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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5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정찬

권력을 향한 욕망의 뿌리와 역사의 환부를 이야기 하다

요약 테이블
출생 1953년

정찬(1953~ )은 장용학 · 최인훈 · 박상륭으로 이어지는 관념 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는 작가다. 정찬의 소설이 무거운 것은 그 관념성 때문이다. 1990년대의 젊은 작가들 대부분이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타고 문학의 강을 건너지만, 그는 스스로 무거운 역사를 안고 흐르는 강이 되기를 원한다. 정과리는 그의 소설을 두고 “성과 속의 동시적 발생학”이고, “말의 권능과 말의 타락의 동시적 발생학”각주1) 이라고 말한다. 정찬의 소설은 성과 속 사이의 골짜기로 흐르는 강이다. 그의 소설이 대체로 무거운 것은 부박한 세속의 삶을 뚫고 나오는 권력 욕망의 뿌리와 역사의 환부를 더듬는 진지함에서 비롯된다.

권력을 향한 욕망의 뿌리와 역사의 환부를 진지하게 더듬는 작가 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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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태어난 정찬의 본명은 정찬동이다. “수줍음 많이 타는 소극적인 소년”이던 그는 197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83년 『언어의 세계』에 중편 소설 「말의 탑」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는 이제까지 창작집 『기억의 강』(1989) · 『완전한 영혼』(1992) · 『아늑한 길』(1995), 장편 소설 『세상의 저녁』(1998) · 『황금 사다리』(1999) · 『로뎀나무 아래서』(1999) 등을 펴낸 바 있다. 1995년 그는 「슬픔의 노래」로 제26회 ‘동인 문학상’을 받는다.

1998년에 내놓은 장편 소설 〈세상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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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인간의 욕망이라면 변혁과 혁명 역시 인간의 욕망이다. 전자가 증식으로의 욕망이라면, 후자는 정화에로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자는 스스로 생명을 끊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그러나 정화에의 욕망에 시달리는 변혁가와 혁명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증식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정화로 다가간다. 정화의 세계를 움켜쥐려는 과격한 욕망의 짧은 불꽃이다.
정찬, 「완전한 영혼」, 『완전한 영혼』(문학과지성사, 1992)

작가들은 더러 저희가 창조한 인상적인 인물로 기억되기도 한다. 정찬이 내세운 인물 중에서 「완전한 영혼」의 장인하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장인하는 광주항쟁의 충격으로 청각을 상실한 인물로 “악의 실체를 모르는 정신”의 소유자이며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이다. 작가는 어린애 같은 천진 무구함과 자기 희생 정신을 지닌 장인하를 통해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저도 모르게 쌓인 파괴적인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반성하게 만든다. 작가는 사람들이 진보와 혁명의 꿈에 사로잡혀 마음속의 증오와 원한을 정당화할 때, 그 진보와 혁명은 권력과 마찬가지로 욕망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처받은 자의 적의”는 또다른 권력 욕망을 키우고, 그것은 다시 누구를 가해하고 “상처받은 자의 적의”를 낳는다. 악순환인 셈이다. ‘무욕한 인간’ 장인하 같은 순수한 영혼에서 나오는 사랑만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악순환의 사슬을 끊는다.

그것은 상처받은 자의 적의였다. 상처는 언제나 적의를 만든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적의 역시 그만큼 깊어진다. 훼손된 세계는 훼손된 질서를 필요로 하며, 훼손된 질서는 상처를 요구한다. 내 욕망은 훼손된 질서를 이용했고, 그리고 청년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는 어디로 갔는가. 내가 쉽게 잊어버렸던 것처럼, 시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깊은 정신의 동굴은 끊임없이 신음하며 훼손된 세계의 땅과 하늘 사이를 떠돈다. 내 욕망이 만들어낸 신음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 떠돌고 있는가.
정찬, 「신성한 집」, 『완전한 영혼』(문학과지성사, 1992)

권력은 상처를 만들고, “상처받은 자의 적의” 속에서 권력 의지는 새로운 움을 내민다. 새로 움튼 권력 의지는 묵은 권력을 부식시키며 스스로 하나의 권력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회로다. 그 회로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이타적 사랑이다. 「완전한 영혼」의 장인하는 이런 이타적 사랑을 지녔기 때문에 ‘완전한 영혼’이다.

천진 무구함과 희생 정신을 지닌 인물을 등장시켜 ‘5월 광주’에서 비롯된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반성으로 이끄는 같은 제목의 작품이 실려 있는 소설집 〈완전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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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집」은 고문자의 사상을 소설화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고문은 권력의 구체적 실상이 가장 극적으로 제 몸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고문은 권력의 위계 질서 안에서 특히 폭력을 통해 인간을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 속에 고착시키려는 제도화된 폭력이다. 그러나 권력의 실체는 언제나 고문하는 자의 뒤쪽에 제 몸을 숨긴다. 고문하는 자는 권력의 말단으로 기껏 더 높은 권력의 실체로부터 발화된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고문받는 자는 제 육신에 가해지는 폭력과 모독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권력의 위계 질서를 추인한다. 흔히 고문하는 자와 고문받는 자는 대립과 증오의 관계 속에 놓인다. 그들은 제 욕망 속에서 권력 의지를 부화시키고 끊임없이 권력 탈취 순간을 넘본다는 점에서 한몸이다. 고문에 대해 증오와 원한을 품는 고문받는 자도 권력을 손아귀에 넣으면 이내 고문하는 자로 변신한다.

정찬의 소설 「얼음의 집」은 하야시라는 고문 기술자를 내세워 인간이 마음속에서 키우는 권력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야시는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생명이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희귀한 정신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권력에 짓눌리는 피억압자의 내면에서는 권력 욕망이 자란다. 변혁과 혁명은 또다른 권력 지향 욕망이며, 인간은 이런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사랑만이 집요한 권력 욕망을 정화시키고 인간을 구원한다.

잘 들어라. 이것은 나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너는 아들을 갖지 말아라. 권력은 한 올의 사랑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한 올의 사랑 때문에 내 얼음의 집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던가? 아니었다. 사랑의 얼굴로 변신한 권력이었다. 혈육 속으로조차 파고드는 권력의 냉혹한 생명 운동. 한 마리 작은 새는 증오의 부리로 얼음의 집을 쪼고 있었다. 너는 아들을 갖지 말아라. 그리하여 얼음의 집을 완성시킨 최초의 인간이 되어라. 그 장려하고 황홀한 얼음의 집을.
정찬, 「얼음의 집」, 『완전한 영혼』(문학과지성사, 1992)

‘얼음의 집’은 인간의 집요한 권력 욕망으로 짓는 집이다. 그 욕망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고문 기술자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아들을 갖지 말라고 권유한다.

정찬에게 세계는 권력의 장이다.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또다른 동일한 욕망과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긴다. 그것은 인간의 살아남음에 대한 욕망과 마찬가지로 질기고 집요하다. 이 세상에 고문과 폭력과 살상이 그치지 않는 것은 모두 그 욕망 때문이다. 정찬의 소설은 대체로 “근대적 욕망 체계와 그것이 빚어내는 권력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의 모색”각주2) 으로 이해된다. 그 소설적 모색의 끝간 곳에 「완전한 영혼」의 장인하가 서 있다.

1960년대 중반에 가족과 함께

앞줄 맨 오른쪽이 어릴 적의 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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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홍정선, 「권력과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 『완전한 영혼』 해설, 문학과지성사, 1992
  • ・ 정과리, 「권력의 모든 것과 모든 것의 권력」, 『황금 사다리』 해설, 자유포럼, 1999
  • ・ 박해현, 「상처의 빛, 성찰의 말」, 『세계의 문학』 1993 봄
  • ・ 문흥술, 「자본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 『세계의 문학』 1996 봄
  • ・ 「오늘의 작가 정찬」, 『작가세계』 1999 겨울

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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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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