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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5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문정희

빼앗기고 짓눌린 여성성

요약 테이블
출생 1947년

여자는 몸을 태아처럼 둥글게 웅크린다. 여자는 점점 작아진다. 여자는 실재를 잃어버리고 헛것으로 떠돈다. 남자들이 지배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 속에서 여자들은 유령으로 떠돌기 일쑤다. 문정희(1947~ )의 시는 그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남자 중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소외에 관심을 기울여온 시인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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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다. 진명여고 재학 시절부터 그는 여러 대학의 백일장을 휩쓸면서 학생 문사로 이름을 날린다. 문정희는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중이던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나온다. 이제까지 그는 『문정희 시집』(1973) · 『새떼』(1975) ·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 『아우내의 새』(1986) · 『찔레』(1988) ·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1) · 『남자를 위하여』(1996) 등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1975년에는 ‘현대 문학상’을 받고, 1997년에는 ‘소월 시문학상’을 받는다.

    • 1〈키 큰 남자를 보면 ― 소월 시문학상 수상 작품집〉

      문정희는 1997년에 소월 시문학상을 받는다.

    • 2여성과 남성의 평화적 공존 관계를 노래하기 시작한 〈남자를 위하여〉
허허벌판에 누워 / 깨끗한 남자를 기다린다. // 불꽃이 울면서 짐승같이 / 젖무덤 속으로 기어든다. // 나무들은 간지러워 / 푸른 소리를 지르고 // 드디어 그 남자가 / 길을 무찔러오는 소리 // 부끄러운 머리채를 이끌며 / 내가 어둠과 함께 도망친다. // 바람 지나가면 / 날개가 크게 걸리는 / 거미줄을 타고 / 얼굴 모르는 신과 만난다. // 뱀과 미친 깃털이 / 낄낄거리며 흩어진다. / 모든 것을 용납하는 / 그 야수의 무덤 속으로 / 나는 바삐 숨는다.
문정희, 「떠오르는 방」, 『문정희 시집』(월간문학사, 1973)

문정희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떠오르는 방」은 관능을 노래하고 있는 시다. 김정란은 문정희의 시를 두고 “퍼내도 퍼내도 들끓는 내면의 용암.”각주1)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관능의 용암이다. 그 관능의 용암은 남성 중심주의 사회의 억압에 짓눌려 속에서만 들끓고 있다. 문정희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여성성은 아직 “누워” “남자를 기다”리고, “부끄러운 머리채를 이끌며” “어둠과 함께 도망”치는 수동적 여성성이다.

문정희의 시에서 여성은 소외의 존재이자 무엇을 박탈당하는 존재다. “시아버지는 내 손을 잘라가고 / 시어미는 내 눈을 도려가고 / 시누이는 내 말을 뺏아가고 / 남편은 내 날개를 / 그리고 또 누군가 내 머리를 가지고 / 달아”(「유령」)난다. 여성 주체를 둘러싼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에게서 “잘라가고”, “도려가고”, “뺏아” 간다. 이처럼 여성은 빼앗기는 존재, 잃어버리는 존재다. 따라서 여성은 마침내 지워진 존재, 즉 “유령”이 된다. 이 유령은 방에 유폐되어 웅크리고 있거나, 꿈틀댄다.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 오빠! /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 꽃이 되지 않으리 // 모처럼 물안개 걷혀 /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 불혹의 기념으로 / 세상 남자들은 /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어주던 그 헌신을 /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 오빠로 불려지고 싶어 안달이던 / 그 마음을 /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주지 않을 수 있으랴 //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 헐떡임이 사라지고 //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는 /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문정희, 「오빠」,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미학사, 1991)

문정희의 시는 후기로 넘어오면서 관능성 안에서만 화해를 이루던 “남자”를 받아들인다. 겨우 밀폐된 방에서 “꿈틀대던” 여성은 “세상의 남자들”을 향해 “오빠”라고 부른다. 시인은 이처럼 세상의 남자들에게 육친성을 부여함으로써 남성의 동물적 공격성과 폭력성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적대성을 희석시키고 여성과 남성이 평화적 공존 관계를 구축하자, 여성도 덩달아 억압 기제에서 풀려난다. 그 때 비로소 “유령”은 피와 살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 당당하게 되살아난다. 여성은 이제 지워진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와 함께 시인의 어조도 천연덕스럽고 푸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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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김정란, 「흐르고 싶은 감자, 감자, 감자들······」, 『키 큰 남자를 보면 ― 소월 시문학상 수상 작품집』 해설, 문학사상사, 1996
  • ・ 이희중, 「날개 없는 새의 꿈」, 『기억의 지도』, 하늘연못, 1998
  • ・ 김재홍, 「진실의 소중함과 아름다움」, 『문학정신』 1990. 12.
  • ・ 정연자, 「문정희의 시 세계」, 『한국 여성 시인 연구』, 평민사, 1996

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출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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