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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아의 탄생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던 배에 선적된 녹차가 바다에서의 긴 항해 동안 더위와 습기로 인해 홍차로 발효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홍차의 원조나 기원은 중국 푸젠 성 우이산 퉁무(桐木)촌에서 생산된 정산소종 혹은 랍상소우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 초기에 푸젠 성 일대에 남아 있던 명나라의 일부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청군이 우이산 퉁무촌에 들어왔고, 이들을 피해 마을 주민들이 도망가면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찻잎을 급히 소나무로 불을 때 건조시킨 뒤 보관했다가 청군이 물러가고 돌아와서 이 찻잎을 꺼내 가공하자 소나무 연기가 밴 찻잎의 품질이 나빴다.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싼값에 팔았는데, 이를 우연히 사 간 유럽인들이 이 차를 더 선호해 홍차의 기원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전설이 생긴 전후의 차 발전 상황을 역사적으로 보면, 명말 청초에 우이 산 일대에서 부분산화차가 등장했다는 데에는 많은 연구자가 동의한다. 이 부분산화차가 이후에 우롱차와 홍차로 발전해나갔다는 것이다.
처음에 네덜란드가 유럽으로 수입해간 차는 녹차였다. 네덜란드를 통해 차를 구입하던 영국이 1689년 우이 산에서 가까운 푸젠 성 아모이 항[오늘날의 샤먼(厦門)]에서 직접 차를 구매할 무렵에는 부분산화차도 함께 구매했으리라 추정된다. 녹차보다 좀더 산화된 이 부분산화차(혹은 나중의 홍차)가 장거리 운송을 거친 뒤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녹차보다 품질이 더 나았을 가능성이 높고,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인들은 이 부분산화차를 더 선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의 이야기다. 녹차보다 산화차 수입량이 더 많아지는 시점은 1730년경을 지나면서다. 당시에는 아직 홍차라는 개념이 없었고, 녹차와는 다른 이 차를 우이 산에서 주로 생산한다고 하여 ‘우이’의 영어식 발음인 ‘보히’ 혹은 ‘보헤아(Bohea)’라고 불렀다. 즉 영국이 수입해간 보헤아는 오늘날의 홍차보다는 우롱차에 훨씬 더 가까운 차였으리라 추정된다. 이 보헤아라는 용어는 우이 산에서 온 잎이 검고 넓은 모든 고품질의 차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렇게 보헤아란 이름으로 공급되는 우롱차는 생산량 및 수출량이 늘어났다. 이것은 아마 영국인들이 더 강한 차를 선호함에 따라 수출지인 중국 생산자 입장에서도 산화도를 더 높여갔고, 또 중국 생산자도 유럽까지의 장거리 운송에는 녹차보다 산화된 차가 품질에서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랍상소우총과 정산소종
이런 역사적 배경 속의 어떤 시점에 위의 전설 속의 퉁무촌 사건이 발생했거나, 아니면 퉁무촌의 차 생산 시기인 4~5월에는 항상 비가 많이 와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편으로 실내 위조와 소나무 연기를 통한 건조법이 만들어졌든지 간에, 퉁무촌에서 소나무 연기로 훈연한 차가 생산되어 수출되었고각주1) 이것이 특히 영국인들에게 보헤아 중 고급스런 것으로 선호되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위의 전설을 인용해 퉁무촌에서 나온 이 차를 홍차의 기원이라거나 명말 청초 우이 산 일대에서 처음 생긴 부분산화차의 기원으로 보는 주장도 있지만, 극적인 요소를 위해 전설은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현실성을 좀더 따져본다면 이미 우이 산에서 생산되고 있던 많은 부분산화차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나무 연기에 훈연한 독특한 향 때문에 많은 산화차 중에서도 유달리 차별화되어 선호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1720년대에 이미 영국이 수입하는 홍차 계통각주2) 이 공부, 소종, 백호 등으로 좀더 고급화되면서 보헤아는 일반적인 홍차를 뜻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소종은 적은 양이 생산되는 차라는 의미도 있고, 연기에 훈연한 차를 뜻한다고도 전해진다. 따라서 이것이 우이산 퉁무촌에서 생산된 소나무 연기에 훈연된 차를 의미하며, 이 소종이 수출항이 있던 푸저우(福州) 지방의 방언으로 소나무를 나타내는 랍상(Lapsang)과 합쳐져서 랍상소우총이 되었을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정산소종이라는 말은 이 독특한 소나무 향이 나는 랍상소우총이 인기를 얻자 우이 산 외 지역에서도 모방한 랍상소우총(외산소종, 연소종이라고도 불린다)이 생산됨에 따라 이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정산, 즉 우이산에서 생산한 것으로 훨씬 후에 정산소종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랍상소우총 하나였으나 모방품이 생겨나면서 모방품이 랍상소우총이 되고 진짜 랍상소우총을 가짜 랍상소우총과 구별하기 위해 정산소종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홍차라는 것이 위의 전설과 달리 특정한 시기에 극적으로 탄생한 것이라기보다는, 녹차와는 다른 차로서 우롱차의 기원이 되는 부분산화차가 탄생하고 이것이 유럽, 특히 영국으로 가서 인기를 끌자 차를 생산할 수 없는 영국인의 취향에 맞춰 중국인이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영국인들은 1860년대에 인도 시대가 열리면서 자신들의 취향에 좀더 맞게 영국식 홍차를 직접 새로 만들어낸다. 대신 중국은 이 부분산화차를 중국인들을 위해 우롱차라는 탁월한 제품으로 완성시켰다.
오늘날의 랍상소우총과 정산소종
현재 우리나라에는 유럽의 홍차 회사에서 들어오는 랍상소우총이라는 홍차와 주로 중국에서 수입되는 정산소종이라는 홍차가 있으며, 이 두 차의 맛과 향은 꽤나 다르다.
랍상소우총은 서양에서 검은 액체를 뜻하는 타르(tar)를 연상시키는 타리 랍상(tarry lapsang)이라고도 불리듯이, 맛이 상당히 강하고 향이 정로환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차로 고전적 홍차에 익숙한 사람들은 언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반면 정산소종이라 불리는 것은 맛과 향이 아주 부드럽다. 하지만 이 두 종류는 여전히 우이산 퉁무촌에 기원을 두고 지금도 그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차다. 물론 랍상소우총은 우이 산 외의 다른 지역과 대만에서 생산되는 것도 있다. 정산소종이라 불리는 것도 우이 산 외의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국의 현실로 보아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명칭도 다르지만 맛과 향의 차이는 왜 이렇게 클까?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은은한 소나무 향이 나는 원래의 랍상소우총이 수요가 많고 고가에 판매되었으나, 이것은 우이 산에 야생으로 자라나는 차나무에서 이른 봄 한정된 시기에 채엽된 잎으로만 생산되어 공급이 제한되었다. 따라서 우이 산 외의 지역에서 유사하게 만들면서 소나무 향을 강하게 착향시키는 과정이 오랫동안 진행됨에 따라 현재의 강한 향을 품은 랍상소우총, 즉 타리 랍상이 된 것이다.
퉁무촌에는 원훈다창이라는 홍차 제조회사를 운영하는 강원훈 대표각주3) 가 있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도 강한 향의 랍상소우총과 원래의 랍상소우총, 즉 이제는 정산소종이라 불리는 두 종류의 차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정산소종은 주위 숲속에 위치한 다원에서 채엽한 이른 봄의 특별한 싹으로 아주 정성 들여 만든다. 그보다 몇 주 뒤에 생산되는 랍상소우총은 주변의 다른 지역에서 채엽된 좀더 성장한 큰 찻잎으로 만들며 이미 현지에서 부분가공돼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훈연하고 건조하기 위해 옮겨온다는 것이다. 이 랍상소우총은 많은 연기를 흡수한 탓에 섬세함이 떨어진다. 또 하나의 차이를 들자면, 정산소종은 차가운 연기로 훈연하는 반면 랍상소우총은 습기 있는 뜨거운 연기로 훈연한다.
처음에는 뿌리가 같았던 훈연차가 이렇게 사용한 찻잎과 생산 방법의 차이로 맛과 스타일이 매우 다른 독특한 차들로 발전했다. 이 정산소종은 양도 적고 고가이기 때문에 중국 바깥에서는 판매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서양에서 판매되는 것은 대부분 랍상소우총이다.
아! 랍상소우총
따라서 랍상소우총이 정산소종보다 품질이 떨어진다거나 혹은 가짜 정산소종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된 역사와 열렬한 애호가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현실에 비춰 적합하지 않은 평가다. 물론 랍상소우총이 다른 홍차에 비해 선호가 갈리는 것은 분명하다. 랍상소우총도 품질의 격차가 클 테지만, 제대로 만든 랍상소우총은 자신만의 훌륭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또 어떻게 보면 인공적으로 향을 더한 것이므로 가향홍차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치 얼그레이가 가향이면서 클래식 홍차 대접을 받듯이 랍상소우총도 그런 듯하다. 영국의 전통 있는 홍차회사인 포트넘앤메이슨은 스테디셀러 제품에 ‘아로마틱 티(aromatic tea)’라는 부제를 붙여 랍상소우총을 판매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스테디셀러인 스모키 얼그레이(smokey earl grey)는 전통적인 베르가모트 향을 랍상소우총과 건파우더 블렌딩 제품에 가향한 독특한 차인데, 특히 이 차는 왕실의 요청에 따라 만들었다.
이밖에도 전통 있는 여러 홍차회사에서 랍상소우총을 스테디셀러로 판매 목록에 포함하고 있고 다양한 블렌딩 제품의 배합에도 쓴다. 비록 모방으로 탄생했지만 랍상소우총은 이미 세계 홍차 시장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매우 귀하고 비싸 구하기조차 어렵다는 정산소종으로부터 2005년 무렵 금준미(金駿眉), 은준미(銀駿眉) 등 최고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제품들이 중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해 엄청난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필자의 미각으로는 그 훌륭하다는 맛을 감지해내기 어려웠다. 어떤 이가 말한 중국식 마케팅의 극치라는 표현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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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Mary Lou Heiss and Robert J. Heiss, The story of tea, Ten Speed Press, 2007, 132쪽,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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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정산소종과 랍상소우총 – 홍차 수업, 문기영,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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