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과학문화유산
답사기2

남사마을

남사예담촌

지리산 깊은 곳에 자리한 '한국 전통 박물관'

요약 테이블
위치 경남 산청군 단성면

다랭이마을과 남해의 아름다운 도로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또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남사마을로 향한다. 한국의 땅덩이가 좁은 데다 산악 지대가 많아 오지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경남 산청은 과거에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이런 곳에 남다른 전통 마을이 있다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하면서 18~20세기 전통 한옥 40여 호에 85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 남사마을이 그런 명성에 알맞은 곳이다. 농가 105호, 비농가 30호, 주민 숫자가 340명이나 되어 전통 마을 기준으로 볼 때 작지 않지만 많은 가옥이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한국 전통 역사 박물관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경북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이 하회마을이라면 경남에는 남사마을이 있다고 할 정도다.

남사마을은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한국 전통 역사 박물관이라고 평가된다(이호선 그림, 박찬종 사무장 제공).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곳이 다른 마을처럼 특정 성씨의 집성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사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고려 말 진양 하씨(약 700년)로 알려져 있다. 성주 이씨(약 450년)는 하씨가 정착한 지 약 100년 후 단종 복위 모의 사건으로 성삼문의 이모부인 이숙순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 계기다. 밀양 박씨(약 350년)는 병자호란 당시 외가에 피난해온 박승희, 박승필 등이 정착해 계속 살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전주 최씨(약 100년), 연일 정씨(약 80년), 재령 이씨를 포함해 여러 성이 있었지만 현재는 30여 개에 가까운 다성이 있어 씨족 마을이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진 감이 있다.

많은 성씨가 수백 년간 마을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양반 가문의 반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 말 하즙(1303~1380)과 하윤원(1322~1376) 부자, 그의 외손 통정공 강회백(1357~1402), 강회중(?~1441), 영의정을 지낸 하연(1376~1453) 등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물론, 많은 가문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명성을 유지한 것도 큰 요인이다. 구한말 애국지사인 곽종석(1846~1919), 국악 운동의 선구자인 기산 박헌봉(1906~1977) 등도 이곳 출신이다. 결속력이 남다른 씨족 마을이 근본인 조선 시대에 많은 성씨가 한 마을을 이루면서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 자체에 특이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지정 문화재도 많이 있는데 우선 남사옛마을담장이 등록 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어 마을 전체의 명성을 높여준다. 최씨 고가(문화재 자료 제117호), 이씨고가(문화재 자료 제118호), 면우 곽종석 유적(문화재 자료 제196호), 이사재(문화재 자료 제328호), 사양정사(문화재 자료 제453호), 배산서원(문화재 자료 제51호) 등도 등록되어 있다.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의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과 인접해 있다. 과거에는 행정 구역상 개울을 경계로 남사는 진주, 상사는 단성에 속했는데 한때는 마을이 합쳐져 사월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산청군으로 통합되면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지만 두 마을을 사월 또는 남사라고 함께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동제를 지낼 때는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전통 마을은 엄밀하게 남사마을을 뜻한다.

남사마을에서는 흙 돌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볼 때 남사마을이 현재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남사마을은 광복 직후 혼란기에 좌우 대립이 극심해 큰 혼란이 일어났고, 6·25전쟁 때 연합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상당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다. 특히 마을 중앙에 있던 99칸의 최씨 대갓집은 완전히 파손되어 공터만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남사마을이 2003년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된 까닭은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것은 물론 흙 돌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담은 마을 사람들의 위계에 따라 달라진다. 반가 집은 말을 타고 가도 보이지 않을 2미터 정도의 높은 담장을 만들었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는 돌담을 주로 사용했다. 총 길이는 5.7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이 중 3.2킬로미터가 대한민국 등록 문화재 2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반가 건축물 주위에 있는 토담은 길이 50~60센티미터 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 한 뒤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리고 사이에 황토를 채워넣어 만들었다. 상부는 전통 한식 기와 또는 평기와를 사용했다. 재료는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했다. 사양정사와 최씨고가 골목 등은 누구나 걸어보고 싶은 골목길로 추천된다.

남사마을의 기본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변한다'고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린다고 알려져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내 국립공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5.4미터)의 위세에 알맞게 주변에 화엄사 같은 대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해 한국 남부의 문화권을 실질적으로 관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명산인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나온 봉우리 니구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이 과거에 여사촌으로 불린 남사마을이다. 풍수적으로 해석할 때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이고 당산이 숫룡의 머리로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 형상을 하고 있으며,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천이 조화를 이루면서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의 입지에 있다.

남사마을의 특이한 점은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므로 '달이 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반월을 메우면 안 된다고 믿어 중심부에 집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주차장이 중앙 부분이다.

남사마을에서는 남다른 멋이 느껴진다. 마을의 간판스타라고 볼 수 있는 세 가지 고목 때문이다. 우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이나 된다. 전형적인 반시(납작감)로 산청 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린다. 하씨고가 안에 있는데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 때 심었다고 한다.

남사마을의 간판스타인 하씨고가 감나무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남사마을의 간판스타인 하씨고가 매화나무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약 700년 된 매화나무다. 역시 하씨고가에 있고 고려 말의 문신 원정공 하즙(하연의 증조할아버지)이 심어 '원정매'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고관들이 심은 매화나무가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원정매가 가장 기품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원래 고목은 고사해 시멘트로 원형을 만들었지만 주위로 새로이 가지가 내려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곁 마당에는 후대에 심은 것이지만 제법 가지가 실하며 2세목으로 추정되는 홍매가 그득하다. 비석에 적혀 있는 영매 시는 다음과 같다.

"집 앞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섣달 찬 겨울에도 아리따운 꽃망울 나를 위해 피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더라."

세 번째는 300년 된 회화나무다. 마을 초입 이상택 고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X자형으로 몸을 포갠 것이 인상적이다.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부부가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남사마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서로 엇갈려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택 고가 입구에 있는 회화나무

X자형으로 몸을 포갠 것이 인상적이며 남사마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회화나무는 우리 조상이 최고의 길상목으로 꼽은 나무이며 연원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다. 주나라 때 '삼괴구극'이라 해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그 아래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정사를 돌보았다고 한다. 한국도 이를 따라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각주1) 이 회화나무를 마주 보며 앉았고,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를 심어 조정의 대신들이 앉기도 했다. 이와 같이 회화나무를 우대한 이유는 회화나무에는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회화나무를 매우 신성하게 여겨 아무 곳에나 함부로 심지 못하게 했다. 즉 선비의 집이나 서원, 궁궐에만 심을 수 있었다. 또한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에게 왕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특히 집안에 급제자가 생기거나 벼슬을 하면 집 주위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회화나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과거 급제자가 많았고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았다는 반증이다.

이씨고가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 마당이며 또 한 그루의 거대한 회화나무가 방문객을 반긴다.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크며 수령이 약 450년이라 삼신할머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몸통에 난 배꼽 모양 구멍과 뿌리 위로 돋아난 돌기가 음양의 상징처럼 부각되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배꼽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대문은 북쪽을 향해 조금 낮게 만들었는데, 왕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숙여서 충성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이씨고가의 대문은 북쪽을 향해 조금 낮게 만들었는데, 왕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숙여서 충성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회화나무를 통과해 나지막한 돌담 끝에 있는 대문을 지나면 건축된 지 약 200여 년 된 안채와 사랑채, 익랑채,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된 가운데 왼편으로 사당이 있다.

이씨 고가의 익랑채(왼쪽)와 안채(오른쪽)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 마당의 북쪽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계자 난간 모양의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한 병렬 배치이고, 사당은 곳간채 뒤쪽이지만 안채 왼쪽 전면에 있으며 시각적으로 막혀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인다.

안채는 전형적인 남부 일자형 구조로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집이다. 앞뒤로 툇마루가 있고, 건넌방 툇마루를 대청보다 20센티미터가량 올리고 밑에 아궁이를 설치했다. 일반적인 사대부 주택에서는 부엌이 사당 방향과 반대편에 있지만 이 집에서는 부엌이 사당과 같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한옥인 반면 사랑채는 과장된 규모와 장식이 눈에 띄는데 20세기 초반에 건설되어 다소 위세감을 보이려고 의도했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건설된 연대가 거의 200여 년가량 차이 나므로 세월에 따른 한옥의 구조적, 조형적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다.

익랑채는 초가 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크기에 동향이며 남쪽에 부엌과 방, 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다. 곳간채 뒤에 사당이 있는데 맞배지붕이며 붉은 옻칠을 한 4개의 위패(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란히 모셨다. 같은 ㅁ자형 집인데도 중부 지방과는 달리 남부 지역은 덥고 습하므로 공기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건물 사이에 공간을 두어 독채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한 탓인지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도 이씨고가는 멀쩡했다고 한다.

남사마을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성주 이씨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 제1294호이자 가보가 있다. 조선 개국 때 태조가 공을 세운 정무공 이제에게 내린 「이제개국공신교서」다. 이제는 이성계의 셋째 딸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정몽주 격살에 참여한 개국 일등공신으로 책록, 흥안군에 봉해졌으며 의흥친군위절제사가 되었다. 이제의 아버지 이조년(1269~1343)은 한국인이라면 거의 외우고 있을 「다정가」의 작가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잠 못 들어 하노라."

최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된 최씨고가는 1920년에 지어졌으며 3겹으로 된 사랑채 지붕이 유명하다. 부농이었던 주인의 상황을 말해주듯 집안 위세를 과시하는 화려한 모양새를 강조한다. 전통적인 남부 지방의 사대부 한옥임에도 곳곳에 일제 강점기에 물밀듯이 들어온 실용적인 구조를 도입해 한옥 특유의 안정적이고 소박한 멋은 없지만 당대의 반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최씨고가는 부농이었던 주인의 상황을 말해주듯 화려한 모양새를 강조한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 좌우에 중문이 두 곳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안채와 마찬가지로 5량가로 조성된 팔작지붕이며 겹집 형식이다.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을 지날 경우 ㄱ자형 담으로 차단되어 안채와 익랑채가 보이지 않는다. 익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이 같은 차단은 전형적인 유교 사상에 따라 남녀의 생활공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로 앞뒤에 툇간이 있고 5량가로 조성된 팔작지붕이다. 안채에는 쇠 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는데 사랑채와 연락하는 용도다. 방울이 울릴 때마다 사랑채로 필요한 주안상들을 준비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최씨고가의 뒷간은 여느 변소와는 달리 2층으로 되어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임원경제지』의 "뒷간은 위생적이고도 효과적인 인분 활용을 위해 올려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언급을 따른 것이다. 변이 아래에 있는 흙 상자에 담기면 재를 덮어 냄새를 줄이고 발효를 촉진해 비료로 사용했다. 또한 뒷간 남쪽으로 홈을 내 오줌이 자연스레 흘러나와 고이도록 둥근 구덩이를 파 놓았다. 당대 최고의 비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아이디어다.

물론 2층 화장실이 최씨고가에만 있지는 않다. 이상택 고가에도 2층 화장실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상택 고가에는 화장실 문이 있고 최씨 고가에는 화장실 문이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화장실은 남녀 유별해서 여자용은 안채 인근에 있고 남자용은 건물 밖에 있다. 최씨고가의 경우 남자용 화장실이 두 개로 하나는 주인 가족 전용이다.

이 집에서 특이한 것은 안채 뒤편에 마련된 장독대에 작은 문이 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가장 깊숙하고 폐쇄적인 공간에 살았는데 이 집은 대문을 통하지 않고 여자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소위 비상문으로 조선 시대에서는 그야말로 특별한 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자들의 자유로운 외출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 집에서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선보이고 있다. 처마 밑의 선반 같은 구조가 특이한데 천연 냉장고 역할을 하던 곳이다. 현대의 냉장고처럼 기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보다 시원하다는 점을 이용한 슬기가 엿보인다. 또한 대문 빗장이 남다르게 거북 모양이다. 왼쪽 목을 당겨야 대문을 열 수 있는 것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인의 마음이 미소를 짓게 한다.

최씨고가의 대문 빗장은 왼쪽 목을 당겨야 열 수 있는 거북 모양이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양정사

연일 정씨의 사랑채이자 위패를 모신 재실인 사양정사도 만만치 않은 고가다. 사양정사는 사수천의 남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수(泗水)란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성 취푸에 있는 강 이름으로, 공자를 흠모하는 뜻에서 남사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개울을 사수라고 불렀다. 연일 정씨는 조선 시대 사육신 사건의 주역인 정몽주의 후손이지만, 남사마을에서의 토대는 구한말 유학자인 계제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마을로 이전한 후부터 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1920년대에 거대한 집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사양정사다. 어느 곳보다 돌담장과 감나무가 잘 어우러진 골목을 돌면 보이는 사랑채가 그야말로 당당하다.

정몽주의 후손인 연일 정씨가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사양정사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보통 건물의 2~3배나 되어 단일 건물로는 매우 크다. 궁궐의 회랑처럼 길고 우람하며 천장이 높고 부재가 건실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 재료인 유리를 사용해 근대 한옥의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에는 이중 다락이 있다. 기둥은 과거 민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원형인데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여건 덕분에 건축이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마당 건너 선명당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므로 대청은 엄숙한 느낌이 곳곳에 배어 있도록 계획했다.

선명당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엄숙한 느낌이 곳곳에 배어 있도록 계획했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씨고가는 대문을 모두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이채롭다. 솟을대문은 집의 위세를 보여주는 증표인데 정면뿐 아니라 후면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주인이 그만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면 솟을대문 옆으로 세웠으며 맞배지붕 형식의 기와를 얹은 행랑채는 6칸이나 되는 장대한 규모다. 언뜻 보면 솟을삼문 같은 위엄이 있으며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을 넣은 것이 특징이다. 토석 담은 중간중간 흙이 빠져 나갔지만 퇴색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집 안에는 120년 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배롱나무 중 가장 오랜 수령을 자랑한다.

하씨고가

진주 하씨 원정공 하즙의 고택인 하씨고가의 대청마루에는 '원정구려'라는 편액이 있는데 대원군의 친필로 뜻은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대원군이 친필을 내릴 정도로 구한말 남사마을에서 진주 하씨의 명성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즙은 1324년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했는데 원이 고려 조정에 소위 감독관을 두어 고려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였다. 고려에서는 몽골 관리보다 그들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따라서 사헌부에서 이들의 만행을 규제했고 하즙도 사헌부 관원이었다. 그즈음 행주 지방 기자오의 딸이 원 순제의 제2왕비가 되어 왕자를 낳자 그의 일가들이 안하무인의 권세를 누리기 시작했다. 하즙은 이를 지적해 상부의 눈엣가시가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왕후의 인척을 매질해 감옥에서 죽게 할 정도로 강개를 보였다.

하즙의 증손인 하연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정몽주의 문인이다. 태조 5년(1396)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봉상시녹사, 춘추관수찬관을 거쳐 세종 즉위 후 예조참판,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대제학,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오른 정통 관료다. 경력만 봐도 관운이 매우 좋은 사람으로 진주 종천서원, 합천의 신천서원에 배향되었고 단종 2년(1454)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진주 하씨의 명성을 드높였다.

하씨고가에는 사헌부 관원이었던 하즙이 살았으며 하즙의 증손인 하연은 정몽주의 문인이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감나무는 하연이 어렸을 때 직접 심었다고 하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무의 건강에 따라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쳤다고 한다. 또한 하연이 글을 읽을 때 날씨가 춥고 비바람이 치면 도깨비불이 나와서 감나무를 보호해주었으며, 도깨비가 나타나면 하씨 집안에 경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동서당

문화재 자료 제196호인 이동서당은 면우 곽종석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건설했다는 역사적인 사연이 담긴 유산이다. 곽종석은 고종 초기 중추원 의관이 되었으며, 1903년 참찬으로 시독관을 겸했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을 폐기하고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에서 은거했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거창에서 문하생인 심산 김창숙(1879~1962)과 협의해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 호소문을 보냈다. 이로 인해 투옥되었고 후유증으로 74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동서당에는 면우 곽종석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건설했다는 역사적인 사연이 담겨 있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문은 '일직문(一直門)'이란 현판을 달고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강당, 서재, 사우로 나뉘어 있다. 옆면으로 보았을 때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서재는 사다리꼴, 사우는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동서당 옆 부지에는 최근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이사재

남사천을 건너면 경북 문화재 제328호로 지정된 이사재를 만날 수 있다. 조선 전기 토포사 종사관으로 임꺽정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지낸 송월당 박호원의 재실이다. 1857년 건립되었으며 정문 앞에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중 여기를 지났다는 행로 표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청수역을 떠나 합천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충무공이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을 지나다 박호원(1527~1584)의 노비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정유년(1597) 6월 1일 경신, 비가 계속 내렸다. 일찍 출발해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 도착해 말을 쉬게 했다. 저물녘에 단성과 진주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노 집에 투숙했다.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으나 잠자리가 좋지 못해 간신히 밤을 지냈다. 비는 밤새도록 멎지 않았다."

박호원은 명종에서 선조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활동한 인물로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순신은 이 지역의 실세인 박호원의 내력을 알고 유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잠자리가 불편했다고 적은 것은 상당한 환대를 받았으나 당시 죄인의 신분으로 '극진한 대접 속에 잘 잤다'고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으로 적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의견이 있다.

이사재는 전·후면 반 칸씩을 툇간으로 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1칸씩 방으로 만들고 좌우 각 반 칸은 마루로 꾸몄는데 마루 부분에는 모두 계자 난간을 설치했다. 세 짝의 분합문과 창살의 조형미가 수려하고 5량가로 서까래만 쓴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특징이 적용되어 옆에 있는 연못과 잘 어울린다.

송월당 박호원의 재실인 이사재

세 짝의 분합문과 창살의 조형미가 수려하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사재 오른쪽에는 예담마을을 한눈에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는 예담길, 즉 둘레 길이 있는데 길이는 약 2.4킬로미터다. 아름다운 하천을 따라 정겹게 걸을 수 있는 길이므로 시간을 할애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예담길 입구의 남사천에는 흥미로운 전설을 지닌 큰 바위가 있다. 이사재로 들어가는 다리 옆에는 새끼 거북 2마리가 있고, 약 100미터 떨어진 큰 바위에는 어미 거북이 새끼 거북이 있는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 되더라도 부모의 보살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유적비의 반대쪽 마을 입구에는 남사마을이 자랑하는 사효재가 있다. 이제의 8대손인 이윤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687년 마을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윤헌은 부모를 모시고 산촌으로 피해 갔는데 산적이 부친에게 칼을 들이대자 부친을 보호하려고 막아서다가 온몸에 칼을 맞고 팔이 절단되었다. 그로 인해 8년 뒤 사망하자 정부에서 정려를 건립하고 실행록을 종가에 소장하도록 했다. 사효제는 현재 '예담촌맛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이씨 문중의 월포공이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치던 초포정사, 이씨 문중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내현재, 박씨 문중의 서재였던 삼백헌, 박씨 문중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망추정도 남사마을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남사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라고 하지만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다. 이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유산이나 자연유산과는 달리 프랑스에서 1982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연합회'라는 기구를 구성해 자국의 작은 농촌 마을들을 소개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한다. 본래 목적은 자국의 작은 농촌 마을의 아름다운 경관과 문화유산을 알려 관광을 활성화하려는 의도였다. 프랑스의 아이디어에 이탈리아, 벨기에, 캐나다, 일본 등이 동참했고 한국도 참여해 남사마을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라고 발표한 것이다.

산청에서 잘 알려진 음식은 어탕국수다. 모래무지, 피라미, 꺽지, 붕어, 미꾸라지 등을 잡아 뼈를 추린 뒤 풋고추와 호박, 미나리 등의 채소를 넣고 푹 끓인 후 어탕에 국수를 만 것으로 전형적인 경상도 맛이다. 1급수인 경호강이 흐르는 산청에서 좋은 물고기를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최갑수 작가는 보약 한 첩을 먹은 것 같다고 극찬한다.

인근인 사월리의 목면시배유지는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며, 석가모니 다음으로 사리가 많이 나왔다는 성철스님의 생가인 겁외사도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가야의 구형왕릉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 무덤과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72호), 대원사 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이 있는 대원사,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 삼청 대포리 삼층석탑(보물 제1114호)도 유명하다.

예담길 입구의 남사천에는 흥미로운 전설을 지닌 거북바위가 있다.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남동우, 「산청 남사마을」, 『금강신문』, 2012년 2월 12일.
  • ・ 편집부, 「세월도 비켜 간 산청 남사마을」(경남은행, 2010)
  • ・ 한필원, 『한국의 전통 마을을 찾아서』(휴머니스트, 2011)
  • ・ 이효신, 『남사예담촌』(산청군농업기술센터, 2012)
  • ・ 강쥐, 「이사재」, 『우리가 사는 세상』, 2010년 10월 8일.
  • ・ 최갑수, 「[한국의 美] 경남 산청 남사예담촌, 돌담길 따라 옛이야기 소곤대는 마을」, 『GOLD&WISE』, 2012년 7월 5일.

이종호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펼쳐보기

출처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 저자이종호 | cp명북카라반 도서 소개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인 한국의 전통 마을.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우리 전통 마을을 소개한다.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지리산 여행지

추천항목


[Daum백과] 남사마을과학문화유산답사기2, 이종호, 북카라반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