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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한 집 한
옥
겨울 대청과 햇빛의 미학
겨울 햇빛을 즐기는 최고의 경지는 의외로 대청이다. 대청은 햇빛 작용이 각별한 곳이다. 공간부터 독특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대청은 구조적으로는 실외 공간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외기에 노출되어서 찬바람을 그냥 맞는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실내 공간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실외 공간인 대청에서 겨울 햇빛의 따사로움을 느끼는 역설이 한옥의 참맛 가운데 최고 경지다. 이런 역설을 즐길 수 있으면 한옥 감상에서 최고수에 해당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대청에서는 햇빛이 직접 체험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대청에서 햇빛의 미학을 즐기기에는 수애당 사랑채가 최고다. 대청 안에서 보면 햇빛의 양 극단을 매우 감상적(感傷的)으로 경험하게 된다. 한 해가 깊어가면서 해가 그리워지는 때일수록 햇빛은 대청 깊숙이 파고든다. 오전 9시쯤 대청 바깥 끝자락에 들기 시작해 정오를 넘기면서 전면을 감싸다가 오후에 안쪽 끝까지 들어와 하루를 마감한다. 햇빛을 온전히 붙들고만 있어도 늦가을 추위쯤은 참아낼 수 있다. 단, 해를 감상적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어느새 해를 보낼 시간이 다가오지만 분합 창호지에 쏟아지는 햇빛은 아직도 청춘인 척 구가(謳歌)한다.
낙천이 너무 심하다면 건너편 행랑채의 짙은 보라와 함께 보면 된다. 이 색은 반대로 너무 염세적이다. 역광과 반사광의 합작이다. 늦가을 저녁이라는 시간 상황을 극도로 표현했다. 수애당 행랑채만의 청승은 아니다. 늦가을 늦은 오후만 되면 대부분의 한옥이 이런 색으로 변한다. 한때 시골 한옥에서 살 생각을 하다가 이 색의 염세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포기한 적이 있었다. 대청 안쪽에서 둘을 대보면 낙천과 염세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취할 수 있다.
여전히 너무 감성적이라면 대청을 나와 마당에서 보면 좀더 객관적으로 해를 대할 수 있게 된다. 감상에 빠지지 않고 해의 장면을 곧이곧대로 보여준다. 정면 분합을 벼락치기 문으로 처리해서 모두 들어올리면 해는 마루 안쪽 깊숙이 파고든다. 대청 옆방의 입면에는 지붕 그림자가 문양을 새긴다. 반대로 그로테스크의 미학까지 합해서 정말로 감성적이 되려면 대청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된다.
겨울 대청에서 햇빛을 즐길 때 절정은 단연 맑은 날 오후 2시다. 대청에 따스한 햇빛이 가득 찬다. 벽이 없이 탁 트였기 때문에 햇빛은 거침이 없다. 한두 시간, 짧기는 하지만 햇빛을 일광욕처럼 즐기기에는 대청이 적합하다. 스웨터의 따뜻한 감촉이 정말로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을 겸손하게 해준다. 기계로 자연을 잠시 눌렀다고 교만해지고 그러면서 몸과 정신이 병들어가는 현대 문명에서는 절대 못 누릴 호사다. 햇빛의 친절에 겨울 삭풍도 잠시 쉬어 간다. 대청이 깊은 사랑채는 갓 쓴 주인마님처럼 중후한 인상이지만 그만큼 햇빛을 크고 깊게 받아들인다. 그 옆에서 소박한 흰 외벽을 두른행랑채가 곰살궂은 돌쇠처럼 단박에 해를 받아들인다.
웬 곰팡내 나는 이야기냐 할 테지만 이런 생활은 정서 안정에 필수적이다. 현대인들의 생활에 이런 생활이 사라지면서 정서 불안이 심해지고 있다. 햇빛은 행복 물질을 분비하게 해주기 때문에 해가 짧은 겨울일수록 하루에 일정시간을 일부러라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낮에 해를 받으면 밤에 숙면을 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현대인이 겨울에 우울증이 느는 것은 햇빛을 안 받기 때문이다. 한옥은 단순히 햇빛의 양만 충분히 받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감성 작용과 연계시켜서 정서적 효과를 배가시켜준다. 정말로 지혜로운 집이다.
우리 조상은 현대 생리학도 없던 그 시절에 이미 햇빛의 이런 위대한 정서 작용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집에 실어냈다. 한옥의 지혜다. 감성의 미학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모두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다. 그만큼 감각적으로 예민하고 정서적으로 섬세했다는 뜻이다. 반대로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듬어주지 못할 때 심한 정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지금 한국인의 상태다. 감성의 미학만이 해답이다. 인위적인 방법은 한계가 있다.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감성의 미학을 실어서 즐겨야 한다. 하루, 일 년, 평생을 사는 집은 매우 중요하다. 한옥은 이것을 해준다.
한옥에는 감성의 미학, 즉 사람을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듬어 주는 장치가 발달해 있다. 햇빛의 미학도 그 가운데 하나다. 햇빛을 알뜰살뜰 주어 옷 속 깊숙이 담고 피부 구석구석 바를 수 있을 때, 그리해서 햇빛을 말초신경 끝마디까지 짜릿하게 느끼고 모세혈관 끝 가닥까지 가득 채울 수 있을 때, 따라서 햇빛을 통해 나의 존재를 여실히 깨달을 때, 그러할 때 한옥의 참맛을 비로소 알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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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 주는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한옥이 조금 불편한 것은 더 큰 장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한옥에 담긴 진정한 미학을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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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겨울 대청과 햇빛의 미학 –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 임석재,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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