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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한 집 한
옥
소통, 돌아가기, 질러 가기
원통은 바람길 같은 환경 요소에 유리하다. 물을 뚫어 썩음을 막고 병을 쫓아 악을 차단하는 상태가 '통'이다. 나무가 막히면 좀벌레가 생기며 풀이 막히면 거름이 되는데 이것을 막아주는 것이 '통'이다. 창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통'할 때에만 방 안에 사는 사람의 정신과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집에 숨통을 터주니 그 숨통은 곧 사람에게 숨통이 되어 돌아온다. 집과 사람은 닮게 되어 있다. 본래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통과 교류에도 유리하다. 집이 사람을 닮으니 식구들 사이의 접촉 가능성과 그 형식을 늘려준다. 의사소통 방식을 다원화한다는 뜻이다. 집의 중심을 벽을 이루는 물질로 보지 않고 벽 사이의 공간을 오가는 발길로 본 것이다. 집의 요체를 벽이 한정하는 면적으로 보지 않고 발길에 따라다니는 식구들 사이의 소통과 교류로 본 것이다. 벽으로 막고 각자 면적을 깔고 앉아 안으로 꽁꽁 걸어 잠그는 집은 물심양면 모두 건강할 수 없다. 사람 몸으로 치면 혈끼리 단절되어서 기가 막힌 상태다. 소통과 교류가 끊기니 그 집안의 분위기와 가풍은 말 그대로 '기가 막히게' 된다. 한옥은 이것을 경계했다.
대가족제도 때 집이라서 더 그랬다. 가부장제 집이기 때문에 엄격한 위계는 필요했지만 이와 동시에 식구 수가 많은 대가족 집이었기 때문에 위계만 고집하다간 자칫 '기가 막힌' 집이 되기 쉬웠고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통하고 저렇게도 통하게 만들었다. 삼대 십수 명이 한 집에 살다 보면 식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소통과 교류는 경우의 수로 셀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얼마나 많은 만남과 모임이 일어났을 것이며, 또 얼마나 다양한 소통과 모의가 필요했을 것인가. 드러내고 싶은 소통도 있었을 것이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적절하게 복합적이고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공간 구조가 필요한데, '원통'한 공간이 최고였다.
한옥에서는 돌아가기와 질러 가기가 동시에 가능하다. 일부러 돌아갈 수도 있고 질러 갈 수도 있다. 사람이 집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돌아가야만 하는 사정과 여유가 생기게 마련이며 반대로 질러 가야 할 급한 형편도 벌어진다. 둘을 구별해서 할 수 있게 해주면 그 공간은 최고다.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에 이동 동선이 일직선 복도밖에 없다면 이는 오히려 기능적이지도 못하게 되며 더더욱 정성적인 집은 절대 될 수 없다.
한국인 특유의 상대주의 국민성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한국인은 한 방향으로만 굵고 곧게 난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로와 샛길, 갈림길과 곧은 길이 적절히 섞인 '재미있는' 길을 좋아하며 이런 길을 즐긴다.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흔히 한국인의 파벌을 이야기할 때 쓰는 부정적인 말이지만 잘 따져보면 산하가 이루어지는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다른 것이 모이니 이합이요, 모였다 흩어지니 집산이다. 종으로 합하니 합종이요, 횡으로 이으니 연횡이다. 본디 산줄기와 강줄기가 이렇지 않던가.
한옥의 원통 공간에 나타난 갈림길과 선택권은 이런 자연의 형상을 옮겨놓은 것일 수 있다. 한옥에 동선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매우 과학적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동선이 여러 개라는 사실은 이동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다. 이것은 지혜의 선물이다. 시간 따라, 형편 따라, 기분 따라, 계절 따라 '골라 가는 재미'가 있다. 이동 중간에 보는 장면이 각각이고 맡는 냄새와 듣는 소리 또한 제각각이다. 이것들을 조합해서 즐기면 된다. 한옥은 다질성을 보장해주는 집이다. 집 안에서의 이동이 즐김과 감상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일상생활에서 정말로 큰 축복이다.
한옥에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한옥을 복잡하고 불편한 것으로 알지만, 한옥에는 지름길도 있다. 한옥에서는 급할 때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 효율의 가치를 절대 무시하거나 모르지 않았다는 의미다. 다만 효율의 존재를 다른 다원주의 요소 속에 묻어 꼭 필요할 때에만 꺼내 쓰게 했을 뿐이다. 효율 하나에 목매달아 정말 소중한 많은 것을 생매장시키는 우를 피해가는 지혜다. 효율을 살리는 것이 기능이라고 했을 때 한옥은 이처럼 분명 기능적이기도 한 것이다.
몇 개의 큰 축이 형성하는 중심 뼈대는 곧 질러 가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지름길이다. 혹은 사선 방향의 동선도 좋은 지름길이다. 모두 두 지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보장해준다. 반면 여기에서 종 방향과 횡 방향으로 갈라져 나오며 작은 갈래를 치는 경우의 수는 돌아가기를 만들어내는 2차 동선들이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돌아가고 급할 때에는 질러 갈 수 있는 일거양득의 지혜다.
'방➞대청➞광➞마당'을 오가는 경우의 수를 도식화한 것이다.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사거리가 여섯 곳, 삼거리가 열다섯 곳이니 동선의 갈래는 수학적으로는 2의 15제곱×3의 8제곱 가지가 된다. 전진만 한다고 했을 때 사거리 한 곳에서는 세 가지 선택권이, 삼거리 한 곳에서는 두 가지 선택권이 각각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산술적 계산이지만 그래도 한옥에서 동선이 그만큼 다양하게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굵은 선은 중심축을, 파란색은 사선 방향을 각각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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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 주는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한옥이 조금 불편한 것은 더 큰 장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한옥에 담긴 진정한 미학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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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소통, 돌아가기, 질러 가기 –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임석재,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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