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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한 집 한
옥
그림자와 여운의 미학
해가 넘어가면서 걷어간 그림자가 못내 아쉽다면 여운을 즐기면 된다. 어차피 있더라도 머물지 않을 무형이었다. 여운쯤은 남긴다. 그림자는 사라지지만 여운은 남는다. 이것을 즐기면 된다. 한 수 더 뜨자면 여운을 포함하는 집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집의 분위기는 여운까지 포함하는 큰 총합이다. 이쯤 되면 그림자에서도 온기가 느껴진다. 그림자는 졌지만 그 여운은 사람이 막 뜬 것 같은 체온처럼 느껴진다. 밤이 깊어 여운마저 사라지면 그때는 자면 된다. 각종 전자 기기의 노예가 되어, 부질없는 관계 놀이에 중독되어 잠 못 드는 밤을 보내며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현대인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눈에서는 사라졌지만 이것까지 즐길 수 있게 되면 한옥의 미학에서 최고수에 이른 것이다. 한옥의 위대한 지혜다.
동양 미학에서는 여운을 중요하게 여겼다. 음에서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쉼이 소리 자체보다 중요하다. 동양에서 음은 호흡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들숨만 쉬면 몇 분 만에 죽는다. 날숨이 중요하다. 들숨은 본능적으로 깊이 들이쉬게 되어 있다. 공기를 최대한 많이 들이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날숨이다. 욕심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흥분하고 화가 나 있을수록 날숨은 얕아지고 가빠진다. 이것은 마음의 평온을 깨뜨리고 몸의 노화를 촉진시켜 생명을 갉아먹는 짓이다. 날숨의 길이를 조절하면 명상이 되고 흥분된 교감신경을 가라앉히는 수양과 치유가 된다. 건축에서는 비움의 미학과도 통한다. 집이 살고 공간이 살려면 적절하게 빈 곳이 있어야 한다. 화려한 장식과 값비싼 집기로 꽉 찬 집은 가게이거나 박물관이지 사람 살 집은 아니다. 사람은 탐욕에 치여 병들어 나간다.
도가에서는 이런 여운의 미학을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는 기막힌 사자성어 한마디로 요약했다. 진짜 큰소리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 소리라는 뜻이다. 전율이 이는 수사학이다. 미학적 의미와도 통한다. 진짜 큰 아름다움이란 눈에 안 보이는 상태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림자도 그 가운데 하나다. 여운이 비밀이다. 여운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연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뛰어난 심미 작용을 한다. 그림자는 고정된 형태나 색으로 넘쳐나는 장식을 거부하고 여운으로 아름다움을 짓는다.
지붕 그림자는 창이 작고 회벽의 면적이 넓을수록 선명하게 찍힌다. 회를 막 발라서 바탕이 처연하도록 희면 더 좋다. 공기는 파래야 되고 해는 붉을수록 좋다. 이것마저 부질없는 욕심이라면, 좀 오래되고 바래도 상관없다. 이제 지붕의 그림자놀이가 시작된다. 김동수 고택 안채를 보자. 그림자가 없었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심심했을까. 작은 창이 바닥에 붙어 작게 났고 그 위가 전부 벽으로 남았다. 그림자가 없었으면 지루하고 단조로웠을 것이다. 그림자는 처마선과 서까래와 막새의 합작품이다. 창을 밑으로 내려 그림자가 문양을 찍을 바탕 면을 마련했다. 친절이고 예절이다. 서까래와 막새의 그림자가 반복되면서 장식을 부린다. 일렬로 줄을 서지는 않는다. 중간에 여러 곳 뒤뚱거린다. 약간 서툰 맛이 오히려 정겹다. 아래쪽 창틀의 소박한 모습과 짝을 이룬다.
같은 건물의 다른 곳을 보자. 이번에는 반대로 벽만 있으면 안 될 뻔했다. 그림자가 창과 어울린다. 창뿐 아니다. 벽을 지탱하는 중간 보와 기둥과도 어울린다. 벽과 보가 면을 나누고 그 사이를 창으로 메우는 장면은 한옥 입면의 정수이자 그것만으로 완벽한 추상 미학이다. 여기에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그런데도 제법 잘 어울린다. 한옥의 추상 입면이 워낙 절제를 전제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무채색의 그림자가 끼어도 흐트러짐이 없다. 구성 분할된 입면을 위아래로 한 번 더 쓱 나누었을 뿐이다.
회벽은 흰색이기 때문에 햇빛의 색깔을 받아 드러낸다. 김동수 고택 안채를 계속 보자. 해가 기세등등한 낮에는 회벽이 밝게 빛난다. 그러나 저물 때쯤에는 붉은 색으로 우는 것 같다. 해가 왕성할 때에는 그림자도 왕성하다. 해가 붉은 노을빛으로 울면 그림자도 따라 운다. 안채의 왼쪽 바깥쪽 부분은 부엌의 뒷면인데 이 부분은 서향이다. 겨울 오후 짧은 해가 넘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비치는 햇빛은 다소 힘이 없긴 하지만 짙은 주황색의 차분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집 안 곳곳이 이런 식이다. 이것만 보고 즐겨도 집은 하나의 추상 미술관이 된다. 서양의 추상화가들도 겉으로는 짐짓 가치중립적 완결성을 고집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다질과 감성을 실어내고 싶었다. 한옥은 이것을 수백 년 전에 먼저 해냈다. 붓도 없이 그림자만으로.
채 사이의 간격이 좁고 구성이 복잡하면 옆채의 지붕 모습 전체가 그림자로 질 수도 있다. 한옥 지붕은 본래대로라면 엄숙하고 반듯하지만 그림자로 내려앉을 때에는 모양이 자유롭게 변한다. 태양 각도에 따라 왜곡이 일어나고 부분만 잘려져 보이기 때문이다. 수산 지곡리 고가를 보자. 옆 건물의 지붕이 동물 모양으로 둔갑을 해서 흰 회벽 위에 둥지를 틀었다. 옆 건물의 흰 벽을 쿡 찌르듯 침범하기도 한다. 땅바닥에서부터 간지럼을 태우듯 스멀스멀 기어오르기도 한다. 모두 한옥에서 지붕 그림자를 보며 즐길 수 있는 놀이다.
운현궁은 그림자가 뛰어난 집이다. 노안당과 노락당 모두 그렇다. 지붕 그림자를 종합적으로 모아놓았다. 서까래와 막새가 그림자의 전형을 내리면 옆 건물의 그림자가 거든다. 옆 그림자는 마당을 가로질러 회벽 밑동을 두드린다. 이 공간의 주인은 그림자라 할 만하다. 그림자는 버릴 대상으로만 알았지 공간의 주인이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흰 회벽과 마당 모두에서 그림자의 활약이 눈부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왕릉의 석상처럼 한 번에 찍혀 무언으로 서 있기도 한다. 지붕과 지붕을 만나게도 해준다. 이 건물의 일자 지붕과 저 건물의 맞배지붕이 모두 그림자로 나와 손을 뻗어 잡으려 애쓴다. 그림자는 둘을 실제 상태보다 훨씬 가깝게 이어준다. 건물 이름에 '노(老)' 자가 들어가서 그럴까. 그림자의 지혜가 뛰어나다. 머물지는 않는다. 슬퍼할 것도 아니다. 내일 또 만난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림자의 인연은 이어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마당은 흰 회벽 다음으로 그림자에 중요하다. 마당은 그림자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운현궁 노락당에서는 자칫 심심할 뻔한 너른 마당에 시원하게 선을 그어 영역을 가른다. 그림자가 있는 부분까지가 건물의 영역임을 알린다. 이것은 너무 기능적이고 흑백 가르기 같다. 나무 그림자를 마당에 담을 수 있다면 좀더 부드러워진다. 한옥에서는 대류와 복사 작용을 위해 원래 마당에 나무를 심지 않지만 가끔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심는 경우가 있다. 담 밖에 심기도 한다. 송소 고택 별당을 보자. 나무는 구석에 서 있지만 그림자는 마당 가운데를 차지한다. 그림자가 지는 동안만은 당당하다. 집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그림자일 뿐이다. 마당을 정말로 차지하진 못한다. 그림자로라도 마당에 나무를 심고 싶었다.
귀촌 종택은 나무 그림자가 뛰어난 집이다. 빈 마당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대청에까지 오른다. 한겨울 나목의 앙상한 가지가 마당에 그림자를 놓으면 훌륭한 예술작품이 된다. 심심한 마당에 옅은 화장을 한 것 같다. 그림자는 심재(心齋)에 이르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심재란 내 마음을 모두 비워 대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 혹은 대상과 실제로 일체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림자는 마당을 비워 심재에 이르렀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증거다. 마당이 가득 차면 그림자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 그림자는 마당을 건너 대청까지 오르기도 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겨울 늦은 오후가 제격이다. 실제로 그림자 길이가 가장 길게 나오는 것도 이때다. 이번에도 귀촌 종택이다. 대청에 오르는 본새는 예절 바르다. 나무 그림자는 손님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친구처럼 대청에 올랐다 돌아간다. 마당에 이어 대청까지도 비웠기에 가능하다. 한옥은 이처럼 빛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에도 조형 역할을 부여한다. 양의 상태로서의 진짜 나무와 음의 상태로서의 그림자 나무, 둘을 모두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한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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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 주는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한옥이 조금 불편한 것은 더 큰 장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한옥에 담긴 진정한 미학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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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그림자와 여운의 미학 –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임석재,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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