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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전남 나주시 다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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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다도면에 있는 도래마을은 조선 시대 사대부 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전형적인 한옥 마을로, 가구 수가 거의 100여 호나 될 만큼 규모가 크다. 또한 마을지(誌)인 『도천동지』를 만들 만큼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뒷산인 감태봉(140미터)의 양쪽 계곡에서 내려온 맑은 물은 세 갈래로 나뉘어 마을을 통과해 전면 농경지로 유입된다. 주거지는 세 줄기의 수로를 중심으로 후곡, 동녘, 내촌(내곡)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도래마을을 '도천마을'로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의 수맥이 세 갈래로 갈라져 내 천(川)자 형국을 이루는 까닭이다. 천(川)의 우리말이 '내'인 까닭에 도내가 되었고, 도래로 굳어졌다고 한다.
도래마을은 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풍악산(286미터)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지의 서쪽 사면에 조성되어 전면으로 지형이 낮아져 농경지가 있고, 후면으로 산림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마을 뒤쪽에 있는 주산은 조선의 모든 군사가 사흘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다 해서 식산(食山, 292미터)이라 부른다.
마을이 배산임수의 경사 지형에 있으면 주택 후면에 경사지가 생긴다. 전통 마을에서는 현대처럼 옹벽각주1) 으로 처리하지 않고 단을 이루는 낮은 둔덕을 만들어 꽃밭 등으로 조성하곤 한다. 장대석, 사괴석각주2) , 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계단형 사면을 축조하고 단에 수목을 식재해 경사지를 처리한 것을 노단이라고 한다. 노단은 비가 내릴 때 경사면의 유속을 감소시켜 토양 침식과 양분 유실을 방지하고, 토지 전면에 수분을 고루 배분해 경사지 토양이 건조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그런데 도래마을은 주거지 경사가 매우 완만해 옹벽이나 노단 같은 특별 처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주거지 후면과 측면의 가장자리는 고저 차가 크고 경사가 비교적 급하므로 자연 토사 각으로 사면을 처리했다. 인공적인 처리가 거의 없는 자연 토착 마을인 것이다.
도래마을의 특성 중 하나는 방풍림이다. 마을의 오른쪽 전면, 주거지와 다소 동떨어진 곳에 높이 10여 미터의 소나무들이 방풍림을 이루고 있다. 특히 후곡 뒤에는 높이 10여 미터의 대나무와 20~30미터의 소나무가 섞여 띠 모양의 방풍림을 이룬다. 이렇게 다른 수종을 섞어 심으면 밀폐도가 높아져 방풍 효과가 좋아진다.
전통 마을에 찾아가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자리에서는 중요 건물들을 남향으로 건설하기 마련이다. 사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지을 수 있지만 남향집이 주된 까닭은 북향집과 서향집의 문제점 때문이다. 북향집은 겨울이 긴 한국에서 태양열의 혜택을 받지 못하며 서향집도 이에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전통 마을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남향집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방향만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 마을에서는 자신이 사는 건물보다 마을에 맞는 흐름에 순응해 집을 지었다. 당연히 북향집, 서향집이 나왔고 이를 감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도래마을은 고려 시대에 남평 문씨들이 형성했고, 이후 조선 초기에 강화 최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조에 성천 부사를 지낸 풍산 홍씨 홍수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화를 입자 아버지인 홍이가 남평 현령을 지낸 인연이 있는 나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노안면 금안동 반송마을에 터를 잡았으나 홍수의 증손인 홍한의가 이웃인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의 강화 최씨에게 장가들면서 정착했다. 도래마을은 이처럼 점차 풍산 홍씨의 집성촌이 된 동성 마을, 다시 말해 씨족 마을이다. 일설로는 홍한의가 이곳에 사냥 왔다가 최씨 처녀를 만났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영호정이란 학당이 반긴다. 얼핏 보면 정자 같지만 건립 당시 도천학당 또는 동학당이라 불리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영호정은 이조참판, 대사헌,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뽑혔던 휴암 백인걸(1497~1579)이 남평 현감으로 있을 때 세운 네 학당 중 하나로 추정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많은 학사와 인재를 배출했는데, 임진왜란으로 퇴락하자 1900년경 명칭을 '영호'로 바꾸었다.
일반적으로 정자라 하면 사교의 장, 풍류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은 차별화된 학당이었다. 불행하게도 6·25전쟁 때 학당은 모두 불에 타고 정자만 남았지만 영호정은 사립 학교로도 사용된 전력을 갖고 있다.
도래마을과 관련 있는 유명인은 벽초 홍명희(1888~1968)다. 벽초의 조부 홍승목이 이 마을 출신인데 괴산의 한 집안에 양자로 갔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찬의가 되어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겼지만 그의 아들, 즉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 때 금산 군수로 있던 중 일제에 항거해 자결한 강골의 선인이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홍명희는 일제 강점기 때 민족 운동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단 한 편의 소설을 썼다. 유명한 『임꺽정』이다.
도래마을은 원래 홍씨가 80퍼센트 이상이었지만 현재는 외성이 많이 들어와 약 6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유산들은 모두 홍씨와 관련된다. 홍기응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51호), 홍기헌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65호), 홍기창 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제9호)은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홍기응 가옥
도래마을의 특징은 씨족 마을임에도 종가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원천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갓집은 현재 집터만 남아 있고 풍산 홍씨의 홍기응 가옥에서 풍산 홍씨 석계공파의 차종손이 종가를 대신하고 있다.
마을 안쪽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상량문의 기록으로는 안채는 1892년, 사랑채는 1904년 건축되었는데 당대에 도래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건물은 서향이며 직선 축으로 놓여 있다. 안쪽에 一자형 안채가 가로로 놓이고 안마당 사이로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었는데, 축을 맞추면서도 직각으로 틀어서 남향이다. ㄱ자형은 도래마을 전체 주택에서 유일한 구조이며 대청마루를 서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이는 오후의 강한 서쪽 태양빛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앞쪽에는 솟을대문을 갖춘 행랑채가 배치되었는데 대문에 문고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남도 양반 주택의 공간 구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각각의 건물에 돌담을 만들어 독립적이지만 작은 문을 만들어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게 만들었다.
다른 양반집에 비하면 사랑채 앞마당과 안채와의 간격이 좁은 것이 흠이지만 일반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서책을 보관할 수 있는 장서각으로 사랑채에 서고가 있다는 것은 주인이 항상 책 읽기를 기본으로 했다는 뜻이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으로, 집안의 가장이 기거하면서 책을 보고 손님을 맞는 사회적 장소로 활용했다. 대체로 중앙 부분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다. 아버지가 기거하는 큰 사랑방과 아들의 작은 사랑방이 마주보는 것이다. 큰 사랑방을 이어 붙이거나 뒤쪽에 작은 방을 두기도 했는데 이 방에 주로 서책을 두어서 '책방'이라 했다.
안채는 도래마을에 현존하는 안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일자형 6칸이며 전체적으로 별단식 공간 구성을 보인다. 가구 구조는 5량가로 전면과 우퇴면만 원기둥이며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여닫이 세살 창판 분합의 만(卍)자 문양이 독특하다. 집 안에 이런 장식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주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안채는 여자들이 집안 살림을 주로 하는 공간으로 여주인과 며느리, 딸들의 활동 무대였다. 일상적인 식사 준비를 비롯해 제사 음식 준비, 길쌈 등 다양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랑채보다 크게 만들었다. 안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으로 나누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각 차지했다.
이 가옥에서 흥미 있는 것은 곳간에 음식과 종자를 서늘하게 보관할 수 있는 지하 저장고가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냉장고 같은 개념인데 다른 마을에서는 비교적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장독대를 담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다. 먹을거리의 기본인 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정원 시설은 전통적인 조경의 멋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랑 마당의 담장 쪽에 있으며 상징성을 살려 나무를 심었다. 가운데에는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석류나무, 동쪽 끝에는 절개와 옛 벗을 상징하는 매화나무, 서쪽 끝에는 부귀와 영화를 바라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또한 석류나무 옆에 괴석을 두고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동백나무와 목련을 심었다. 나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집안이 잘 되기를 바라는 주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나무에 관한 한 이곳은 한국의 어느 곳보다 자랑할 만하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와 집을 관리하고 있는 홍천성은 수령 100년 정도의 커다란 홍매화를 주목하라고 한다. 꽃 필 때인 봄에는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모여들 정도로 명물이라고 한다.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은 매우 큰 단풍나무인데 놀랍게도 연리지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가지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부부 간이나 연인 간의 사랑을 비유해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또한 성장이 좋은 나무와 발육이 부진한 나무가 서로 양분을 지원해주므로 나눔의 지혜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리지로 유명한 작품은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다.
"하늘에서는 우리 둘이 비익새가 되어 살고지고
땅 위에서는 우리 둘이 연리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천지는 영원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때인가 마지막 날이 오는데
그러나 이 슬픈 사랑의 한스러움은 길이길이 다할 날이 없으리."
이 집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 사랑채와 행랑 마당 사이 담장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만든 구멍이 그것이다. 사랑마루에서 대문간에 들어서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오늘날 현관문에 설치하는 보안경이다. 선조들은 강도가 달려와도 갈지자로 걸을 정도로 양반의 체통을 중요시했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만은 철저하게 보호했다. 그럼에도 보안경이란 아이디어를 낸 것은 당대에 신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와 세태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기헌 가옥
홍기헌 가옥은 활 모양으로 휘어진 샛길을 따라 진입하므로 집 안이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건물은 서향이며 전체적으로 직선을 축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 맨 안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앞쪽에 북쪽으로 곳간채가 있으며, 안채의 중앙에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있다. 사랑 마당 앞에 대문채를 두어서 안마당으로 출입하려면 사랑채의 남쪽 측면을 지나게 된다. 사랑 공간과 안 공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으나 사랑채에 의해 자연스럽게 구분되도록 배치되어 있다.
1790년에 건설되어 도래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사랑채는 정면 4칸에 전후좌우 4방향 퇴를 꾸몄으며 대청을 한쪽으로 시설한 남도 방식의 건축으로 합각지붕이다. 사랑채는 건축한 당시에 호화 주택으로 법에 위반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기단을 높이 쌓은 것 말고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인데 왜 그런 지적을 받았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다행히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문간채는 20세기에 지어진 5칸 겹집의 초가로 오른쪽부터 대문간 2칸, 광, 헛간, 잿간으로 이루어졌고 남쪽 끝의 지붕 구조가 특이하다. 마을의 다른 집들은 새마을 사업 때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지붕 등으로 다시 지었지만 홍기헌 가옥은 다소 번거로운 초가지붕을 유지했다.
홍기창 가옥
1918년 건축되었으며 원래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갖추고 있었지만 현재는 안채만 남아 있다. 평면의 구성과 건물의 구조가 건실해 당시의 주택 모양을 살필 수 있다.
안채는 비교적 규모가 커서 필요한 생활 공간을 확보했으며, 각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외부와의 연결이 편리하도록 했다.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마당이 있으며, 안마당 남쪽에는 최근에 지은 아래채가 있다. 담장은 사랑채 터와 안채 뒤까지 크게 막고 있으며 예전의 중문을 지금까지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구조는 2고주 7량가로 전면과 우측면만 민흘림이 있는 원형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한식 기와를 사용한 합각지붕이다. 원형 기둥은 영광 바닷물에 3년간 담갔던 비자나무를 사용했고, 대청마루는 검은빛을 띄는 먹감나무로 말 오줌에 2년간 담갔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부와 권리를 과시하려던 당시 부농 주거의 특성이 배어 있는 것이다.
도래마을이 씨족 마을이라는 것은 집과 집 사이의 연계로 알 수 있다. 원래 마을은 집들이 밀집 배치되지만 개인 프라이버시도 중요하므로 집촌을 이루더라도 주택 사이는 분리해 건축한다. 그러나 씨족으로 구성된 경우 주민 대부분이 친척 간이므로 이웃 사이에 일상적인 왕래가 잦다. 분리와 연결이라는 모순된 속성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도래마을 집 사이에 이런 이중적인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몇몇 집들이 각각 대문과 담장으로 독립된 주거 영역을 형성하면서도 인접한 주거로 왕래할 수 있는 샛문을 두어 서로 연결했다. 이들 거주자들은 남다른 혈연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한 물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 마을에서 주민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마당이 제대로 조성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마을 길을 조금 넓힌 곳이 마당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도래마을에서는 세 부분의 주거지 모두 안길이 주거지 안쪽에서 몇 갈래로 분기하는 지점에 마당이라고 할 만한 공간을 두고 있다. 동녘에서는 홍기응 가옥 앞의 바깥마당이 마을 마당 역할을 한다. 내촌과 후곡에는 좀더 넓은 마을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후곡의 마을 마당은 농작물 건조장으로 사용되지만 놀이기구들을 설치해 어린이 놀이터로도 사용한다.
도래마을에는 여러 정자가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우산각이다. 우산각은 전라도 지역에서 마을 입구나 마을 주거지와 들판 사이에 세워진 정자다. 원래 공동으로 집회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지만 오늘날은 주로 마을의 할머니들이 사용하고 있다.
우산각은 주로 여름철에 사용되므로 대체로 마루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온돌방 두 칸, 마루 네 칸, 부엌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면과 측면이 2대 1 비율을 가진 평면 비례는 전라도 지방 모정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반면 내촌 입구의 시멘트 기와를 얹은 괴고정은 과거에 콘크리트 구조로 건설되었는데, 최근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는 시류에 따라 전통 한옥풍인 도천정으로 탈바꿈했다. 도천정 옆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여타 마을들과 같이 상징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마을에 사람들이 집결할 수 있는 중심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래마을에서는 세 갈래의 안길이 모이는 곳에 있는 양벽정이 그 역할을 한다. 조선 중기 선공감역, 성균사업 등의 관직을 지낸 홍징이 1587년 능주현 화포(현재 화순군)에 세운 것을 1948년 후손들이 이전한 것이다. 양벽정과 마을 뒤 감태봉을 잇는 선은 도래마을 전체의 중심축으로 마을 공간을 구성하는 기준이다. 양벽정의 입구는 목탑과 마찬가지로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옆에 작은 화장실이 있다.
양벽정은 서향 건물이지만 전면 5칸, 측면 2칸으로 10칸 규모이며 온돌 3칸, 마루 7칸으로 팔작지붕이다. 마루 앞으로 길게 내민 처마가 여름철 햇볕을 차단해주며 시문이 적힌 현판만 19개가 있을 정도로 정자의 용도를 잘 보여준다.
양벽정은 도래마을의 중심 시설일 뿐 아니라 풍산리를 이루는 다섯 마을에서 함께 사용하는 공동 시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섯 마을 주민들은 음력 정월 초사일 음식을 추렴해 새해를 축하하고 공동으로 세배한다. 이때 전해에 수확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음식을 낸다고 한다. 양벽정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영호정과 경관을 공유한다.
양벽정과 대칭되는 위치에 계은정이 있는데 다른 정자들이 마을 앞쪽에 세워진 것에 반해 이곳은 마을 공간에서 벗어나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마을 앞의 정자들과는 달리 주산봉의 중턱, 즉 마을 영역의 뒤쪽 경계 부분에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세워졌다. 사대부들이 현실적인 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조망이 좋은 곳에 누정을 세운 것이다.
모두 6칸의 정자로 그중 중앙 부분에 온돌이 1칸, 마루가 5칸이며 지붕의 전후좌우에 금속재로 된 처마를 달았다. 한옥에 이질적인 재료를 가미하면 어색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계은정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철쭉과 배롱나무들이 주위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데 철쭉꽃이 필 때와 여름철의 풍광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곳에 오르면 앞으로 도래마을이 보이고 멀리 방풍림과 송림제가 보인다.
계은정 앞에는 연못이 있다. 천원지방각주3) 이라는 원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연못 형태는 사각형에서 다소 변형된 凹자형이고 중앙에 원형의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식수는 하지 않았다. 도래마을의 물은 높은 곳에 위치한 계은정에서 시작해 마을을 관통하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양벽정 앞의 연못으로 흘러든다.
도래마을이 속한 나주는 천년 고도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적었다. 세종 때 한글 창제를 도운 신숙주, 거북선을 발명한 나대용 등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과 조선 성종 때 중국 3대 기행문 중 하나인 『표해록』을 지은 최부 등이 이곳 출신이다.
매년 유채꽃과 더불어 영산강변에서 영산포 홍어 축제가 열려 식도락가들을 즐겁게 한다. 10월에는 금성관 일대에서 나주 영산강 문화축제가 열리는데 마한의 추수 감사제인 '소도제'를 시작으로 왕건과 장화왕후 궁중 혼례, 삼현육각각주4) 공연, 나주 목사 부임 행사 등이 성대하게 꾸려지므로 우리 역사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인근에 불회사 대웅전(보물 제1310호), 운흥사(중요 민속자료 제12호),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 도갑사, 쌍봉사, 보성차밭, 소쇄원 등이 있어 수많은 사람의 발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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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한필원, 『한국의 전통 마을을 가다』(북로드, 2004)
- ・ 류성룡, 「나주 도래마을 한옥의 건축 형식에 관한 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9년.
- ・ 한필원, 『한국의 전통 마을을 찾아서』(휴머니스트, 2011)
글
출처
역사가 남긴 신비로운 공간이자 과학이 담긴 지혜로운 공간인 한국의 전통 마을.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 과학까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우리 전통 마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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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도래마을 – 과학문화유산답사기2,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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