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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5
1990년대 한국문학사적 특징

도시와 환경의 주체 그리고 문학

‘도시’, 새 문학의 징후와 맥락

요약 테이블
시기 1990년

후기 산업 사회의 문화적 징후의 집적체로 떠오른 도시 / 환경 속에서의 실존의 문제, 즉 인간의 정서 구조, 욕망, 상상력, 주체, 내면의 인식론 등은 1990년대 한국 문학이 관심을 가져야 마땅한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문학은 흔히 한 사회의 변화 양상에 대해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인지하고 형상화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1980년대 문학이 일방적으로 기우는 양상을 보인 사회주의 이념과 분명히 거리를 둔 도시 / 환경과 관련된 문제는 1990년대 문학이 탐구해 마땅한 영역이다. 이미 환경―공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과 시들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일과성 현상이 아니라 1990년대 문학의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징후다.

도시화 또는 산업화가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이 자본 축적의 도구로 인식되어 마구 개발되고 남용될 때 마침내 유한한 가용 자원의 황폐화와 고갈에 이를 것이며, 이는 곧 생물학적 개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자연에 기댈 수밖에 없고, 또 그 자연 위에 살림의 토대를 세워야 하는 인간에게 생명의 토대 상실과 죽음을 뜻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환경 파괴는 인간의 탐욕스런 자본주의적 이윤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또 인간의 오만과 이기주의, 그릇된 믿음에 그 원인이 있기도 하다.

한 사회학자는 그 점을 “환경이 인간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동식물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 유기적 체계인 한, 인간은 환경을 동류의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주변의 동식물들과 공유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인간만이 독점하고, 인간 중에서도 특정 인종, 특정 계급, 특정 집단만이 향수(享受)할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믿음이 오늘날 대규모의 환경 파괴를 가져온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자본의 이윤 동기와 환경 파괴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그 사회학자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의 이윤 동기는 무섭고도 맹목적인 것이다. 이윤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열대의 오지나 극지, 사막까지도 마다않고 치닫는 자본은 이윤 그 하나를 위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능사로 삼아 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의 개발 사업과 새로운 공업 단지의 조성에서 우리는 자본과 환경간의 근원적인 대립 관계를 보게 된다. 아름다운 해안을 매립하여 석유 화학 단지를 만드는가 하면 심산 유곡을 깎아 호텔을 짓는다. 탈황 시설이 안 된 정유 공장을 가동하여 휘발유를 공급하게 되면 결국 도시의 대기를 잔뜩 오염시킬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모른 척 가동한다. 환경과 인체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독극물들을 행정 관청의 눈을 피해, 또는 그 묵인 아래 하천으로, 대기로 뿜어내고 있다. 상수원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소규모 공장, 축사, 매운탕집 등도 모두 이윤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 단위들이다.
최재현, 「삶을 살리는 환경, 환경을 살리는 사회 체제」, 『사회평론』(1991. 5.)

김신용(1945~ )은 최승호와는 다른 ‘도시 체험’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최승호가 삶의 자리로서의 도시 / 환경의 일상 세계 속에 파고드는 오염과 환경 괴멸의 위기적 징후들이 지닌 억압성을 심리적 불안과 공포로 드러내고 있다면, 김신용은 육체에 직접 가해지는 비인간적 도시 체험의 세목들을 꼼꼼하게 재현함으로써 사회 경제적으로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도시 빈민의 사회 심리학적인 반응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효구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김신용은 1980년대에 나타난 박노해나 백무산 같은 노동자 시인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시인이라기보다 도시 빈민 계급의 시인이다.

도시 빈민의 사회 심리학적 반응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인 김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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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의 가난은 도시 최저 생계비 이하의 가난이다. 우리가 가난을 규정할 때 쓰는 잣대는 무엇일까. 가난은 대략 다섯 가지 범주의 사회 경제적 특성이 결합된 것이다. 그 다섯 가지의 사회 경제적 특성은 “낮은 소득, 낮은 교육, 미숙련 노동자들, 수준 이하의 주택, 그리고 파산 가정의 어린이들”이다.각주1) 최저 생계비로 삶을 유지하는 도시 빈민에게 과소비 문화의 도시 / 환경은 욕망과 충족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행복한 삶의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일그러지는 굶주림과 결핍의, 엄혹한 수난과 치욕, 모독이 강요되는 삶의 자리다.

고향이 있는 이에겐, 돌아갈 / 어머니의 품속이 있는 이에겐 / 서울이여 / 너는 언제나 잿빛 얼굴로 외면하는구나 / 콘크리트에 덮인 네 단단한 가슴 속에 숨겨놓은 / 불빛은 / 보여주지 않는구나 살다가 지치면 / 몸 팔다 팔다 지치면 돌아가야지 / 이 앙다무는 이에겐 / 깊게 감아버린 눈꺼풀의 벽 속에 맺혀 있는 / 눈물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 못살아, 네 가슴팍 쥐어뜯는 몸부림의 손톱자국에는 / 폐수를 흘려 내리고 / 짓찧는 울음의 이마에는 검은 매연만 피워 올리는구나 / 어둠의 각질로 굳어진 네 살갗 속 숨은 / 혈관을 타고 / 뜨겁게 흐르는 피는 적셔주지 않는구나 / 네 폐허의 몸에 온몸 성기가 되어 파고들지 않는 / 뿌리에겐 / 너는 쇠의 심장을 가진 공장지대일 뿐, 이 무덤 / 속의 자궁은 만나지 못하는구나 / 무덤 속, 그 자궁을 베고 누운 태아일 때 / 서울이여 / 너의 불빛은 포근한 양수(羊水)가 되는구나 / 콘크리트의 가슴은 탄생의 집이 되는구나
김신용, 「비가」, 『개 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 1990)
비인간적 도시 체험의 세목들을 꼼꼼하게 재현해 펼쳐 보인 김신용의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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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의 세계는 노동자 합숙소, 날품팔이, 막노동, 매혈, 도둑질, 부랑자, 뚜쟁이, 시라이꾼, 시장 바닥, 몸 파는 여자들, 뼈 국물로 이루어진 밑바닥의 비루한 삶의 세계다. 김신용의 시는 도시 / 환경이 끌어 안고 있는 한 범주의 삶에 대한 중요한 체험과 인식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의 도시 / 환경에서의 체험은 개체의 자기 실현의 움직임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유린당한, 버려짐 · 짓밟힘 · 억눌림의 부정적 체험이다. 그의 시는 체험의 직접성으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힘을 느끼게 한다. 김신용의 시적 자아들은 도시 / 환경을 “쇠의 심장을 가진 공장지대”로 받아들인다. 그의 시적 자아들의 무의식 속에는 아직 농경 문화적 삶의 경험과 정서가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고향으로 “몸 팔다 팔다 지치면 돌아가야지”라고 안스러운 희망을 가까스로 되뇌지만, 도시 / 환경은 그들의 실존을 짓누르고, 그 작고 소박한 꿈의 실현마저 무산시켜버린다.

도시 / 환경이 그들에게 주는 것은 “폐수”와 “검은 매연”이다. 김신용의 시적 자아들과 도시 / 환경 사이에는 하나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콘크리트는 그 장벽의 상징체다. 도시 / 환경은 그 내면에 감춘 “불빛”이나 “혈관의 피” 같은 것을 김신용의 시적 자아들에게 “보여주지 않”거나 “적셔주지 않는”다. 이런 것은 콘크리트 장벽으로 차단되기 일쑤이고, 최저 생계비 이하의 도시 빈민들을 ‘외면’한다. 그들은 영원히 도시 / 환경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즉 삶의 근거를 세울 수 없는 이들의 절망과 좌절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의 앞머리에서 잠깐 내비치고 있는 농경 문화적 정서에 대한 그리움의 잔재는 다음에 도시 / 환경과 자아 사이의 부정적 경험을 논의할 때 퍽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는 김신용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압구정동’이나 연예 오락 같은 도시 대중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부박한 유행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도시 정서를 노래하는 유하의 시 세계가 언뜻언뜻 드러내는 농경 문화적 정서에 대한 친화력은 김신용의 시 세계와 비교할 때 어떤 의미망을 갖고 있을까.

무사히 빵간을 나온 친구놈의 자축연에 갔었네 / 염색공장, 공해방지 시설의 그 엄청난(?) 가동비 손실이 두려워 / 밤이면 몰래 폐수를 하수구로 흘려보내던 녀석 / 비만 내리면 으흐흐,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던 녀석 / 단속의 쇠고랑, 룸살롱의 술과 여자로 잘도 녹이더니 / 이번에는 재수 더럽게 걸렸다고 투덜거리던 술판, / 이 억울함을 복수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 비분강개할 때, 얼음판에 미끄러진 소처럼 / 우리는 눈만 껌벅거렸네. 도대체 2백만 원의 벌금 / 1~2년의 집유선고가 웃긴다는 것이네 / 푸른 죄수복을 입고 미결 감방에 갇힌 것 자체가 헷갈린다는 것이네 / 뭐? 그 주전자의 물이 지랄맞은 공해업소의 오수(汚水)라고? / 피부가 갈라지는 독한 염색수가 섞인 폐수, 물고기가 살 수 있도록 / 정화(淨化)된 정수장의 물 대신, 단속반의 눈을 피해 / 잽싸게 수돗물을 담아주었는데, 뭐? 그 수돗물이 / 마시면 물고기의 등이 꼬부라지는 몇 PPM의 폐수라고? / 기가 막혀! 취해 흐물거리는 녀석의 푸념을 들으며 / 나도 헷갈렸네. 대체 누가 죄인인지, 알콜중독의 / 금단증세처럼 흐릿해져 가는 내 망막에 떠올랐네 / 공룡, 그 큰 덩치로 초식(草食)을 하듯 인수(人樹)에 돋아난 / 돈잎을 뜯다가 끝내 사람마저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모습이―. / 과음의 새벽, 그 쓰린 속 시원히 적셔주던 청량감(淸凉感)의 / 수도꼭지에서 수없이 미끄러져 나오는 도마뱀, / 투명한 물비늘의 보호색으로 위장한 그 물, / 지구가 무덤을 이룬 지각변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파충류 / 잡으려면 꼬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 흐르는 물을 닮은, 그 무서운 보호술의 미로에서 / 그 도마뱀, 거대한 식인(食人)의 공룡으로 자라 있는 모습이―.
김신용, 「도마뱀 꼬리, 혹은 미로놀이」, 『몽유 속을 걷다』(실천문학사, 1998)

김신용의 또다른 시는 한결 직접적인 언술로 환경 오염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도마뱀 꼬리, 혹은 미로놀이」는 환경 오염에 대해 죄의식과 위기 의식이 전혀 없는 채로 공장에서 오염 물질을 배출하다가 적발되어 감옥에 다녀온 한 친구의 경험을 들려준다. 물론 평면적이긴 하지만 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환경 오염에 대해 범죄적 몰이해가 보편화되어 있는 사회 현상과 인간의 반생명적 이기주의, 그리고 그 결과인 인류적 피해의 무서움에 대한 경고다.

그러나 이 시에는 환경 오염을 환경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부도덕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 종속시킬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 주제가 시의 적절함에도 이 시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울림은 약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환경 오염 문제는 ‘축적을 위한 축적’의 논리를 가진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발전 논리와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그 발생을 묵인 또는 조장한 체제 모순의 산물이다. 환경과 자본, 환경과 체제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의 급속한 팽창은 생태 환경을 오염시키는 심각한 공해 물질들의 생산과 누적, 확산의 대가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유황 분진과 악취로 뒤덮힌 공단 주변의 대기와 중금속으로 오염된 하천을 무시한 대가로 총량적 경제는 괄목하게 성장했으며 대기업들은 그들의 (독점)자본을 확대시켜나갔다(현재, 산업 폐수 배출량의 87퍼센트는 대기업이 차지한다). 정부 당국은 그 동안 이를 조장했었다. 무모한 경제 성장 우선 정책은 총량적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산업이면 그에 따른 비화폐적 대가가 아무리 엄청난 산업이라 할지라도 묵인하고 때로 이를 장려했었다. 이러한 파행적 산업화와 자원 이용과의 관계에 덧붙여 지적되어야 할 점은 우리 경제가 부존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속에서 자원의 높은 해외 의존도를 불가피하게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 경제의 자본주의화 과정은 저임금 노동력의 착취 그리고 자연 자원의 착취와 화폐로 계산할 수 없는 환경 오염 및 세계 체계에의 자원 종속 심화를 그 대가로 한 것이었다.
최병두, 「자원 이용과 생태 환경의 위기」, 『사회와 사상』(1990. 1.)

이 사회학자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 환경의 위기는 한 사람 또는 공해 물질을 배출하는 한 업체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문제이며 아울러 체제 차원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생태 환경의 위기를 비밀주의나 관료주의의 억누름을 통해 은폐, 축소하려고 해서는 문제를 더 악화시킬 따름이다. 환경은 우리 삶의 기본 토대다. 환경을 잃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모두를 잃는 것이다. ‘환경을 살리는 대안적 삶의 양식’은 어떤 것일까. 1990년대 ‘환경’ 문학은 환경 오염 또는 환경 파괴에 대한 고발의 차원을 넘어 이런 전망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김신용의 「도마뱀 꼬리, 혹은 미로놀이」는 ‘환경’ 문학에 대한 인식의 시발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시 / 환경, 그리고 주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하재봉을 빠뜨릴 수가 없다. 하재봉은 『비디오 / 천국』이라는 시집을 통해 비디오나 퍼스널 컴퓨터와 같은 문명의 이기의 사용이 일상화된 세계에서의 인간의 자의식, 이를테면 매순간 의식의 표면에 스쳐 지나가는 꿈 · 욕망 · 기억 · 상상 · 도덕 · 분열의 잔상을 포착하고, 언어의 조작을 통해 되살려낸다. 『비디오 / 천국』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거느리고 있는 우의성을 감안하더라도, 그 천국은 아울러 비디오 테이프나 텔레비전 수상기, 영화의 스크린 같은 것이 제공하는 고도의 오락성과 풍요한 정보를 통한 즐거움과 재미, 그리고 욕구의 억압성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점에서 되새겨 볼 만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비디오’란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같은 것, 일상 생활의 영역 속에 침투한 기술 사회의 자아와 세계 사이의 매개가 되는 어떤 것이다. 비디오는 자연의 죽음 이후 우리 일상의 영역에 자리잡은 소리 · 영상 · 이미지 등을 재현하는 차가운 매체이며, 도시 / 환경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알리바이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내구 소비재의 한 상징으로 존재한다. 하재봉은 그 비디오에 눈길을 준다. 즉, 도시의 일상을 차갑게 재현해내는 비디오의 기능과 구조에 주목한 것이다.

나의 사유는 16비트 컴퓨터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부터 작동된다 / 모니터의 녹색 화면에 불이 켜지고 / 뇌하수체의 분비물이 허용치를 넘어 적신호가 울릴 때까지 /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의 손은 검다 / 부화되지 못한 욕망과 도덕적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할 / 내 개인적 삶의 흔적은 / 컴퓨터 파일 [삭제] 키를 누르기만 하면 사라진다 / 나의 하루는 컴퓨터 스위치를 올리는 것 / 그리고 끊임없이 기록하고 기억을 저장시키는 것 / 세계는, 손 안에 있다 / 나는 컴퓨터 단말기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도시와 / 땅 밑의 태양 그리고 미래의 태아들까지 연결된다 / 나의 두 눈은 환한 불을 켜고 있는 TV / 나의 심장은 거대하게 돌아가고 있는 공장의 발전실 / 모든 것은 개인용 컴퓨터의 스위치를 올려야만 움직이기 시작한다 / 전기를 공급하는 것은 그러나 그대의 의지 / 나는, 내 몸 속으로 힘을 공급해주는 누군가에 의해 사육된다
하재봉, 「비디오 / 퍼스널 컴퓨터」, 『비디오 / 천국』(문학과지성사, 1990)
도시의 일상들을 차갑게 재현하는 비디오의 기능과 구조에 주목한 하재봉의 시집 〈비디오 /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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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은 도시 / 환경의 문화 구조 속에서 고도 산업 기술 사회의 산물 가운데 하나인 비디오가 가진 독특한 상징성에 주목하고, 초기의 물과 불, 강과 태양, 안개와 나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들과 저녁 안개로 이루어진 자연 환경 속에 매몰된 신화 발굴 작업으로부터 홀연히 귀환해 새로운 도시 ‘신화’를 창조하려는 야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비디오는 하재봉의 도시 ‘신화’ 창조에 동원된 도구인 셈이다. 하재봉은 왜 비디오에 주목했을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기술 진보 사회의 자아들이 직면하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 공학과 나날의 생활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 · 단절 · 소외를 극복해보려는 생각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며, 이와 같은 시도가 가진 뜻에 대한 자의식이 알게 모르게 「비디오 / 퍼스널 컴퓨터」를 감싸고 있다. 하버마스는 “오늘날, 고도로 공업화된 체계 속에서는 거대 공업 사회에서의 기술적인 진보와 생활 관리 사이의 갭을 조정하려는 힘찬 시도가 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생존이라는 생물학적인 기본 가치, 즉 초안정성과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각주2)

도시 문명 구조 위에 자신의 생존 근거를 마련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과장하자면, 그의 ‘사유’조차 개인용 컴퓨터를 작동하는 “모니터의 녹색 화면에 불이 켜지”는 순간부터 가능하다. 그 기계에 의해 ‘부화되지 못한 욕망’과 비난받을 수 있는 ‘개인적 삶의 흔적’은 기억되고, 재현되고, 조작되고, 관리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나’의 욕망과 행동은 개인용 컴퓨터의 단말기 뒤에 숨어 있는 더 큰 컴퓨터, 즉 국가 조직, 체계, 제도, 테크노크라트 등에 의해 기술적으로 통제 · 관리 · 지배되고, 궁극적으로 주체의 사회적 운명까지 ‘내’ 뜻과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활사적인 환경이 ‘자연 환경’에서 ‘기술 환경’으로 이행한 모든 주체의 사회적인 운명은 주체들의 손을 떠나버렸다는 뜻이다. 그 때 모든 주체는 하재봉의 「비디오 / 퍼스널 컴퓨터」의 시적 자아처럼 “나는······ 누군가에 의해 사육된다”고 암담한 어조로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하재봉의 일련의 시들은 분명히 1990년대의 도시 / 환경 문학의 한 중요한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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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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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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