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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남 거창군 위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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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에서 황산마을로 가는 길에는 가로수로 배롱나무가 줄이어 있으며 꽃이 만개했을 때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므로 꼭 한번 달려보길 권한다. 자동차로 찾아갈 때 내비게이션 등으로 검색이 잘되지 않으면 '수승대'라고 쳐보기 바란다. 황산마을은 대한민국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수승대와 길 건너에 있는 황산마을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과거에 황산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로 '울면서 들어가서 울면서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산세가 험한 덕유산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거창은 예부터 거열, 거타, 한들, 거창, 아림, 제창 등으로 불렸다. 거창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처음 불린 후 주변 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불려오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인데 분지가 내륙 산악 지대에서 보기 드문 평야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지금도 거창평야의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는데 대전의 한밭(大田), 한길(大路)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라는 뜻이다. 사과, 딸기, 포도, 쌀, 수박, 버섯, 오미자, 밤, 양파, 배추, 무 등이 특산물로 생산되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라고 했다.
실개천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녘(황산 2구)'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황산 1구)'이라고 한다. 동녘과 큰땀을 합쳐 약 150여 호가 있는 마을이며 큰땀은 거창 신씨 1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동족 마을, 즉 집성촌이다. 거창 신씨의 시조인 신수는 중국인으로 고려 문종 때 귀화해 참지정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신안지가 병부상서를 역임한 이래 후손들이 거창에 살면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다 신승선(1436~1502)이 이조참판이 되고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딸과 결혼하면서 명문으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딸은 연산군의 부인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신수근(1450~1506)의 딸은 중종의 왕비인 단경왕후가 되어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신 씨의 영광은 거창에도 미쳐 연산군은 거창이 왕비의 관향이라며 현에서 군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단경왕후는 폐비가 되었고, 거창은 다시 현으로 강등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다 황산마을이 본격적으로 신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중종 35년(1540) 요수 신권(1501~1573)이 이곳에 은거하며 구연재를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한 이후부터다.
신권은 거창의 거유인 갈천 임훈의 매부이기도 한데 소년 시절 한양에서 공부하다 "벼슬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자아는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다. 나는 안빈낙도하면서 오로지 인격 수양에 힘쓰겠다"라며 황산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사림은 1573년 신권이 죽자 구연재를 구연서원으로 개칭하고, 석곡 성팽년과 함께 배향했다. 이후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창했고 신수이 역시 구연서원에 배향되었다.
입지는 대체로 평탄하며 주택들은 햇빛을 잘 받는 남동향을 바라보도록 건축되었다. 대부분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며, 마을 전체가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이유는 이른바 씨족 부농으로 소작 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소작이란 토지 소유자가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지 않고 토지 이용권을 일정 조건에 임대인에게 빌려줘 토지 이용 대가, 즉 지대를 받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경우 왕실, 양반 관리, 사찰 등 대지주나 향촌의 사대부, 향리 등이 농장을 개설하고 노비나 일반 농민을 모집해 운영했고 소규모 토지 단위로 행해지기도 했다. 보통 '병작반수제'라 해 농산물의 50퍼센트를 거두어 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큰 틀에서 큰땀에는 양반, 개울 건너 동녘에는 소작인이 주로 살았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전통 마을이라 함은 큰땀을 의미한다.
큰땀의 명성은 마을의 돌담길로도 알 수 있다. 길이는 약 1.2킬로미터에 이르고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2006년 대한민국 등록 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되었고, '전국의 아름다운 돌담길 10선' 중 한 곳으로 뽑혔다. 6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양식 그대로임이 높게 평가된 것이다.
대부분의 전통 마을과 같이 토석 담으로, 흙과 돌을 이용하는 황토색 짙은 담장이다. 자연석과 진흙을 개어 굳혔으며 하부는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용하되 진흙으로 메우지 않고 메쌓기 방식으로 했다. 메쌓기는 찰쌓기에 반대되는 말로 건성쌓기라고도 하며, 돌 면을 잘 맞추어 빈틈없이 쌓는 것이 아니라 대충 빈 곳을 두어 가며 쌓는 것이다.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돌보다 작은 20센티미터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해 진흙과 교대로 쌓았다.
하단부에 큰 돌을 쌓은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마당 내에 고이는 물의 배출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빗물에 진흙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담장 상부에 한식 기와를 얹은 것도 빗물에 의해 진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현장을 직접 방문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토속적인 담과 근대 작품인 도로의 바닥 재료가 미관상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도로의 바닥 재료를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뜻도 되지만 한국의 재래식 토석 담이 각종 이질적인 재료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황산마을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면이 보인다. 그중 마을 입구에서 약 100미터 거리에 있는 시한당 앞의 연못은 여느 한옥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형태를 갖고 있다. 한국 전통의 연못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인데 이 연못은 원지방도형(圓池方島形)이다. 풍수 등의 영향을 받은 전통 연못이 아닌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편협한 격식에만 얽매여 있지 않았다는 좋은 예다.
황산마을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수령 약 600년, 높이 18미터, 폭 7.3미터의 느티나무다. 전통 마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로 안정좌 나무라고도 부르며 황산마을의 신목이라 할 수 있다.
느티나무를 보면서 왼쪽의 개울 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아름다운 담이 계속 이어지는 큰땀이 나타난다. 신씨 씨족들의 기와집들이 줄을 이어 있는데 거의 모든 집이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한 지역에 이처럼 기와집이 밀집한 곳은 거의 없으며 그중에서도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7호인 황산 신씨고가는 단연 돋보인다.
집주인은 당대의 마을에서 독보적인 재산가였으며 집의 규모도 규모지만 장식이나 가구 구성 등이 한국의 전통 한옥이 갖고 있는 규범과 상당히 다르다. 다른 지역의 한옥을 보다가 이 건물을 보면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평면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경남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인 홑집 대신에 겹집의 팔작지붕으로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나타낸다. 우선 사랑채는 궁궐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목재와 장식물로 꾸몄다. 잘 다듬어진 커다란 돌로 쌓은 기단도 장대하다. 더구나 받침돌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주좌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고관의 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집에는 번듯하게 설치되어 있다.
외형만 보더라도 보통 수준의 재력가가 건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세세한 부분에서의 정교함이다. 이는 건축주가 재주가 좋은 명장을 발굴해 기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유·무형으로 지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창호의 문틀과 창살의 미려함이 방문자들을 놀라게 하는데, 아무리 재력이 풍부한 사대부가 주문했다고 할지라도 뛰어난 장인이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는 탁월함이 배어 있다. 고객과 기술자의 절묘한 조화가 없었다면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정도의 걸작이다.
신씨고가는 전통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건축 시기가 1927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격식의 해체와 실용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안채의 경우 방을 늘리기 위해 대청을 좁혔으며 집 안에 화장실을 설치했다. 화장실은 돌계단으로 올라가도록 높이를 높여서 측면에서 변의 처리를 원활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건물 중에서도 안채 옆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전통 한옥의 격식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의 화장실은 집 밖에 두고 안채의 화장실은 집 안에 두더라도 안채 밖에 별도로 설치했다. 그런 면에서 신씨고가가 얼마나 시대적으로 앞서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안채를 둘러싼 부속 건물들도 크고 화려하게 치장했다. 안채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 마당에는 전통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이곳에 작은 나무들을 심었는데 한옥의 기본과 배리되는 일이다. 또한 사랑채에 설치하던 누마루를 안채에도 설치해 실용성을 우선으로 했으며 난간의 형태 역시 파격적이다. 닭다리를 닮은 계자 다리는 띠쇠각주1) 로 난간과 함께 보강했다.
이 같은 건물은 집주인이 아무리 경제력이 풍부했더라도 나라를 빼앗기고 전통이 해체되는 시기가 아니었다면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일제 강점기 시대에 현대화에 따른 격식의 해체, 실용성과 과시,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남다른 대갓집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집이 남다른 것은 건물 뒤에 있는 굴뚝의 높이를 매우 낮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종갓집 며느리인 박정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흉년이 들면 마을 전체가 궁핍하기 마련인데 대갓집 굴뚝에서 불 피우는 연기가 나면 위화감이 조성될 것이라 생각해 굴뚝의 높이를 낮추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거부들에게도 남다른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의 동녘은 가랍집 등이 기본으로 기와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의 영향 등을 받아 서서히 현대 마을로 탈바꿈했고 근래에는 완전히 새로운 마을로 태어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1 마을 미술 프로젝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채택되어 마을 벽화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2006년부터 정부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시행되어 전국적으로 60여 곳의 벽화 마을이 생겨났다. 황산마을은 거창군과 한국미술협회 거창지부 회원들이 주가 되어 벽화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이 특징이다.
큰담에서 짧은 개울 다리를 건너면 동녘 초입의 첫 집에 거창의 유명한 특산물인 거창 사과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마을회관 앞 왼쪽 벽에는 자작나무들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추운 기후에 잘 자라는 자작나무는 높이가 20미터에 달하고 나무껍질은 흰색이며 옆으로 얇게 벗겨진다. 작은 가지는 자줏빛을 띤 갈색이며 지점각주2) 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삼각형 달걀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뒷면에는 지점과 더불어 맥액에 털이 있다. 나무껍질이 아름다워 정원수, 가로수, 조림수로 심는다. 목재로 가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종이를 대신해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큐틴각주3) 이라는 방부제가 다른 나무보다 많이 들어 있어 잘 썩지 않고 곰팡이도 잘 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물인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로 만들었으며, 기원전 1~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경 역시 자작나무로 만든 것이다.
자작나무에는 물도 잘 스며들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 점을 이용해 카누(배)에 자작나무 껍질을 바른 다음 나무 진으로 방수 처리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서 기름을 짜내 가죽 가공에 쓰는데, 이 가죽으로 책 표지를 만들면 곰팡이가 생기거나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나무껍질을 백화피라고 해 이뇨, 진통, 해열을 다스리는 데 썼다.
고대인은 자작나무의 눈처럼 생긴 모양에 신통력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자작나무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작나무를 중요한 곳에 의도적으로 심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는 중국의 둔황 주위에 있는 자작나무다. 이 나무가 둔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있으니 도둑질 등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둔황에 있는 많은 석굴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이유가 자작나무의 효력 때문이라고 믿기도 한다. 황산마을 초입에 그려진 자작나무도 '여기에서 나쁜 짓은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화 자체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내용은 다양하다. 이어서 황산마을과 연계되는 수승대와 요수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 나타난다. 농촌의 상징인 힘센 소가 담장을 뚫고 나오는 그림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돌담에 예쁜 꽃들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다니기도 한다.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두 마리가 목을 빼고 내다보는 그림도 정겹게 다가온다.
벽화 재료가 다양하다는 점도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대부분 페인트로 그렸지만 타일로 사계절 내내 지지 않는 아름다운 꽃과 대나무 등을 만든 것은 물론, 거창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대리석을 이용해 잠자리를 붙여놓기도 했다. 벽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웃집 남매 모습의 조각을 담 안에 설치해 동심을 유발한다. 옛날 시골 마을의 정겨운 생활을 그린 풍속도도 펼쳐져 있고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의미하는 사신도도 있다.
통영, 울산 등 많은 곳에 벽화마을이 있지만 황산의 경우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과 조화를 이룬 예술성으로 더 후한 점수를 받았다. 아쉬운 것은 벽화들이 골목 하나만을 차지하고 있어 감상 경로가 짧다는 점이다. 더구나 외부 벽화의 문제점은 페인트로 그렸을 때 3~5년 안에 퇴화한다는 점이다. 현재 많은 마을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벽화 그리기에 주력하고 있는데, 퇴화에 관한 대비책도 병행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아들여야 한다.
황산마을의 진수는 도로 맞은편에 있는 수승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승대는 그 자체가 황산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황산마을과 인연이 깊다. 이 때문에 전통마을 답사에도 반드시 포함되며 지금은 '수승대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황산마을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수승대국민관광지가 있다. 위락 시설을 지나 오른쪽으로 몇백 미터 가면 관수루가 보이는데, 자연 그대로의 굴곡을 살린 나무 기둥이 천연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이며, 구연서원은 황산마을의 입향조인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를 배향하기 위해 영조 16년(1740) 건립한 서원이다. 관수는 『맹자』에 나오는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라는 문구에서 인용한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누각은 군현의 관아 소재지에서 경치가 수려한 곳을 골라 지었다. 고을 현감이나 중앙 관리가 일정한 날을 선택해 인근 선비들을 불러 시회나 연회를 열기도 했고, 평소에는 고을 사람들이 올라 쉬거나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기 때문에 사찰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세워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관수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계자 난간 팔작지붕이다.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각주4) 와,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하는 형태의 기둥을 사용한 게 특징이다. 관아 건물임에도 휘어진 기둥을 사용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수루 뒤에 있는 구연서원에서는 매년 거창의 자랑인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구연서원 왼쪽에는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승대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이면서 빚어놓은 커다란 천연 바위 대다. 높이는 약 10미터, 넓이는 50제곱미터에 이르며 생김새가 마치 거북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라고도 한다.
수승대는 원래 '수송대'라고 불렸다. 백제 국세가 쇠약해져 멸망할 무렵, 백제 사신을 이곳에서 송별하면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근심 어린 송별'이란 뜻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1543년 퇴계 이황이 이곳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칠 것"을 권해 이름이 바뀌었다. 또 이황은 「사율시」를 지어 신권에게 보냈는데 그 시가 바위 둘레에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하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먼 산의 꽃들은 피어나려고 하고
응달의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수승대를 찾아 구경하지 못했으니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
수승의 절경을 만끽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다. 바위 한쪽에는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인 장주갑이 있다. 이곳에 막걸리를 한 말 넣었다가 스승의 물음에 대답하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받아먹었다고 전해진다.
구연교를 지나면 요수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요수정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했다. 정자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렀다. 마룻보가 있는 5량가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했다. 세부 장식의 격조가 높으며 양반을 위한 정자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추운 산간 지역의 기후를 고려해 정자 내부에 방을 놓기도 하는 등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거창의 대표 건축물이다.
여름철 수승대교 아래는 야외 수영장으로 바뀐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오리 배와 보트를 탈 수 있는 유선장을 운영하며 사계절 썰매장도 가동한다. 마을에서는 약 10여 가구가 민박을 운영해 옛 선조들의 주거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황산마을은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과 가깝고, 근처에는 신라 때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영취사의 부속 암자로 지은 송계사와 송계사 계곡, 거창조각공원, 금원산 자연휴양림, 월성계곡, 거창박물관, 화계사, 쌍계사 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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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장원수, 「산수향의 고장 거창」, 네이버캐스트, 2009년 6월 15일.
- ・ 박상진, 『궁궐의 우리 나무』(눌와, 2001)
- ・ 이종호, 『과학 삼국사기』(동아시아, 2011)
- ・ 편집부, 「한옥에서의 하루」(한국관광공사, 2012)
글
출처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인 한국의 전통 마을.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우리 전통 마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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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황산마을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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