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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혜롭고 행
복한 집 한
예별이

구성을 통해 계급 질서를 표현하다

유교 형식미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채의 어울림을 통해서다. 원리는 창과 같다. 창의 구성이 단순한 물리적 배치에서 벗어나 어울림과 화목함의 미학을 표현하고 나아가 인과 예라는 유교 형식미를 표현했다. 건물 단위인 채도 마찬가지다. 한옥은 여러 개의 채로 구성된다.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가 기본 단위다. 각 채는 다시 여러 개의 작은 공간 단위로 한 번 더 나누어진다. 행랑채는 방·광·우사·창고 등으로, 사랑채는 대청과 방 등으로, 안채와 별채는 대청·방·부엌·광·안 행랑채 등으로 나눈다. 이런 여러 구성 단위는 각자 개별 지붕을 따로 가지면서 그대로 조형 단위가 된다. 가장 흔한 것은 채 하나가 그대로 조형 단위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채를 구성하는 더 작은 단위들이 조형 단위가 되기도 한다.

한옥은 이처럼 집을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단위로 나눈 뒤 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공중에서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한규설 대감가를 보자. 중앙에 'ㄱ'자로 꺾인 큰 집이 안채다. 오른쪽 모퉁이에 역시 'ㄱ'자로 꺾인 조금 낮은 건물이 별채, 왼쪽 모퉁이의 큰 단일 건물이 사당이다. 사당 위쪽의 낮은 건물이 안 행랑채다. 오른쪽 가장 안쪽의 팔작지붕 건물이 사랑채이며 그 왼쪽에 'ㄱ'자로 꺾인 낮은 건물과 일자 건물이 행랑채다. 'ㄱ'자 건물은 중문채, 일자 건물은 대문채로 한 번 더 분류하기도 한다.

한규설 대감가 공중 전경

여러 채로 나눈 뒤 재조합하는 한옥 구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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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큰 건물 하나 안에 모든 시설을 다 집어넣는 서양식 구성과 큰 차이다. 차이를 넘어 반대된다고까지 할 만하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배경이다. 신분 계급에 따라 행랑채와 본채를 나누었고 다시 남녀유별에 따라 사랑채와 안채를 나누었다.

둘째, 건축적 배경이다. 한국인은 건물을 지을 때 작은 덩어리 여럿으로 나눈 뒤 합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공간이 나오며 특히 마당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셋째, 정서적 배경이다. 크고 작은 조형 단위들의 어울림을 통해 가족 관계, 특히 화목함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이렇게 구성되는 전경에 어울림의 미학이 나타나고 이것은 창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화목함을 드러낸다. 화목함은 대가족이 사는 모습을 잘 표현해준다. 큰 채가 웅장한 팔작지붕과 큰 몸집을 드러내며 중심을 잡는다. 그 옆으로 작은 채나 구성 단위들이 붙으면서 어울린다. 때로는 다소곳이 복종하듯, 때로는 적극적으로 응대하며 어울린다. 큰 채는 작은 채를 누르거나 겁박하지 않는다. 몰아내지도 않는다. 몸과 살을 맞대고 품으며 함께 어울린다. 작은 채들끼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몸과 살을 맞대고 섞으며 옹기종기 모여 화목하게 어울린다.

학봉 종택 전경을 보자. 안채,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 솟을삼문 등 한옥을 이루는 기본 채들을 잘 갖추었다. 중요한 것은 지붕 높이다. 위계를 나타내지만 정치사회적 의미의 신분 계급처럼 엄격하지 않다. 위압이나 착취보다는 어울림의 미학을 표현한다. 굳이 채를 구별하고 여기에 신분을 대응시킬 수는 있겠지만 부질없어 보인다. 10여 개의 크고 작은 지붕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화목한 모습을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 지붕은 그냥 어울리지 않는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울리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지붕이 드러내는 어울림은 곧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어울림이다.

학봉 종택 전경

10여 개 지붕이 높이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에 따른 신분 계급을 읽어내기보다는 지붕들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화목한 모습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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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창과 같다. 차이도 있다. 채가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전경 구성은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정도가 창보다 약하다. 한옥은 채나 채의 하부 단위 등 조형 단위가 많기 때문에 전경에서는 친구, 부부, 친자 등 창 두 개가 만들어내는 것 같은 관계는 표현하기 쉽지 않다. 그 대신 종합적인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것은 창보다 강력하다. 유교 형식미 역시 더 확실하게 표현된다. 한옥의 전경 구성이 갖는 건축적 의미는 유교 미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로 인과 예다. 흔히 유교 정신을 압축해서 인의예지라 한다. 이 가운데 한옥의 전경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은 예와 인의 미학이다.

예는 계급 구조를 건물에 반영한 것이다. 멀리서 한옥의 전경을 보면 지붕을 통해 집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수평 지붕이 두 장이나 세 장 위아래로 겹치며 그 사이로 이것보다 하나 적거나 동수인 삼각 박공이 솟아오른다. 이런 구성은 이유가 있다. 가부장적 계급 사회였던 유교 시대 때 신분 계급을 반영하는 것이다. 계급은 건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지붕, 몸통, 구조, 장식 등 여러 요소를 통해서 가능하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사는 건물은 이런 요소들이 더 크고 화려하며 형식 위계도 높다.

창덕궁 낙선재

한옥 전경에서 몇 개의 수평선이 겹치고 그 위로 지붕이 솟는 구성은 행랑채-안채-사랑채에 따른 신분 계급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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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구성은 이 가운데 지붕과 관계가 있다. '행랑채-안채-사랑채' 순서로 지붕이 크고 높다. 형식도 마찬가지다. 한국 지붕에서는 팔작지붕이 맞배지붕보다 계급이 높다. 행랑채에는 팔작지붕을 쓰지 못했다. 안채는 둘 다 가능했으며 사랑채는 팔작지붕이었다. 종합하면 한옥의 전경은 대부분 담과 행랑채의 낮은 수평선이 가장 아래에 깔리고 그 위에 안채의 높은 수평선과 낮은 박공지붕이 올라가며 다시 그 위를 마지막으로 사랑채의 높은 박공이 마감한다.

의성 김씨 종택

왼쪽의 안채가 그 앞의 행랑채를 거느리는 형국은 지붕 차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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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전경을 본 것이고 실제로 집 속으로 들어가보아도 이런 위계는 명확히 드러난다. 수애당을 보자. 사랑채는 팔작지붕을 활짝 펴며 앞의 행랑채를 거느린다. 처마 선은 양반의 도포자락 같고 박공은 사모관대 같다. 두벌대 기단을 깔고 그 위에 퇴마저 올려서 몸통 높이를 높였다. 지붕과 합쳐서 보면 양반의 위용을 과시한다 할 만하다. 그 앞의 행랑채는 기단도 있는 둥 없는 둥 낮으며 맞배지붕에 그쳤다. 집에 사는 사람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낸다.

수애당 사랑채와 행랑채

전경에 드러난 계급 차이는 안에 들어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의 건축적 차이는 그대로 신분 차이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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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이용해서 계급 질서를 반영하는 구성을 미학에서는 사회미 혹은 사회적 형식미라고 부른다. 동서양이 공통이다. 서양에서는 주로 고전 오더가 이런 구실을 한다. 독립 원형 기둥이 반원 벽기둥보다, 반원 벽기둥이 사각 벽기둥보다 각각 위계가 높으며, 같은 사각 벽기둥 사이에서도 절반 돌출이 사분의 일 돌출보다 위계가 높은 식이다. 사회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 질서, 도덕률, 법도 등의 문명 가치를 건축으로 표현해서 공고히 해주는 미학을 통칭하는데 동서양 모두 주로 계급 사회 때 강하게 나타난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지배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봉사의 성격을 띠기 쉽다.

한옥에 나타난 지붕의 위계 차이를 동양 미학으로 환원하면 '예별이(禮別異)'의 유교 가치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별이'란 말 그대로 '예절은 차이를 구별하는 기능을 갖는다'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차이는 다름 아닌 신분 계급인 것이다. 예별이는 계급 질서를 바탕에 깐 유교 가치의 대표적 예다. 의식주를 비롯해서 공예품 등 일상생활의 모든 점이 계급에 따라 다른데 집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더 크고 화려한 집에서 사는 것은 일면 상식적이긴 한데 이것을 계급 질서를 표현해서 굳건히 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것이다. 하인 계층은 집의 구성에 나타난 차이를 보면서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깊이 깨달아 말썽 안 부리고 지배 계급에 더욱 순종했을 것이며 같은 논리가 여성과 남성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했을 것이다. 계급 사회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여서 사회적 안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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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집필자 소개

서울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건축을 소재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펼쳐보기

출처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 저자임석재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옥이 주는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한옥이 조금 불편한 것은 더 큰 장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한옥에 담긴 진정한 미학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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