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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5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전경린

정념의 폭발

요약 테이블
출생 1962년

전경린(全鏡潾, 1962~ )은 “여성에 관한 꿈과 몽상과 추억”에서 상상력을 길어올린다. 전경린의 소설에서 저 일상성이라는 것의 내면 속으로 퇴각해버린 고유의 여성성은 일탈 욕구가 문득 고개를 들 때 폭발한다. 그것은 흔히 사회의 통념과 일상의 질서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정념의 폭발이다. 한번 폭발한 정념은 차고 넘쳐 이내 끝이 보이지 않는 데까지 흘러간다. 그 불온하고 위험한 넘침은 제도와 규범이 그어놓은 금을 넘어 마침내 여성의 운명이라는 호수를 채운다. 그가 즐겨 다루는 불륜의 서사에는 알 수 없는 섬뜩한 마성(魔性)이 깃들여 있다. 그 광기를 머금은 불륜의 서사로 전경린의 소설은 1990년대 여성 소설의 지형도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광기를 머금은 불륜의 서사로 1990년대 여성 소설의 기수로 떠오른 전경린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전경린의 본명은 안애금이다. 그는 경남대학교 독문과를 나와 한동안 방송 구성 작가로 일한다. 결혼한 뒤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집안일에 묻혀 지내던 그는 199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중편 소설 「사막의 달」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이제까지 그는 창작집 『염소를 모는 여자』(1996) · 『바닷가 마지막 집』(1998), 장편 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1997) ·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1999) 등을 펴낸 바 있다. 그는 1996년에 단편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1999년에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21세기 문학상’을 받으며 1990년대 한국 소설 문학의 중심권으로 성큼 들어선다.

전경린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염소를 모는 여자」를 내놓은 뒤의 일이다. 「염소를 모는 여자」는 일상성의 내면 속으로 퇴각해버린 태초의 여성성 찾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작중 화자 윤미소는 한때 “찬란한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지만, 이미 결혼해 아이를 가진 여자다. 그러나 윤미소가 꿈을 몽땅 털어낸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꿈은 이제 “생의 중립국이며 완충 지대”인 국도변에 가게를 내고 “콧등에 점이 박힌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며 사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변하지 않고는 왜 살 수가 없는 거지. 왜 자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걸까. 난 나 이외의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그저 나인 채로 끝까지 가보고 싶어.”라고.

그 여자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염소 한 마리를 맡긴다. 그는 아파트에서 그 염소를 키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염소는 그 여자가 잃어버린 그 무엇의 상징물이다. “나는 염소의 가지런한 뿔 위에 가만가만 손을 얹어보았다. 인간에게는 단 한 번도 뿔이 없었던 게 확실한 모양이다. 손끝으로부터 섬뜩하도록 낯선 느낌이 전해왔다. 살을 꿰뚫을 듯한······ 야생의 기미”라는 문장을 보면, 염소는 그가 잃어버린 도저한 “야생의 기미”의 표상이다. 그 여자는 한밤중에 염소를 끌고 집에서 나온다. 그 가출은 자신을 얽어맨 채 부식시키고 있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염소를 모는 여자』(문학동네, 1996)
일상성의 내면 속으로 퇴각해버린 태초의 여성성 찾기를 다룬 같은 제목의 단편을 앞세운 창작집 〈염소를 모는 여자〉

전경린은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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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는 “탑 꼭대기의 밤처럼 고요하고 먹처럼 검은 염소······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없는 것으로 직조된 이 삶을 다 아는 듯 고요하고 순수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푸른 심연의 경지일 것이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대로, 운명의 불가해성, 그 “푸른 심연의 경지”를 이미 선취하고 있는 존재다. 그 여자는 염소의 부름에 따라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는 것이다. 염소는 그의 내면에서 잠들어 있던 마성을 흔들어 깨워 저 야성의 들판으로 그를 데려간다.

이 ‘염소’의 이미지와 대척되는 자리에 있는 것이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나오는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 이미지다. 그것은 “패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분 냄새나, 마스카라, 혹은 뾰죽구두같이 여성의 원형적인 향수를 환기시키는 하나의 기호”이며, 동시에 “자신의 생에서 반복될 뿐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딸로, 그 딸의 딸에게로 반복되는 여성에 관한 몽상과 꿈과 오해와 추억 같은 본질적인 아련함을 내포하고” 있는, 범속한 일상성 또는 현실이 용납한 여성 세계의 상징이다. 그러나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는 여성 주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성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에 의해 규정되고 강화되는 세계다. 「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의 여성 화자는 “생리적으로 도발시키는 상대”인 어느 남자와 과격한 정사를 나눔으로써 일상으로부터 탈주한다.

흔히 전경린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일상의 관습에 도저히 길들지 않는 야성을 가진 여자들이다. 그들은 일상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들이 일상에서 감지하는 것은 불행의 징후다. 따라서 그 여자들은 끊임없이 일상 저 바깥으로 탈주할 기회를 노리며 불안하게 서성거린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신적인 시간이며 동시에 야만적인 시간, 고래이며 소이며 하마인, 모든 것이 분화되기 이전의 시간” 또는 “생명이 광기를 부려대는 초록 넝쿨의 시간”(「거울이 거울을 볼 때」)이다. 그 여자들의 이런 탈주 욕망은 현실 속에서 정념으로 폭발한다.

맨몸이 되었는데도 전혀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잔털이 먼저 스치고, 긴장된 피부가 건드려지고 내 키가 그의 목께에 닿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목이 이쪽과 저쪽으로 감기고 부딪치며 가볍게 흥분하고 그리고 짧게 입술을 부딪치고 저절로 열리는 입술의 틈으로 입술들이 틈입하고, 그리고 체온과 맛이 다른 혀가 입 속으로 와락 넘어들어오고, 그리고 팔이 얽히고, 기우뚱 중심을 잃으며 서로의 팔 속으로 좀더 다가서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유체 이탈된 영혼처럼 나의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결합되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며 동시에 너무나 생생하게 의식했던 것이다. 혈관이 진동을 일으킨 마지막 순간에 경련이 반복되는 동안 밤하늘에 번갯불이 일어나듯 내 존재의 어두운 뿌리에 불꽃이 하얗게 튀어오르는 것이 눈에 보인 듯했다. 우리는 두 번의 섹스를 나눈 뒤 똑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초원의 빛’이라는 모텔에서 나왔을 때, 이미 어두워진 하늘 끝에서 밤바람이 불어왔다. 처음으로 머리끝까지 피가 운반되는 신선한 생기가 몰려왔다.
전경린,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문학동네, 1999)
1999년에 펴내 베스트셀러에 오른 장편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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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소설의 여자들은 원초의 ‘나’, 그 몸의 본성을 되찾기 위해 일상의 삶을 무너뜨리며 저 불가해한 운명의 심연 속으로 뛰어내린다. 난교와 불륜을 향해 몸을 던지는 시간, 그것은 “뱀과 늑대와 고양이”의 시간, 즉 관능의 광기가 폭발하는 야성의 시간이다.

1990년 자매들과 함께

왼쪽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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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황현산, 「운명 만들기 또는 만나기」, 『염소를 모는 여자』 해설, 문학동네, 1996
  • ・ 방민호, 「꿈으로 피워올린 녹색 종이꽃의 세계」, 『바닷가 마지막 집』 해설, 생각의나무, 1998
  • ・ 황도경, 「반란의 성, 반역의 삶」, 『우리 시대의 여성 작가』, 문학과지성사, 1999

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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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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