로 종부를 통해 전수되었다. 1990년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최황규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외암마을에서는 방문객과의 보다 밀접한 연계를 위해 달집태우기, 떡 메치기, 솟대 만들기, 장승제, 곤장 맞기 같은 민속 체험을 준비하고 있다. 4~6월에는 모내기를 비롯해 감자 심기, 고구마 심기, 냉이 캐기 등을 체험할 수 있고, 여름에는 옥수수와 감자 수확을 할 수 있으며, 10월에는 '집과 풀'을 주제로 한 짚풀문화제에 참여할 수 있다.
외암마을의 주산인 설화산 뒤에는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사위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는 맹씨행단이 있다. 이는 남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이다. 인근인 신암면 예림리에는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 있다. 추사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22세에 재혼한 부인이 예안 이씨 이병헌의 딸이며, 외암마을은 김정희의 처갓집이 있는 곳이다.
현재 김정희의 한글 편지는 40통이 전하는데 그중 부인 사후 며느리에게 보낸 2통을 제외하면 38통을 부인에게 보냈을 정도로 외암마을과 추사의 인연은 깊다. 264제곱미터 정도 되는 추사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와 사당채로 이루어져 조선 중기 중부 지방 대갓집의 전형을 보여준다. 댓돌 앞의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작은 돌기둥은 시간을 측정한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생가 안에는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추사의 종가 유물이 보존되어 있고, 고택 바로 곁에 추사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 앞에는 200여 년 된 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이 있다.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종자를 구해와 심은 소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일곱 그루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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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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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왕기, 『외암 민속 마을』(충청남도 아산시, 2009)
- ・ 한필원, 『한국의 전통 마을을 가다』(북로드, 2004)
- ・ 문화재청, 『목조 문화재 가꾸기』(문화재청, 2008)
- ・ 임석재,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
- ・ 박도, 『삼천리 금수강산 사뿐히 즈려밟고』(새로운사람들, 2007)
- ・ 서정호, 『한옥의 미』(경인문화사, 2010)
- ・ 신광철, 『한옥 마을』(한문화사, 2010)
- ・ 편집부, 「한옥에서의 하루」(한국관광공사, 2012);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정여창 고택)」, 다천당, 2007년 3월 3일.
- ・ 백남천, 『대한민국 베스트 여행지』(나무생각, 2008)
글
출처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인 한국의 전통 마을.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우리 전통 마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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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외암마을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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