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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5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윤대녕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길

요약 테이블
출생 1962년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 온다

제도와 체계는 끊임없이 금기를 만든다. 마치 금기를 낳는 것이 신성한 소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금기는 제도와 체계 뒤에서 그것을 조종하는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든든한 방호벽이며, 그 벽 안에서 권력자들은 안심하고 기득권의 성찬을 즐긴다. 때와 곳을 넘어 권력자들은 저희의 기득권을 흔드는 현실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문학은 금기의 경계 바깥을 넘보며,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러나 문학이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 할 때 권력은 문학을 억압한다. 문학은 월경함으로써 세계의 껍질을 찢고 비로소 제 존재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이미 내부의 힘이 고갈되어버린 문학은 그 껍질을 찢고 나올 수가 없다. 금기에 대한 도전의 열망이 사그라든 문학은 늙은 문학이며, 그것은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에 처한 문학이다.

늙은 문학은 스스로를 생성해나갈 힘을 잃어버리고, 자의식이 배제된 답습과 자기 표절을 자양분으로 연명하며 제도와 체계에 빌붙어 그 비굴한 여생을 유지하려 한다. 세계 전복의 힘이 없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숙주에 기생할 수밖에 없고, 권력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금기의 당위를 선전함으로써 기생의 대가를 지불한다. 그렇게 문학은 제 몸을 파는, 다름아닌 더러운 매춘에 나서는 것이다.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길 포기한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문학은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젊은 문학만이 세계의 껍질을 찢고 나온다. 젊은 문학의 내용은 흔히 불온하고 과격하며, 그 형식은 이전에 없던, 낯설고 실험적인 빛깔을 띤다. 젊은 문학은 ‘새롭게’ 자기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 속에서 생성의 힘을 수혈받는다. 문학은 언제나 젊은 문학이어야 한다. 젊은 문학은 먼저 스스로를 부정하고, 세계를 부정한다. 다시 말해 끊임없는 자기 갱신이야말로 문학의 존립 근거이며, 자기 갱신의 의지는 세계 갱신으로 나아간다. 젊은 문학은 금기를 하나씩 깨뜨려나가며 금기 뒤에 숨어 있는 권력의 음모와 계략, 그리고 악을 폭로한다. 그 폭로를 통해 이전에 선으로 여겨지던 권력이 사실은 악이며, 회칠한 무덤이고, 추문의 덩어리임이 돌이킬 수 없이 드러난다. 결국 젊은 문학의, 금기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위반은 제도와 체계 속에 스며든 권력에 미세한 균열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그것을 해체한다. 그 해체를 통해 문학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권력을 조금씩 무너뜨린다.

새로움의 한 징후 『은어 낚시 통신』

1990년대 한국 소설의 징표는 사인성(私人性) 또는 내면성의 복원이다. 1980년대의 거대 이념이 붕괴하면서 “리얼리즘, 문제적 개인, 역사, 진정성”(진정석)과 결별한 그 1990년대 소설의 중심에 윤대녕(尹大寧, 1962~ )이 있다. 윤대녕은 여로형 소설의 작가다. 자폐적이고 내성적인 윤대녕의 작중 인물들은 끊임없이 어디로 떠난다. 선운사, 쌍계사, 남해 금산, 속초, 감포 앞바다, 유럽으로. “그의 인물들은 흔히 바닷가, 사막, 사찰,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과 같이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출세나 돈벌이나 권력이 아니라 구도나 사랑, 혹은 아름다움이다.”각주1)

일상으로부터의 탈주,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도정을 그려내는 윤대녕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나 “희망의 밥그릇은 비워진 지 오래고 혁명을 꿈꾸기에는 벌써 나약해져 있는 나이”(「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인 30대 남자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독신이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며,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그들의 동선은 현실과 신화, 실재와 환상 사이를 지나는 존재의 시원(始原)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래서 윤대녕 소설의 한 화자는 “내게는 꿈이 생시요 생시가 곧 꿈이다.”(「빛의 걸음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은어 떼와 같은 존재들이다.

정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곽에서.
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은어 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

그들을 부르는 것은 ‘그녀들’이다. 그들은 “삶의 사막”에서 메마른 일상과 버거운 싸움을 벌이다가 홀연히 ‘그녀들’의 호명을 받는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렇다. 어느 정체 모를 집단에서, 그녀가, 나를 부른 것이다. 그녀가 아직 이 서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니!
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은어 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

‘그녀들’의 호명을 받고 그들은 모천, 즉 존재의 시원으로 나아가는 행로에 들어선다. 그들은 ‘회유중’이다. 「은어 낚시 통신」에서 그를 불러낸 그 여자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당신도 돌아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먼 곳에 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간 돌아오는 길을 영영 잊어버리게 될지도 몰라요.”라고.

윤대녕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는 평택 · 의정부 · 대전 등지로 전학을 다닌 끝에 초등 학교를 마친다. 어릴 적에 윤대녕은 평범한 아이였다. 작가는 “나는 병약한 소년이었고 누나 동생들에 비해 학교 공부도 그닥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며, 도대체 아무 특징도 없는 아이였다.”고 말한다. 1981년 그는 중 · 고등 학교 때 백일장에서 받거나 현상 문예에 당선되어 받은 상장 몇 개를 들고 단국대학교 불문과에 문예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1988년 『대전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소설 「원」이 당선되고, 이태 뒤인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소설 「어머니의 숲」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작가로 나선 이래 그는 창작집 『은어 낚시 통신』(1994) · 『남쪽 계단을 보라』(1995) ·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1999), 장편 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1995) · 『추억의 아주 먼 곳』(1996) · 『달의 지평선』(1998) · 『코카콜라 애인』(1999) 등을 펴낸 바 있다. 그는 1994년에 제2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1996년에 「천지간」으로 제20회 ‘이상 문학상’을 차지하며, 1998년에 「빛의 걸음걸이」로 제43회 ‘현대 문학상’을 받는다.

일상 또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한 채 시원을 찾아 떠나는 인물들을 그린 윤대녕의 첫 창작집 〈은어 낚시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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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을 소설가보다 시인에 더 가깝다고 말한 사람은 김화영이다. 김화영은 윤대녕의 소설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의 연속성보다는 비약적인 암시와 이미지를 통한 형상화, 섬광과도 같은 순간의 포착, 순간과 순간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과 단절의 표현에 능하다.”고 쓴다.각주2) 윤대녕 소설의 화자인 ‘그들’의 삶은 탈역사적이며 탈정치적인 공간 위에 세워진다. ‘그들’의 눈길은 현실이나 역사 같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다. 많은 비평가가 윤대녕 소설의 주제로 “내면성의 추구”를 꼽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일상 또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 있다. ‘그들’은 지금―여기에 머물지 못하고 ‘저 곳’을 향해 떠난다. 그런데 ‘그들’의 떠남은 공간 이동이 아니라 시간 이동이다. ‘그들’이 목적지로 삼고 있는 ‘저 곳’은 존재의 시원 또는 원초적 고향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윤대녕 소설의 내면성 추구의 주제가 때때로 ‘여자 찾기’로 변형된다고 말한 사람은 김정란이다. 김정란은 “윤대녕의 ‘여자 찾기’는 그렇게 내면성의 추구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단정지어 말한다. ‘그들’의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들’이 서성거린다. “그녀는 잡힐 듯, 잡힐 듯, 작가의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증발해버린다.”각주3) 윤대녕의 소설 속에서는 많은 여자가 갑자기 사라지고, 주인공들은 사라진 여자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으며 그 행방을 추적한다.

『추억의 아주 먼 곳』에 나오는 권은화가 대표적인 경우다. 현실의 공간에서 증발해버린 ‘그녀들’은 “사막에 사는 사람” 또는 “상처에 중독된 사람”(「은어 낚시 통신」)들인 ‘그들’을 불러낸다. 「천지간」에서 문상을 가던 작중 화자는 애초의 목적지를 버리고 무엇에 홀린 듯이 낯선 여자를 따라 땅끝 마을까지 흘러간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름 · 직업 · 옷 · 용모 등 ‘그녀들’에 대해 꽤 세밀한 정보를 주는 편이다. 그러나 흔히 ‘그녀들’은 실체가 아니라 추상이며 환영이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자아의 정체성 안에 실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김정란). 그래서 “매양 헛것에 쫓겨 기어이 떠나게 돼도 거기서 또 번번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더욱 낯설고 사막이 아득했다.”(「은항아리 안에서」)는 작중 화자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윤대녕의 소설에서 여자들은 더러 ‘꽃’이나 ‘서역의 사막’ 또는 ‘아버지의 환영’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은 종종 어떤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이를테면 “요즘 나는 자주 이런 꿈에 시달려. 잠결에 누가 뚜벅뚜벅 다가와 나를 툭툭 치며 잠을 깨우는 거야.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처럼 말이지. 하지만 눈을 뜨는 게 두려워. 그렇게 깨고 나면 내가 여기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라고.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저기를 향해 떠나는 것은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의 어찌할 수 없는 본래적 기질이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거적때기를 벗고, 닫혔던 모든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것도 훌렁 벗어버리고 때로 길 떠나자 하는 마음을 어찌하랴.”(「신라의 푸른 길」)라고 탄식하듯 말한다. 낯익은 현실이 아니라 낯선 저 어디에 있을 것만 같은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들’은 하염없이 저 존재의 시원으로 회유한다.

그녀는 산란중인 은어처럼 입을 벌리고 무섭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세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벽에 모로 기대어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먼 존재의 시원, 말하자면 내가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보다 많은 밤과 낮을 필요로 해야 했다.

긴 흐느낌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가까스로 그녀에게 다가가 살아 있는 자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차디찬 손을 완강하게 거머쥐었다.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은어 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윤대녕의 주인공들은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현실을 거슬러올라 존재의 시원을 찾아간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머나먼 도정을 그려내는 작가 윤대녕은 그의 소설이 현실 도피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역사를 신화적 상징의 거울에 비춰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원형을 통해 우주적 질서와 존재의 순수성을 환기시키고 싶다.”고 덧붙인다. 199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징후의 하나인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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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김화영, 「별을 찾아가는 그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해설, 생각의나무, 1999
  • ・ 김정란, 「창밖의 여자들, 그러나 기다리는······」, 『추억의 아주 먼 곳』 해설, 문학동네, 1996
  • ・ 박철화, 「불연속과 연속 : 존재의 일치와 성숙」, 『코카콜라 애인』 해설, 세계사, 1999

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출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5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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