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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나온 햇빛의 과학 편에서 한옥이 겨울에 햇빛을 잘 받아 난방에 도움을 받는다고 소개했다. 우리 조상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햇빛을 감각적으로 즐겼다. 햇빛은 기후라는 중요한 과학 요소인데 이것을 감각적 감상과 즐김의 대상으로 발전시켰다. 햇빛을 향한 이런 태도는 한국 전통 문화의 대표적 특징인 감성의 미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이다. 하나는 좌식 생활과 촉각 문화로 햇빛을 살갗으로 직접 받아 체성감각으로 느끼고 즐긴다. 또 하나는 창호지로 시각 작용을 기반으로 다양한 정서 작용을 일으킨다.

좌식 생활과 촉각 문화를 통한 햇빛 즐기기를 먼저 보자. 한옥은 햇빛을 감각으로 받는 데 아주 뛰어난 구조를 가졌다. 일단 처마 길이를 통해 햇빛을 걸러낸다. 천장이 낮고 방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한 번 들어온 햇빛은 방 안 가득 퍼진다. 퍼지다 못해 바닥에까지 잔뜩 흘려놓는다. 남쪽은 물론이고 동쪽과 서쪽에도 창이 나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는 통로가 여럿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즐길 일만 남았다. 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온몸으로 햇빛을 받는다. 시골 닭이 해바라기하는 모습인데, 다소 측은해 보이기는 하지만 해를 받아 즐기기에는 최고다.

여기까지는 좌식 생활의 결과다. 좌식은 입식보다 햇빛을 받는 데 유리하다. 의자나 침대에 앉아서 받는 햇빛과는 질과 양 모두에서 다르다. 입식은 천장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면 방도 깊어져야 한다. 책상과 의자와 침대를 놓아야 하기 때문에라도 방은 깊어진다. 입식에서는 또한 생활형식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창이 문을 겸하기 힘들어져서 창의 크기가 한옥보다 작아진다. 햇빛조차도 점잔을 떨면서 인색하게 받게 된다.

좌식에 접촉 문화를 더하면 햇빛을 즐기기에는 최고다. 바닥에 퍼져 있는 햇빛을 온몸으로 물기 닦듯 흩어 모은다. 살갗으로 비비고 모아 온몸에 바른다. 창문 앞 방바닥에 '철퍽' 앉아서 아이가 어미 젖 구하듯 애절하게 즐긴다. 온몸으로 받아 살갗 전체로 즐긴다. 바로 체성감각을 통해서다. 겨울에 받는 한 줄기 햇빛은 참으로 따뜻하기도 하려니와 우리 조상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좌식 문화와 결부시켜 살갗을 총동원해 체성감각으로 즐겼다. 가히 햇빛의 미학이라 부를 만하다.

한규설 대감가 사랑채

바닥에 앉아서 즐기는 풍경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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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 사랑채

가장 한옥다운 장면으로 이것을 꼽고 싶다. 햇빛으로 방석을 한 장 깔았다. 겨울에 온돌 바닥에 누워 남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빛 한 면을 살갗으로 받아 즐기는 맛은 한옥 생활의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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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 행랑채를 보자. 하인들의 방이라 변변한 가재도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를 한 줄기 햇빛이 충분히 채운다. 창문 앞에 앉거나 누워 살갗으로 햇빛을 즐기는 일은 힘들었을 하층민 생활에서 큰 낙이었을 것이다. 햇빛은 신분 계층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쏟아졌다. 햇빛만을 기준으로 하면 관가정 사랑채와 동급이다. 집의 향과 구조 형식만이 계급을 구별했다. 행랑채라는 이름을 안 붙였으면 어느 양반 나리의 사랑채였을지 모를 일이다.

관가정 행랑채

햇빛은 주인마님의 방과 하인의 방을 구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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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애당 사랑채를 보자. 가히 양반댁 대청답다. 크지도 않고 호사스럽지도 않은데 햇빛을 즐기는 감성의 미학에서는 가히 최고 수준이다. 양반의 수준은 재물이나 권력이 아닌 심미 능력이라는 것을 햇빛으로 증명한다. 수애당 사랑채는 현존하는 한옥 가운데 햇빛을 가장 멋있게 살려낸 집 가운데 하나인데 이런 사실을 낱낱이 보여준다. 왼쪽 절반은 창호지에 그림자의 미학을 더했다. 오른쪽 절반은 마룻바닥에 은은한 색조로 받았다. 그 옆의 분합은 흰 창호지에 직사광선을 받아 활기를 더했다. 모두 늦가을 해질녘에 잘 맞는 감성의 미학이다.

수애당 사랑채

햇빛의 미학을 가장 잘 살린 집이다. 창호지, 마룻바닥, 흰 분합이 각기 자신들만의 햇빛 미학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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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참맛은 여러 가지인데 겨울에 햇빛을 즐기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살갗으로 해를 직접 받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보다 좀더 낭만적인 방법도 있다. 겨울 맑은 날 해가 잘 드는 시간에 방 한가운데에 작은 책상 하나 펴놓고 해를 즐긴다. 온돌에 난방이 잘 들어오면 더없이 좋지만 해를 즐기기 위해서는 너무 따뜻해도 오히려 안 좋다. 두꺼운 스웨터를 입을 정도로 약간 추운 실내가 해의 고마움을 아는 데에는 더 좋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떠놓고 시집을 꺼내 든다. 옛날 연애편지도 좋다. 내가 직접 써도 좋다. 음악을 틀고 차를 마시면서 연애편지나 시를 쓴다. 가급적 종이에 연필로 쓰며 음악은 옛날 레코드판이면 더 좋다. 아날로그 생활방식의 전형적 장면 가운데 하나다.

나상열 가옥 사랑채

남창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은 아날로그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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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집필자 소개

서울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건축을 소재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펼쳐보기

출처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 저자임석재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옥이 주는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한옥이 조금 불편한 것은 더 큰 장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한옥에 담긴 진정한 미학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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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햇빛과 감성의 미학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임석재,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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