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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북 성주군 월항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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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마을의 벽화와 수승대 등을 한껏 맛본 후 한개마을로 향한다. 이곳은 2007년 전국에서 7번째로 지정된 중요 민속자료 제255호다. 전통 마을의 한식 기와와 초가, 변형 가옥 등 75채의 가옥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10동의 건축물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미가 듬뿍 담긴 곳이다.
한개마을의 한자 이름은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 개'라고 부르며 여기서 '개'는 포구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러므로 '한개'란 마을 이름은 예전에 큰 개울 또는 나루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개마을은 풍수지리에 따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 원칙을 따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마을 뒤로 영취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뻗어 있다. 때문에 영남 제일의 길지라고 불린다.
마을 중심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 높이 약 70미터의 안산이 있는데, 주산에 비교해 너무 크거나 작지도 않다. 영취산 산자락 해발 40~70미터 범위에 서남쪽으로 마을과 집들이 향하며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 모양을 하고 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성산 이씨인 이우가 처음 입향해 개척한 집성 마을이다. 이우는 세종 때 진주 목사와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성산 이씨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이우의 6대손이며 퇴계의 직계 제자인 월봉 이정현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다.
월봉은 홍문관정자에 임명됐으나 안타깝게도 그해에 26세 나이로 요절한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수성이 있었는데, 그가 아들을 넷 두었고 이들이 모두 마을에 정착해 성산 이씨 각 파의 시조가 됐다.
이들 후손이 씨족 마을을 형성한 한개마을은 17세기 중엽인 이수성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개마을에서 대과 급제자 9명과 소과 급제자 24명을 배출해 조선의 양반 마을로서 위상을 갖춘다.
꼿꼿하고 강직한 한개마을 선비들의 이야기는 놀랍다. 돈재 이석문은 영조 38년(1762) 나이 50세 때 무겸(무신 겸 선전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고 명령하자 그는 어명을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업고 들어가 영조에게 직언하다가 곤장을 맞고 파직될 정도로 기개를 보였다.
한주종택을 중건한 한주 이진상은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혼탁한 세상에서 벼슬하기를 포기하고 근세 유학 3대가로 불리는 대학자로 성장한다. 중앙 정부는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유일각주1) 로 의금부 도사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67세이던 그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이 같은 기질이 이어져 일제 강점기 때는 한개마을의 수많은 사람이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한주의 아들 이승희(건국 훈장 대통령장)는 평생을 독립 운동에 바쳤고, 이기형(건국 포장), 이기정(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원(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인(건국 훈장 애족장), 이기윤(대통령 표창) 등이 선비의 기개를 드높였다.
한개마을은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3대 전통 마을로 꼽힌다. 한창 번창했을 때는 가구가 100호를 넘었으나 현재는 약 70여 호 정도로 줄었고, 이 중 약 20호는 빈집이다. 사람이 사는 50여 호 중에서 성산 이씨가 90퍼센트 정도다. 이처럼 씨족 마을의 전통을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문화재도 많다.
현재 10점의 지방 지정 문화재가 있는데, 교리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43호), 북비고택(지방 민속 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지방 민속 문화재 제45호), 월곡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46호), 진사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124호), 도동댁(지방 민속 문화재 제132호), 하회댁(문화재 자료 제388호), 극와고택(문화재 자료 제354호), 첨경재(문화재 자료 제461호), 삼봉서당(문화재 자료 제463호) 등이다.
전통적으로 집에는 '택호'라는 이름을 붙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안주인의 출신 마을이나 마을이 속한 면의 이름을 딴다. 그러므로 택호는 안주인의 호칭도 된다. 그러나 집안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있으면 마을 이름 대신 벼슬을 택호로 삼는다. 장관댁, 장군댁, 교장댁 등이 이런 예다.
그런데 한개마을의 택호는 매우 특이하다. 수십 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지만 벼슬 이름을 택호로 삼은 건 교리댁뿐이다. 진사댁이 있으나 진사는 초시에 합격한 이를 부르는 칭호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벼슬이 아니다.
북비고택에서 태어난 응와 이원조는 19세기 중엽 한성부윤과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럼에도 그의 집은 판서댁이라고 부르지 않고 응와의 증조부 이석문의 호를 따서 북비고택이라 부른다.
다른 집도 주인의 호를 따서 한주종택이나 극와고택 등으로 부르고, 안주인의 출신지를 따서 하회댁이나 월곡댁이라고 하기도 한다. 주인의 호를 택호로 정한 집이 한개마을처럼 많은 곳은 거의 없다. 여기서 한개마을 사람들이 벼슬보다 이름, 즉 명예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개마을 북서쪽 주거지에는 일정한 체계로 연결된 큰 집이 밀집해 있다.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두 갈래의 길이 주거지 양쪽을 감싸고 있다. 그중 서쪽 갈래는 활처럼 휘어 올라간다. 이 길을 따라가며 오른쪽을 보면 집 밖을 두른 담장이 마치 성벽처럼 보이고, 높이 솟아 있는 한옥 지붕은 더없이 웅장해 보인다.
한개마을 담장은 크게 '외곽 담'과 '내곽 담'으로 나뉜다. 외곽 담은 측면 담과 주택 영역을 구획하는 담이다. 마을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자리 잡아 산지와 주택 쪽 측면 담은 높고,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다.
내곽 담은 주거 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쪽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킨다. 담장 대부분은 흙 돌담이며 메쌓기 하지 않고 하단부터 자연석과 흙을 어우러지게 쌓았다. 돌담이 덩굴과 어우러져 마을의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
진사댁
마을 입구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제일 먼저 보이는 집이다. 누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卍자 장식으로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보인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새사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사댁은 정조 22년(1798)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당시에는 '예안댁'으로 불렸는데, 안주인인 진성 이씨가 예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진사댁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이국희가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된 이후부터다.
진사를 요즘으로 따지면 대학교를 졸업해 학사 학위를 받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들의 학식은 상당했고 과거도 계속 볼 수 있었다. 또한 중앙 무대에 올라가지 않아도 자신의 근거지에서 명성을 쌓으면 언제든지 관리로 발탁 가능했다.
안길에서 직각으로 오른쪽을 향해 몸을 틀면 짧은 샛길이 보인다. 특정 집으로 진입하는 데에만 사용되는 막다른 골목이다. 주거지 중앙부를 관통하는 안길로 올라가도 샛길을 거쳐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색깔과 크기,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황토로 쌓은 토석 담을 끼고 걷다 보면 교리댁, 북비 고택, 월곡댁 같은 큰 한옥의 입구가 나타난다.
교리댁
교리댁은 영해부사,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한 이석구가 1760년 건립했다. 이 집의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면서 붙여졌다.
자연적인 경사를 따라 마을 안길로 올라가면 돌담을 두른 교리댁 대문채가 보인다. 언덕길을 따라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매우 중후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준다. 1,980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대문채, 사랑채, 서재, 중문채, 안채, 사당 등 6동의 건물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ㅡ자형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태백산맥 일대의 튼 ㅁ자형과 남부의 ㅡ자형 민가를 섞어 놓은 것으로,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민가의 지역 간 전파와 교류를 통한 절충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이 건물은 평대문을 정면에 내지 않고 고샅을 지나 담장 뒤로 낸 게 특징이다. 한국미의 핵심은 일방성에 있다고 하지만 이 건물은 '정형 속의 비정형'이라 볼 수 있다. 비정형에는 오히려 미학을 끌어내는 힘이 있고 교리댁이 바로 그런 면을 보여준다.
교리댁에서 눈여겨볼 것은 독립된 서당이다. 다른 마을에서도 방 1칸이 서당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이곳처럼 번듯한 영역을 별도로 갖춘 한옥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당은 사랑채,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되어 서쪽을 향하고 있다. 주거용 건물과 방향을 다르게 만든 것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당은 주로 아이들이 사용하는 학습 공간이므로 건물 부재나 공간이 상대적으로 작고 마당을 둘러싸는 담도 낮다. 어린아이에게 맞는 인간적인 척도를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서당 건물을 받치는 기단을 매우 높게 처리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서당 높이가 대문채보다 높다. 한필원 교수는 이를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높은 기개를 조성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교리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은 뜻밖에도 사당이다. 대부분의 사당은 건물 후면에 자리 잡아 다소 침침하게 느껴지지만 교리댁은 그렇지 않다. 여름에는 배롱나무꽃과 나리꽃이 피고, 계단도 정감 가도록 잘 다듬어져 있다.
참고로 교리댁 사랑채 마당에는 수령 150년의 제주도산 감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쓰러질 듯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 말을 탈 때 딛고 일어서는 상마석이 아직도 남아 있어 전형적인 양반가라는 걸 보여준다.
북비고택
영조 50년(1774) 터전을 잡은 이 집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뒤 북쪽에 사립문을 냈다. 집주인인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북비택'이라는 이름과 '북비공'이라는 이석문의 호는 북쪽으로 난 문에서 비롯되었다.
훗날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이석문에게 훈련원 주부라는 벼슬을 내려 출사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이곳에 은거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그가 벼슬을 거절하며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하게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저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했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했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
이석문의 손자인 이규진이 장원 급제하자 정조가 그를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라고 질문했다. 어린 정조를 업고 들어가 아버지(사도세자)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 곤장을 맞고 벼슬에서도 쫓겨난 이석문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 것이다. 이후 사헌부 장령까지 오른 이규진은 순조 21년(1821)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짓고 북비문 내의 맞배집을 서재로 고쳤다.
이 가옥은 특이하게도 건물 뒷부분이 먼저 보인다. 북쪽으로 일각문을 냈기 때문이다.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댁 등 5채로 구성되었고, 북비댁은 별도의 담으로 구획되었다. 안대문채는 안대문, 마방,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8칸으로 매우 큰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독립 사랑채와 안채의 ㅁ자형 배치, 솟을대문 등은 당시 고관 가옥의 특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이며 잘 가공된 기단이 있는 맞배지붕 홑처마 가옥으로, 기둥에는 흰색 바탕에 청색 글씨의 주련이 걸려 있다. 평면은 북쪽으로 불발기각주2) 창이 없는 대청 한 칸에 온돌방 두 칸을 두고 남쪽으로 지형을 이용해 끝에 누마루 형식의 대청마루 한 칸과 온돌 한 칸을 두고 있다. 누마루에 앉으면 대문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고 멀리 마을 앞에 있는 안산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아래채로 가는 북비문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형식을 하고 있어 안채와 아래채의 동정을 살필 수도 있다.
사랑채 대청마루 옆으로 난 쪽마루를 이용해 벽은 넌출문각주3) 으로 막고 안채 담장을 추녀 밑으로 막아 안채와 이어지는 통로를 만든 모습이 재미있다. 이 사이로 뒤뜰의 사당이 보이며 안채와 공간을 구분하는 간벽은 기와를 이용했다. 한개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와를 이용한 벽담이다.
북비문을 지나면 네 칸 규모의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배치는 오른쪽에서부터 대청마루 두 칸에 온돌방 두 칸이다. 현재는 마루 북쪽을 판벽과 판문으로 막아 남향집처럼 쓰고 있다. 사랑의 한쪽은 툇마루 없이 남쪽으로 돌출한 부분에 긴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고, 뒤쪽에 부엌이 있다.
안채와 한 단 낮은 기단 위에 一자형으로 뻗은 아래채가 있고, 전면에 우진각 지붕을 한 곳간채가 남쪽에 一자형으로 놓여 있다. 정침도 一자형인데 자연석 초석 위 전면에는 원주를 사용했다. 두 칸 대청의 서쪽에 온돌방 한 칸, 동쪽에 온돌방 두 칸이 있고, 동쪽으로 부엌이 있다. 안채로 연결되는 동선 방향을 주목할 만한데 서쪽 대문을 통해 사랑채에 다다르고, 사랑 앞마당을 지나 안채의 아래채 옆으로 출입할 수 있다.
안채의 건넌방은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마을 단위로 공부하는 공간인 재실 겸 서당과는 별도로 한 가족이 운영하는 이른바 사교육 공간이다. 사랑채의 작은 사랑방은 서실로 사용되었으며 이곳 역시 서당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한다.
북비고택의 자랑 중 하나는 장독대다. 담을 두르고 기와집을 얹는 것이다. 집안의 멋을 좌우하며 주택의 품계를 한 단계 높여준 것으로 추정된다. 상단에 기와로 예쁜 문양을 만들어 화초담 모습을 섞은 흙 돌담도 보인다.
장독대는 한옥에서 매우 중요하다. 집안의 먹을거리를 좌우하므로 안주인의 생활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기도하는 공간이라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보관하고 발효시키는 곳이자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장독은 실용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공간으로 한옥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안채와 사랑채 앞쪽에는 일반 주택에서 사용을 금지했던 원기둥이 보인다. 안채의 원기둥은 대초당에 있던 재목을 옮겨 사용했다고 하지만,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이 집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비고택과 교리댁에는 커다란 회화나무 두 그루가 있다. 김해숙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가문에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2명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심었다고 한다.
한주종택
마을의 가장 위쪽인 영취산 산기슭에 위치하며, 다소 급경사로 올라가는 주거지의 가장 뒤쪽에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한개마을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집이며, 골목과 담장 주위의 노송이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영조 43년(1767) 이민검이 창건했고, 고종 3년(1866) 이민검의 증손자인 한주 이진상이 중수해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진상의 호를 따 한주종택이라 부르지만 안주인이 상주 동곽 출신이라 '동곽댁'이라고도 불린다.
이진상은 조선 말기 정치가 문란해지자 국가 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한 『묘충록』을 저술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반대 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다 화의 성립으로 중단했고,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을 중심 사상으로 이일원론을 주장하며 제자들과 함께 한주학파를 형성했다.
동쪽 문간채에 있는 대문간을 통해 들어가는데 대문간 옆에 하인들이 들어가던 작은 문도 있다. 문간채는 양반집같이 규모가 큰 살림집에서 볼 수 있으며, 간혹 규모가 작은 서민 살림집에서도 볼 수 있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식구들이 기거할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간채는 바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기 때문에 창고나 외양간을 붙여 농사일에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게 기본이다.
특이한 것은 대갓집인데도 대문간이 매우 검소하다는 점이다. 양반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이 아니라 평대문이다. 원래는 문간채에 초가지붕을 이어서 지금보다 더 소박했다고 한다. 남들은 억지로라도 솟을대문을 만들려고 안달이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이진상이 학문은 높았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아 자신의 본분에 맞게 평대문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한주종택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공부와 연구 공간을 위한 한주정사가 있고 거주 공간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조상을 모시는 사당도 있는데 우리나라 종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간 구성이다.
남향에 ㅡ자형 정침과 왼쪽에 동향 ㅡ자형 3칸 고방채, 오른쪽에 서향 ㅡ자형 3칸의 아래채, 정침과 마주보는 남쪽에 7칸 ㅡ자형의 중문채 등 4동이 튼 ㅁ자형을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이런 구조는 모든 활동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며 이 지방에 전해지는 건물 배치다.
한주종택에서 안채를 3량가로 만든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 '량가'란 지붕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른 설명인데 3량가는 우리나라에서 시공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간단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3량가 건물은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종도리를 설치하고, 지붕의 앞뒤 양쪽 가장자리에 두 열의 처마 도리를 두세 열의 도리가 서까래를 받치는 구조다.
일반적인 양반 건물은 5량가이며 원형 기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1고주 5량가, 2고주 7량가 등의 구조도 있는데, 툇마루를 두어 지붕 높이가 변하는 것에 대비해 안쪽에 고주각주4) 를 사용한 경우다.
당당한 양반가임에도 가장 중요한 안채를 3량가로 건설한 것은 자신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한주종택은 대갓집인데도 평민 집을 연상시키는 사각기둥을 사용했다. 북비고택에 양반 건축에서 사용하지 않는 원형 기둥을 쓴 것과 대조적이다.
또 양반집은 대체로 안채를 팔작지붕으로 만들고, 사랑채를 맞배지붕으로 만든다. 하지만 한주종택에서는 이 역시 한 단계 낮춰 안채와 사랑채 모두 맞배지붕으로 지었다. 이처럼 한주종택은 소박한 개념으로 건설한 집이다. 하지만 본채의 마루방, 부엌 앞에 있는 광과 마루방은 고서로 가득 채워 대학자의 집임을 한껏 드러낸다.
한주종택이 한개마을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주정사와 연못이 있는 구역이 건축된 이후다. 한주정사는 안채를 구분하는 사이 담에 있는 작은 협문과 일각문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집의 권위와 위계가 보이도록 기단을 2개 층으로 나누어 쌓았다. 당대의 문인들과 성리학을 강학하던 장소로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라 현판했다. 성리학의 비조인 주희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 받든다는 뜻으로 이진상의 학문적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자의 누마루에서 안채와 사랑채의 경치가 아늑히 보이며, 넓은 마을 앞 들판은 발아래로, 마을 안산은 대청마루와 같은 높이로 보여 하늘 위에 떠 있는 신선 같은 느낌에 빠지게 한다. 또 자연과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위해 정자 동편으로 방형의 연못을 파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연못을 거쳐 나가도록 만들었고, 연못 위에는 인공 섬을 만들어 우주를 안으려는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담 너머 노송과 주위의 기암괴석, 수백 년 된 소나무들도 분위기를 한층 높인다.
도동댁
철종 시대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이원조의 아들 이기상의 살림집으로 1850년에 건립했다. 한개마을 전체 배치로 볼 때 가장 중요한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남향인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왼쪽에 안채가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 전면에 세워진 중문채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마당 왼쪽에 고방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룬다.
극와고택
홍문관 교리 이귀상의 아들 극와 이주희가 철종 3년(1852) 건립했다. 가옥 이름은 이주희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소를 지킨 효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국권이 상실되자 거실에 거적을 깔고 소복을 입은 채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건립 당시 가옥의 배치는 안마당의 동쪽에 광채가 있어 튼 ㄷ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광채가 철거되고 一자형의 사랑채와 정침만 남아 二자형의 개방적인 배치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특이하게 초가집이며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의 규모에 가운데 큰 사랑방 두 칸, 사랑마루 한 칸을 배치하고 큰 사랑방 왼쪽으로 작은 사랑방 한 칸을 덧붙인 형태다. 사랑채 마루 끝 장귀틀각주5) 아랫부분이 밑으로 둥글게 처리되어 기단 아래에서 보면 마치 건물이 물 위에 뜬 배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기와집이었지만 그 후에 정비 사업을 하면서 초가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안채는 기와집으로 정면 여섯 칸 반의 규모에 중앙 대청 두 칸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 한 칸 반, 안방 두 칸, 오른쪽으로 건넌방 한 칸이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안채 가운데 놓인 디딤돌의 '만석(萬石)'이라는 각자가 눈에 띈다. 안채 마루에 앉아서 앞을 내려다보면 마을 앞에 펼쳐진 들판과 냇가가 보여 시원하다. 대문이 담장 모서리와 연결되는데, 한주종택으로 올라가는 토석 담과 어울려 가장 전통적인 한옥 마을의 골목길로 알려져 있다.
극와고택은 현재 사랑채가 초가로 변했지만 평면 구성은 양반 가옥 형태이며 안채는 규모가 양반 가옥에 필적할 만하다. 또한 평면 배치가 남부형 민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양반의 반가와 민가를 이어주는 형태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하회댁
안동 하회마을에 살던 류씨 할머니가 진주 목사를 역임한 이우에게 시집오면서 하회댁이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남자의 벼슬이나 당호를 이용해 택호를 정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상식을 뒤엎는 경우다. 1745년 건설되어 한개마을의 한옥 문화재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건축 연대를 1630년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랑채는 전면 다섯 칸으로 대청마루 기둥이 같은 간격을 이루고 있으나 두 칸 크기인 대청마루 부분의 한 칸은 기둥 간격을 작게 했으며, 작은 폭의 기둥 칸 사이에 섬돌을 놓고 올라가도록 했다. 사랑채는 대문 쪽으로 두 칸의 대청과 툇마루, 머름각주6) 을 가진 두 칸의 온돌방, 마루 없는 한 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한개마을의 고택 중 사랑채 앞 정원을 가장 아름답고 단정하게 꾸민 데서 집주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경사지를 이용한 집의 특성상 여름에 대청마루의 북쪽 판문을 열면 사랑채 앞 낮은 담장으로 장애물 없이 마을 들판 너머 앞산까지 보여 수려한 풍광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안채 출입은 사랑채 전면 오른쪽의 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는데, 협문 옆에는 우산처럼 생긴 향나무가 서 있다. 대감들이 행차할 때 쓰던 햇빛가리개 같아 특별히 호위를 받고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한개마을 반가의 대부분이 ㅁ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으나 이곳의 안채는 ㄷ자형 평면의 정침과 중문간채의 一자형 평면을 취한다. 이는 남부형 가옥 배치와 북부 ㅁ자형 가옥 배치의 중간 형태로 한개마을에서는 흔하지 않은 방식이다. 동쪽 날개채에 2칸의 건넛방과 2칸의 마루가 있는데 며느리의 공간이며 시어머니의 안방 및 안대청과 대등한 규모다.
이를 보면 하회댁은 상당히 독특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여성이 소외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억압받았다고 하지만 모든 곳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회댁의 시아버지는 안대청 옆에 작은방을 별도로 두어 며느리가 낮잠 자는 공간을 만들어줄 정도로 며느리 사랑이 지극했다. 또한 여성들이 바깥 활동에는 제약을 받아도 집 안에서만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이 집에서 특이한 것은 고방이다. 지붕을 높게 하고 돌로 두껍게 쌓아 넓게 만든 고방은 과거의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한다. 벽체가 워낙 두껍다 보니 밖이 아무리 더워도 안은 서늘해 음식물을 보관하는 데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을 듯하다.
월곡댁
월곡댁은 이진희의 부인이 초전면 월곡동에서 시집왔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11년에서 1940년까지 건립해 한개마을의 가옥 중에서 늦게 만들어진 편이다.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와 앞쪽의 별채 사이에 샛길처럼 좁고 긴 공간이 형성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마다 기단이 높고 아름다운 돌로 쌓았는데 기단이라기보다는 지형의 기울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석축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지만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만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다. 일반적으로 한옥에서는 채의 앞뒤로 개구부가 설치되나 별채의 뒤쪽 벽에는 개구부가 전혀 없다.
별채가 이렇게 설계된 데는 주인의 의도가 배어 있다. 처음에는 별채에 주로 분가하지 않은 자녀들이 거처했으나 이진희의 손자 대에 와서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가 소실을 들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공간 구성의 절대적인 지침, 그중에서도 사당의 위치를 어긋나게 만든다.
한개마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사당, 정자, 재실 등 선조를 기념하는 건축물이 10동이나 된다는 점이다. 현재는 8동 남아 있는데 한 마을에서 이렇게 조상을 기념하는 건축물이 많은 곳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들 기념물의 배치가 다소 예외적이다.
집의 동쪽에 있는 진입로로 들어가는 한주종택은 사당이 안채의 동쪽에 위치하지만 서쪽으로 진입하는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등은 사당이 사랑채 뒤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뒤쪽에 있다. 한개마을 양반집에서 이처럼 유교의 전통이 무시된 이유는 건물의 공간 구성 때문이다.
한개마을에서 여성의 공간은 은닉, 즉 감추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집 안에서 볼 때 가옥의 진입은 왼쪽이나 오른쪽이 기본이며 주택에서 가장 안쪽에 놓이는 것은 안채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숨겨진 곳이 부엌이었다. 이는 부엌의 위치가 동향이나 서향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진입하는 샛길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는 뜻이다. 이때의 원칙은 부엌을 진입로에서 가장 먼 곳에 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럴 경우 사당을 어디에 놓느냐에 문제가 생긴다. 만약 사당을 전통적인 방식대로 오른쪽에 놓는다면 제사의 주인공인 남자가 여성 영역인 안채를 거쳐 사당으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생긴다. 한개마을 선비들이 이런 내용을 모를 리 없었다. 결론은 교과서인 『주자가례』의 방침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거자들이 불편하지 않은 실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을 사당인 첨경재는 마을 오른쪽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인 한개마을 뒤쪽 연취산 기슭에 있다. 첨경재는 조상의 분묘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섬긴다'는 뜻으로 성산 이씨의 선조 묘소에 묘제를 봉행했던 병사다. 영취산에서 뻗어 내린 협곡 사이에 토석 담장을 둘러 전면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3량가 맞배지붕의 첨경재를 중심으로 왼쪽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고직사를 배치하고 일각문을 세운 매우 큰 사당이다.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해 창건 당시의 원형은 유지하지 않고 있으나 기념 건축물답게 단순한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고 성산 이씨들의 종당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다.
한개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서쪽에 정면 6칸, 측면 1.5칸 팔작지붕의 여동서당이 있다. 방이 2개로 훈장이 기거하며 어린아이들을 가르친 곳이다. 여동서당에 도착하기 전 재실인 서륜재를 볼 수 있는데 재실은 기와집이지만 왼쪽에 있는 관리인 집은 초가집이다.
한개마을 주변 명소로는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 자태실이 있다.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된 태실 등 19기가 군집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이다.
또한 성주향교(보물 제1575호),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하고 있는 성주 성산동 고분군(사적 제86호), 성산가야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용산성(경북 기념물 제105호)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영취산 중간에는 신라 애장왕 때 건립된 감응사가 있다. 왕자가 눈이 아파 앞을 볼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스님의 말을 듣고 독수리가 날아가 앉은 이곳의 약수로 눈을 씻자 앞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애장왕은 약수의 은혜를 잇지 못해 약수가 나는 곳을 옥류정이라 부르게 하고 감응사를 짓게 했다. 삼성각에는 특별히 용왕신을 모시고 있다. 감응사에서 한개마을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명품 경관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느 마을이나 민속 마을로 지정되면 상업화되고 진정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또한 주민들 간 반목과 갈등이 생기기도 하는데 한개마을에서는 이런 면을 느낄 수 없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주민들이 전통 마을의 참뜻을 저해하는 상업 시설을 철저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흔한 관광 상품점은 물론 식당도 없으니 한개마을을 찾아가려면 음료수 등을 꼼꼼하게 챙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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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성주군, 『성주 한개 민속 마을』(성주군, 2012)
- ・ 한필원, 『한국의 전통 마을을 찾아서』(휴머니스트, 2011)
- ・ 서정호, 『한옥의 미』(경인문화사, 2010)
- ・ 신광철, 『한옥 마을』(한문화사, 2010)
- ・ 정창구, 「[古宅은 살아 있다] <25>성주 한개마을」, 『매일신문』, 2012년 6월 20일.
글
출처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인 한국의 전통 마을.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우리 전통 마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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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개마을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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