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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5
1990년대 한국문학사적 특징

소설 〈선택〉을 둘러싼 페미니즘 논쟁

요약 테이블
시기 1997년
나는 조선 왕조 선조 연간에 태어나 숙종 연간에 이 세상을 떠난 한 이름없는 여인의 넋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특정하는 유일한 기호는 아버지의 핏줄을 드러내는 장(張)이라는 성씨와 훌륭한 아들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부인(貞夫人)이란 봉작(封爵)뿐이다. 그나마 그 둘을 결합해서야 겨우 딸이거나 아내거나 어머니거나 며느리 또는 할머니라는 여인 보편의 이름에서 나를 특정해 낼 수 있다.

나를 수백 년 세월의 어둠과 무위 속에서 불러낸 것은 너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웅녀(熊女)의 슬픈 딸들이었다. 너희 성난 외침과 괴로운 부르짖음이 나를 영겁의 잠에서 깨웠고 삶을 덧없어 하는 한숨과 그 속절없음에 쏟는 넋두리가 이제는 기억에서 아련해진 내 한 살이(生)를 돌아보게 하였다.
이문열, 『선택』(민음사, 1997)

이문열의 『선택』은 1598년에 안동에서 태어나 1680년에 죽은 정부인 안동 장씨를 불러내어 오늘의 잘못된 여성 해방론자들의 행실을 조목조목 따지며 일갈하고 있는 소설이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퇴계 학통을 잇는 대학자의 무남 독녀로 태어나 시 · 서 · 화에 일가를 이루는 한편, 전처 소생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6남 2녀를 낳아 기른 조선 시대를 대표할 만한 현모 양처(賢母良妻)다. 작가는 그 정부인 안동 장씨의 넋을 오늘 속으로 불러내어 여성다운 삶의 한 귀감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택』을 둘러싸고 논쟁이 붙자 공지영 · 김정란 · 전여옥 · 김신명숙 · 권택영 · 이선옥 같은 여성 작가와 비평가 및 운동가들뿐 아니라, 최원식 · 권영민 · 김경수 · 이순원 · 강준만 · 이동하 · 손세훈 같은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도 이런저런 말을 보태고 나선다.

조선조 때 살다 간 정부인 안동 장씨를 불러내어 오늘의 여성 해방론자들의 행실에 대해 일갈하고 있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

남성 우월주의적 태도 때문에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맹공을 당한다.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선택』은, 드물게는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의 파시스트적 속도와 전염에 대한 비판”(이순원)이라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비평가들로부터 “시대 착오적이며 복고 취향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양반 남성 당파성을 철저하게 관철한 작품”이고 여성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불황기 자본의 요구를 대변”(최원식)하는 소설이라는 말을 듣는다.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이문열, 『선택』(민음사, 1997)

이문열은 이경자와 공지영 같은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의 제목을 언급하며 교묘하게 오늘의 여성주의를 비아냥거리고, 그것을 조장하는 이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작가는 자기 실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가정’을 뛰쳐나오는 오늘의 여성들이 ‘결손 가정’을 낳고, 이혼과 청소년의 비행이 이에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본의 아니게 ‘원인 제공자’가 되고 만 여성 작가 공지영은 한 일간지의 칼럼을 빌려 이렇게 답한다.

그가 어느 대담에서 지적한 대로 나 역시 늘어나는 비행 청소년과 그들이 이끌 미래가 두렵다. 다만, 그 원인이 이혼을 하고 뛰쳐나온 여성들이 만들어 놓은 ‘결손 가정’에 있다는 그의 안이한 발상은 어처구니없다는 것이다. 이문열씨의 말대로 “이혼 증가율과 청소년 비행 증가율이 비례”한다면, 우리보다 훨씬 높은 이혼율을 자랑하는 스웨덴이나 독일의 미래는 차라리 참혹하지 않을까. 사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내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쓴 것은 우리 여성들이 이 암울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놓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작가는, 아니 적어도 지식인과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버려진 사람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이 말이 참되다면 한 시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성(性)이나 계층을 위해 작품을 쓰는 것이 가하고 당한 일인지. 나는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그것이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세간의 편견과 오해에 의해 읽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공지영, 『중앙일보』(1997. 7. 20.)

이문열은 『선택』에서 여성들을 향해 모름지기 “남편 아들 손자 3대에서 이른바 칠산림을 배출한 현모 양처로서 영남 지방에서는 신사임당과 나란히 우러름을 받는 분”인 ‘정부인 장씨’를 본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선택』을 “여성의 위대성, 진정한 페미니즘을 알리기 위해” 썼다고 말하지만, 많은 여성은 『선택』이 보여주는 남성 우월주의의 태도에 반발하며 작가를 “페미니즘에 무지하면서도 무차별하게 공격의 칼날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며 오만하다.”고 성토하고 나선다.

『선택』이 그토록 호되게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반발을 사고 맹공을 당한 것은 그 형식에 내재한 노골적인 남성 우월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정부인 장씨의 넋이 말하는 형식을 빌려 ‘이문열’이라는 한 중년 남성이 “오랜 세월 너희는 틀림없이 억압받았고 착취당했고 능욕당해 왔다. 원시 상태에서 물리적인 힘의 우월을 배경으로 자라온 그 같은 남성 우위의 사회 구조와 의식에 대해 너희가 성낼 만도 하다.”와 같은 구절에서 보이는 대로 “이 땅의 딸들”이니 “너희”니 하며 여성을 일반화해서 제 생각과 논리를 주입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 문단과 여성주의자들로부터 집중 포화식의 공격을 당하고 있을 때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이 소설을 ‘청소년 권장 소설’로 선정한다. 보수론자들의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이 소설이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현모 양처 이데올로기를 높이 산 것이다. 어쨌든 1997년에 일어난 『선택』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쟁은 이문열이 당대 최고의 화제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네가 쓴 책자를 보고 우리가 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너의 교활함이다. 개명된 세상에서 차마 페미니즘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었음인지 너는 네 책자가 ‘반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데 대해 심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너는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을 비판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의 이런 교활한 접근 방식―정면 반박은 불가능하니까 주변적이고 사소한 문제점들을 침소봉대해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본질에 오물을 끼얹어 무력화시키려는 치사한 접근 방식이 다만 가소로울 뿐이다.······ 너의 교활함은 제법 중립적인 체 각 주제를 풀어가는 입담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너는 여성의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희석시켜 ‘세상에 여성 문제는 따로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가 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고통의 도가니’라면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당하는 고통을 부인하려고 한다. 게다가 고통에 저항하기보단 묵묵히 받아들여 견디는 것이 세상살이고 삶의 미덕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주장이 세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기득권자들이 항용 즐겨 쓰는 뻔뻔스런 자기 보호 논리임은 머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다.
김신명숙, 「『선택』의 작가 이문열 서생에게 ― 한 조선조 여인의 일갈」, 『if』(1997 여름)
〈선택〉 논쟁으로 당대 최고의 화제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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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와 『금시조』 그리고 『황제를 위하여』로 이어지는 이문열의 양반 지향적 상고주의(尙古主義)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는 소설의 계보에 드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교술적이고 의사 회고록적인 형식을 껴입은 채 의고체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이문열은 왜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게 뻔한 『선택』 같은 소설을 써서 내놓은 걸까. 이 소설은 “페미니즘이 가장 문제시하고 있는 노동―가사의 문제, 여성으로서의 자아 실현의 희생 같은 문제에 대해 거론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불리하기 짝이 없는 평가를 감수해야만 했”을까.각주1) 김정란은 날카롭게도 “논리의 곡예와 교양주의”로 위장하고 있는 이 “남성 우월주의적 족보의 망령에 사로잡힌 인물”(강준만)의 “가문 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사적 욕망을 꿰뚫는다.

작가의 궁극적인 관심은 실은 그가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천박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궁극적으로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양반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적수를 선택한 것뿐이다. 이런저런 논리의 곡예와 교양주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가 3백년 전의 한 현숙한 부인을 통해서 펼쳐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대단히 사적인 욕망이다. 요컨대 그는 가문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태생적 우월함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이 영남학파 작가는 ‘근본도 없는 여자들’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화 상대자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토론을 벌이기 위해서는 족보라도 챙겨들고 나와야 할 판이다. 그는 토론할 생각이 없다. 그는 야단치고 훈계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반민주적 태도는 이 작품이 택하고 있는 형식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작가는 자신이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체의 ‘토론’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야단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 즉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기 위해서 상대의 혀를 묶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김정란, 「이문열, 이인화······ 박정희」, 『한겨레 21』(1997. 5. 29.)

한 조선 여인의 일대기 속에 따분하고 전근대적인 교훈을 담아낸 소설 『선택』을 둘러싼 논쟁은 여러 매체로 번지며 한동안 이어진다. 논쟁이 이어지자 『선택』은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폭발적 화제를 몰고 온 문제의 신작”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유명세를 타고, 그 결과는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집계에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1997년에 한국 문단을 시끄럽게 만든 『선택』 논쟁을 통해 확인된 것은 ‘문화 권력자’ 이문열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점과, 이문열이 그 ‘문화 권력’을 퍽 부당한 방법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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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강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이문열」, 『인물과 사상』 3호, 개마고원, 1997
  • ・ 손세훈, 「대항하는 개인의 초상」, 『세계의 문학』 1998 여름
  • ・ 김신명숙, 「『선택』의 작가 이문열 서생에게 ― 한 조선조 여인의 일갈」, 『if』 1997 여름
  • ・ 이동하, 「한 기득권을 가진 남성이 선택한 길 : 이문열의 선택」, 『한 문학 평론가의 역사 읽기』, 문이당, 1997
  • ・ 김정란, 「이문열, 이인화······ 박정희」, 『한겨레 21』 1997. 5. 29.

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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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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