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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시작된 빛의 미학은 '포근함'으로 발전한다. 안에서 보는 창호지는 아주 감각적이다 못해 사람의 속살을 보는 것 같다. 살갗을 비벼대며 사람을 포근하게 안아 준다. 뽀얀 속살을 드러내 온기를 실어내고 방 안을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만들어준다.

하회마을 남촌댁을 보자. 창문은 투명하다 못해 사람의 살갗을 보는 것 같다. 그것도 어머니 품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살갗이다. 한낮에 햇빛을 가장 많이 받을 때 창호지는 어머니 젖무덤의 뽀얀 속살 색을 띤다. 창문 재료를 의인화할 수 있는 비밀은 햇빛에 있다. 자연의 단순한 물리적 조건인 햇빛은 의인화를 통해 햇볕이라는 감성체로 발전한다. 이런 방 안에 누워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안정될 것 같다. 물리적 기준으로 따지면 유리보다 탁한 반투명이지만 심리적 기준으로 따지면 유리보다 투명하다. 시리도록 그리운 어머니 속살을 보는 것 같다.

창호지는 창호지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 창문 전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방 안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창호지가 어머니 속살처럼 빛나면 방 안도 그렇게 된다. 방 안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아늑해진다. 창호지가 하는 일을 방도 따라 함께하게 된다. 창호지가 다양하게 변한다는 것은 곧 방 안 분위기가 그렇다는 뜻이다. 창호지가 여러 연상 작용을 유발한다는 것 또한 방도 그렇다는 것이며 창호지가 감성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창호지의 변화무쌍함은 전적으로 햇빛의 작품이다. 여름과 겨울, 맑은 날과 흐린 날 등 계절과 날씨에 따라 모습이 매번 다르다. 하루 중에도 아침 먼동이 틀 때, 한낮, 해 넘어가는 석양 무렵 등 해의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나는 만추 석양 때 창호지 빛이 가장 좋다. 내가 태어난 시각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잔잔한 붉은 빛으로 물든 창호지를 보면 마음속에 감성이 인다.

청풍 후산리 고가 안채를 보자. 딱 이 색이다. 광목처럼 펄럭이는 흰 창 속에 겨울 석양을 받아 홍조 띤 작은 창이 중첩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따뜻한 색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차분한 휴식을 약속하는 색이다. 한겨울 오후 4시 반쯤, 이 장면을 보노라면 마음은 침잠해지고 옷깃을 여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방에 들고 싶어진다. 앞의 남촌댁이 중천에 뜬 해의 생명력을 발산한다면 이 색은 잠들기 직전에 안기는 어머니 품 같다. 곧 꺼질 감성이기에 마음도 곧 차분해진다. 창호지는 이처럼 시간을 매개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성에 부응하는 묘한 능력을 지녔다.

한옥은 햇빛에 대해 매우 과학적으로 대응하는데 창호지도 마찬가지다. 가장 대표적인 계절에 따라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비밀은 처마의 돌출 길이에 있다. 여름 햇빛은 쳐내기 때문에 창호지에는 그림자가 지고 창호지는 시원한 한색(寒色)을 유지한다. 방 안도 따라서 시원해진다. 여기에 바람길을 더하면 큰 어려움 없이 여름 더위를 이겨낼 만하다. 한옥에서는 보통 방 하나에 창문이 여러 개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은 활짝 열어서 바람길을 내고 또 어떤 것은 반쯤 닫아서 창호지의 한색을 즐기면 된다.

겨울은 반대다. 햇빛을 통과시켜서 온통 받아들이기 때문에 창호지는 체온을 품은 것처럼 따뜻한 온색을 띤다. 용흥궁 사랑채를 보자. 숫자로 표시되는 온도는 그다지 높지 않을지 모르지만 창호지 한 장만으로 방 안 분위기는 따뜻해진다. 사람의 온기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 포근함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해의 존재를 넉넉한 어머니 품으로 느끼게 해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누군가 나에게 무척 정성을 쏟는 존재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다. 살 수 있는, 살 만한 환경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창호지는 이처럼 햇빛을 분위기로 바꾸는 마술을 부린다. 신기하고 거대한 미학이다. 한옥은 창호지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집에 온통 구멍을 낸 뒤 창호지로 칭칭 막았는데 창호지를 빼고 어찌 한옥을 이야기할 수 있으랴. 창호지는 자신부터 섬세하다. 집의 부위, 향, 계절, 하루 시간대에 따라 햇빛의 효과를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보는 이도 그만큼 섬세해야 창호지의 미학을 깨닫고 느낄 수 있다. 햇빛을 감각으로 즐길 수 있는 섬세한 심미 능력이 필요하다. 한옥은 이처럼 햇빛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사계절을 경험해보아야 가치와 참맛을 알 수 있다.

창호지는 햇빛을 받아 식구와 인격적 교류를 한다. 햇빛의 미학을 가장 따뜻하고 숭고한 방법으로 창출한다. 스스로 미학적 주체가 된다. 식구의 일원이 된다. 창호지의 미학이다. 겨울 맑은 날, 따스한 햇살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햇빛도 세는 단위가 있다. 한 줄기, 한 모금 혹은 한 아름. 한 줄기는 강한 집중을 내포하면서 다분히 신비적 의미를 갖는다. 한 모금은 소박한 의인화의 성격이 강하다. 한 아름은 넉넉하되 포근하다. 한옥은 이 모든 햇빛 단위를 담아내는 아주 섬세한 생활 그릇이다. 한옥은 햇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물이다. 양과 질 모두에서 그렇다. 햇빛을 듬뿍 받아 집 안 구석구석까지 나눈다. 배산임수의 기분 좋은 남향이니 햇빛 또한 인심만큼 넉넉하다. 솟을대문을 거뜬히 지나 사랑채 대청을 가득 채운다. 중문 속 돌담에도 따뜻한 체온을 준다. 안쓰러운 행랑채에는 더 퍼준다.

햇빛을 다양하게 즐기는 비밀은 창호지에 있다. 해가 움직이는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창호지는 햇빛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겨울 석양을 받으면 붉다 못해 처연해진다. 가을 대낮 햇빛은 청명한 하늘만큼 투명하게 받아들인다. 하루 중에도 해를 따라 바뀐다. 먼동이 트는 아침이면 그 색을 닮아 신비한 청회색을 띤다. 운강 고택 안채를 보자. 광목에 먹물을 뿌려놓은 것 같다. 먹물 알갱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읽힌다. 맑은 겨울 오후 2시, 대청에 따스한 햇빛이 가득 차고 창호지에는 포근한 햇빛이 가득 찬다. 햇빛의 친절에 겨울 삭풍도 잠시 쉬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