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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호기심
초등학교 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일로 첫째가 사과, 둘째가 배, 이런 순서로 배우곤 한다. 그때는 왜 둘째에 배가 들어가는지 항상 궁금했다. 필자의 기억에 배는 별 맛이 없는 과일이고, 제사 때나 사용하는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어린 딸 덕분이었다. 딸아이가 배를 좋아하면서 함께 먹다보니 배가 무척이나 맛있는 과일임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겐 언제 주입되었는지 모르지만 배는 맛없는 과일이라는 편견이 있었으나 딸아이는 아무런 선입관 없이 맛있는 과일이니 먹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 있는 홍차에 대한 집단적인 편견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흔히들 전 세계적으로 물 다음에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라고 하는 홍차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더구나 필자의 오래된 기억 속에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다방에 갔을 때 분명 벽에 붙은 메뉴판에 첫째가 커피이고 둘째가 홍차였던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일상에서 홍차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굉장히 낯설어진 것이다. 솔직히 이런 궁금점도 필자가 홍차를 공부하기 시작한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홍차는 우리에게 새롭기만 한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홍차의 역사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홍차를 생산한 적이 있을까?각주1)
우리나라의 짧았던 홍차 역사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밀물처럼 유입된 서양 문화, 특히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커피와 홍차를 중심으로 하는 다방 문화가 형성되었다. 홍차는 그냥도 마셨지만 첨가물을 넣어 레몬티, 밀크티, 생강티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시켜 마셨다. 특히 다방에서는 위스키를 조금 넣은 ‘위스키 티’도 유행했다.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커피와 함께 홍차가 2대 기호품이었다. 우리나라의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이지만, 1961년 ‘특정 외래품 매매금지법’이라는 법의 제정과 그 이후 전개된 ‘국산품애용운동’으로 수입품이었던 커피와 홍차는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다행히 홍차는 국내에서 생산하게 되었다.
식민 통치 시절, 일본인들은 전남 보성을 차 재배의 최적지로 보고 다원을 세웠다. 그러던 중 해방과 전쟁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에 의해 다시 일부 다원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때 ‘특정 외래품 매매금지법’으로 홍차 수입이 금지되자 오히려 국산 홍차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전남 보성과 경남 하동 일대에는 차밭이 조성되고 생산량도 늘었다. 1960~1970년대는 국산 홍차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것이 필자의 기억에 있는 다방 메뉴판의 배경이다.
1970년대 초반 홍차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가짜와 불량 홍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신문에는 몸에 유해한 색소를 첨가한 홍차 등 불량 홍차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했고, 1976년, 1977년 연속된 겨울 한파와 가뭄으로 차나무가 동사해 공급마저 크게 줄면서 국산 홍차는 소비자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런데 당시의 불량식품은 꼭 홍차만 그런 것은 아니고 가짜 막걸리, 가짜 맥주, 가짜 커피 등이 있었으며, 오늘날 중국의 행태와 비슷하게 국민의 수준과 정부의 통제력이 못 미친 데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는 청량 음료, 유산균 음료 등 다양한 기호품이 개발되어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지자 홍차는 소비자들로부터 점점 더 외면당했다.
녹차의 부흥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부터 정부 지원 아래 녹차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또한 홍차가 잊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각주2)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녹차가 대중적인 음료가 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녹차는 일부 계층에서만 음용했을 뿐 일반 국민에겐 전혀 익숙지 않은 음료였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를 거쳐 정부 문화 정책의 일환인 전통 회복 운동에 힘입어 녹차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던 것이다.
식민 통치 시절 우리 문화에 대한 왜곡된 교육과 해방 후 급격히 밀려든 서구화의 물결로 우리 전통이 후진적인 것으로 무시되고 배척되었다. 민족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자생적 문화 창조의 역량을 잃게 될 위험 속에서 1960~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통문화 정체성 확립을 위한 운동이 시작되고, 정부 또한 민족 문화 전통의 재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정부 문화 정책에 따라 음다 문화 발전에 대한 지원이 이뤄졌다. 1979년 1월 한국차인연합회의 창립을 포함하여 많은 차인 단체가 결성되고 학계의 연구활동도 활발해졌다. 물론 녹차 재배 농가에 대한 지원도 계속되었다.
새로운 시작
같은 차나무 잎으로 만들어지는 비슷한 개념의 홍차와 녹차의 운명은 이렇게 전통이라는 이름과 정부 지원이라는 외부의 인위적인 힘에 의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홍차는 서양의 것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했고, 또 앞서 말했듯이 1970년대를 지나면서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게다가 차 생산의 출발지인 다원에서 정부 지원으로 인해 녹차 생산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홍차는 완전히 잊혔다.
1960~1970년대 이후 오랜 단절의 시간 후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급증한 해외여행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 습득, 다양성에 대한 호기심, 개성 강한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홍차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홍차 음용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다르지만 홍차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증대라는 면에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홍차의 역사를 지닌 유럽과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현황을 보면서 이런 홍차 음용 확산의 이유나 전망을 살펴보자.
영국
홍차 음용은 유럽 문화이고 특히 영국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이지만, 그런 영국에서조차 홍차 음용과 홍차 문화의 침체기가 있었다. 흔히 생각하듯 항상 지금과 같은 화려함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단절과 쇠퇴가 있었고, 오늘날의 모습으로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특히 2000년 이후 많은 발전을 거듭했다. 1959년을 기점으로 영국에서의 홍차 소비는 지속적으로 하향세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 계속된 홍차 배급제도의 영향도 컸다. 독일과의 전쟁 중 홍차 수입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미 영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던 홍차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정부는 1940년 7월부터 1952년 10월까지 13여 년간 배급제를 실시했다. 전쟁 뒤에도 황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고 전쟁 중 진 부채를 갚기 위한 외환 관리 목적으로 배급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런 장기간의 공급 제한은 홍차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을 누그러뜨렸다. 게다가 전쟁 이후부터 1960~1970년대까지 유행한 미국식의 패스트푸드와 커피 바는 영국의 주요 거리에서 티룸이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가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차를 마셨지만 차를 마시러 나가거나 티파티 등 차를 중심으로 한 모임은 점점 사라져갔고, 홍차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전 시대에 지녔던 의미를 상실했다.
커피와 콜라의 시대
이 변화는 부분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차가 이제는 영국의 빠르고 세련된 현대적 삶의 양식과 어우러지기에는 지나치게 구식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홍차는 ‘슬로 베버리지(Slow beverage)’이기 때문이다.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여러 조건이 붙을 수 있지만, 아주 일반적으로 본다면 홍차는 ‘슬로 베버리지’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는 급속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뤘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기반으로 효율성과 생산성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시대였다. 유럽과 일본은 전쟁의 폐허로부터 국가를 재건해야 했고 미국은 유일무이한 강대국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을 전 세계에 확산시켰다.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신속한 것’이 선호되던 시대였다.
음식과 음료 또한 빠른 것이 선호된 시대였다. 제대로 된 것보다는 편리함과 속도가 대세였다. 당연히 간편할 뿐 아니라 자극적이고 바로 효과가 오는 강한 커피와 코카콜라가 홍차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30년을 보낸 뒤 1980년대로 접어들었다.
홍차에 대한 새로운 관심
1980년대부터 일부 세계는 지속된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영국에서는 차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고, 새로운 티숍이 문을 열었으며, 홍차에 관한 새로운 책이 발간되고, 런던 호텔의 티 댄스도 다시 생겨났다. 이 당시 영국인들은 비록 여전히 하루에 5~6잔의 차를 마시고는 있었지만 이 홍차의 대부분은 슈퍼마켓의 티백으로 낮은 품질이었다. 심지어 전통 있는 애프터눈 티로 유명했던 런던의 유명 호텔에서조차도 차 목록은 5~6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마리아주 프레르 참조)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일본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무렵 파리에서도 홍차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마리아주 프레르는 1984년에 출간된 첫 번째 소매용 카탈로그에서 그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250여 가지의 차를 목록에 올렸고, 1985~1986년에 걸쳐 파리 부르 티부르 거리에 문을 연 첫 번째 티하우스와 티살롱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면서 홍차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들러보기를 원하는 장소가 되었다. 프랑스에는 현재 수준 높고 우아한 티룸과 티살롱이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더 많다.
한편 녹차의 오랜 전통을 보유한 일본에서도 이 무렵 홍차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마리아주 프레르의 티하우스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1990년 도쿄에서 문을 열었고 1997년에는 긴자에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겼다. 2003년에는 두 번째 티하우스가 신주쿠에 문을 열었다. 커피의 나라라고 알려진 미국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를 더 많이 마시는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미국은 20세기 초반에 아이스티를 유행시킨 나라답게 여전히 아이스티를 많이 소비하고 있다.각주3) 이전에 비해 뜨거운 차를 마시는 비율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고는 하지는 여전히 차의 85퍼센트는 아이스티로 소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미국인이 마신 차의 40퍼센트가 녹차였는데, 주요 수출국이 일본과 중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과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홍차를 수입했다. 이때부터 미국인의 홍차 음용이 늘기 시작했다. 최근에 다시 녹차 음용이 급속히 늘고 있는데 이는 녹차의 건강상의 이점이 많이 홍보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0년대 초반의 미국 상황도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슷했다. 주로 립턴이나 테틀리(Tetley)의 티백을 우려 마셨고, 호텔과 음식점들조차도 낮은 품질의 차를 대충 우려서 시원찮게 공급했다. 이런 상황이 198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하니앤손스(Harney&Sons)라는 미국 차 회사가 소규모로 시작한 것이 1983년이다.
또한 우리나라도 1980년 초반부터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녹차에 대한 정부 지원과 국민의 관심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앞 장에서 말한 대로다.
다시 홍차로
1980년대의 이런 모든 현상이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그동안 누적된 발전으로 각각의 나라는 나름의 수준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고, 지난 30년간 효율성과 생산성에 매달린 피로감이 쌓였을 수도 있다. 삶과 시대를 잠시라도 뒤돌아보고 싶은, 패스트(fast) 시대에 대한 저항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변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진국의 부유해진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많이 했고, 낯선 세계를 접할 기회의 증가는 자신의 세계를 돌아볼 시간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인들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은 유럽의 홍차 문화를 접하고 영국인을 포함한 유럽인도 동양의 녹차, 재스민차, 우롱차 등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이런 환경의 변화도 차가 부흥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영국의 홍차 전문가 제인 페티그루에 따르면 해외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본인들이 홍차의 나라, 애프터눈 티의 나라 영국으로 그 전통을 체험하고자 왔을 때 정작 영국은 보여줄 게 없는 형편이어서 창피해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언론들이 관심을 가졌고, 흔히 우리나라도 잘하는 것처럼 외국인들에게 그들의 전통을 보여주자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홍차에 대한 이런 안팎의 긍정적인 변화에 응해서 영국의 차 단체 등이 수준 높은 티룸을 찾아서 관광 가이드북 같은 곳에 넣기 시작했다.
이런 티숍이나 티룸 가이드가 현재는 많이 출간되어 있다. 심지어 한국에도 영국의 티룸을 소개하는 책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홍차 르네상스는 일시적인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즉 199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타벅스류 커피숍의 폭발적인 확산에도 불구하고 홍차는 이제 ‘오래된 최신 음료각주4) ’로 커피와는 다른 영역에서 존재감을 넓혀가고 있다. 물론 우리는 유럽에서와 같은 의미의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 차 협회는 2002년 3월에 당시 세계적인 모델이자 패션 아이콘이었던 케이트 모스를 영국 홍차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실시했다. 이것은 차를 나이 든 사람들의 것으로 여기던 젊은 여성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홍차 소비를 촉진할 의도였다. 실제로 케이트 모스가 차 모델로 활동한 2년간 다양한 이벤트를 펼쳤다. 젊은이들을 위한 잡지에 케이트 모스와 그 또래들이 차를 마시는 장면 등을 실음으로써 홍차는 케이트 같은 젊은 유명인도 마시는 트렌디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지나 전지현 같은 톱모델이 홍차를 마시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상당한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르네상스의 원인들
이렇게 시작된 홍차 르네상스가 오늘날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택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홍차가 있고 이 다양성이 거의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차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오늘날 다양한 홍차의 목록은 최근에야 구축된 것이다. 최근 그렇게 환호하는 다르질링도 1980년대까지는 주로 다소 강한 맛의 세컨드 플러시 위주로 판매되었고 퍼스트 플러시가 그렇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봄이 오면 열광하는 퍼스트 플러시의 인기는 10년, 15년도 채 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각주5)
중국도 개방한 초기여서 제한된 숫자의 대표적인 몇 종류의 차만 수출했고, 타이완의 고산지대 우롱차는 아직 자리 잡지 못했을 때였다. 프랑스에서는 일본 녹차가 거의 취급되지 않았고, 스리랑카의 고도에 따른 다양하고도 화려한 차는 구별되지 않고 수출된 시절이 1980년대 전반의 상황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홍차에 대한 관심은 제한된 홍차의 품목에 싫증을 내는 열렬 애호가들을 탄생시켰고, 이들을 위한 틈새시장이 생겨 좀더 다양한 종류의 차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점점 더 좋은 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수요가 공급을 낳고,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선순환이 다행스럽게도 홍차의 세계에서 일어나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홍차 리스트가 갖춰졌다. 오늘날 우리는 다르질링의 퍼스트 플러시와 세컨드 플러시를 구별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원별로 구별되는 홍차를 즐기는 시대를 맞고 있다. 아삼의 다원별 홍차를, 스리랑카의 고도에 따라 구분되는 홍차를 맛보고, 홍차 외에도 다양한 우롱차, 백차, 가향차 등 그야말로 관심만 있으면 원하는 어떤 맛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시절에 있는 것이다.
둘째, 차가 건강 음료라는 인식인데, 여기에는 폴리페놀 같은 항산화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암을 포함한 퇴행성 질병 등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준다는 1차적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 음용자인 젊은이들의 관심사인 다이어트에 좋은 음료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차를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음료로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셋째, 차별화 혹은 이로 인한 정신적인 만족감인데, 폭발적으로 증가한 커피숍에서 대부분의 사람처럼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는 문화적 전통까지 있는 차를 마시는 것에서 오는 어떤 우월감일 수도 있다.
넷째,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시대의 한가운데서 차가 주는, 뭔가 아날로그 같은 위안도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홍차는 ‘오래된 최신 음료’가 아니라 그냥 ‘최신 음료’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아직은 홍차가 낯선 음료로 여겨지는 분위기이지만 서서히 변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위의 홍차 르네상스 원인들이 우리나라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유럽에서 카페인과 여유, 그리고 즐거움을 라테와 아메리카노에서 찾을 뿐만 아니라 다르질링과 아삼, 우바에서도 찾듯이 우리나라 길거리에도 곧 제대로 우린 품질 좋은 홍차를 마실 수 있는 홍차 전문점이 많이 생겨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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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국내 홍차 역사와 르네상스 – 홍차 수업, 문기영,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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